가짜 왕 용상에 앉혀 정치판 뒤엎는 팩션
  • 황진미│영화평론가 ()
  • 승인 2012.09.2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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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발칙한 상상으로 ‘상식의 정치’ 설파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닮은꼴에 의한 자리바꿈이라는 소재를 차용한 사극이다. 최근 개봉한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왕자와 거지> 설정을 차용한 것이라면, <광해>는 <카게무샤>와 <데이브>의 설정을 차용했다. 특히 <데이브>와는 인물의 구성과 플롯이 매우 유사하다.

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서자임에도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즉위 후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폐한다. 서인들은 이에 반발했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폐한 것과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은 것이 ‘패륜’이라는 이유였다. 오랫동안 광해군은 반정으로 쫓겨난 폭군으로 인식되어왔지만, 1980년대부터 대동법 실시와 실리 외교가 높이 평가되었다. 최근에는 호의적 재평가가 또 다른 왜곡이라는 지적도 존재한다.

영화 <광해>는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광해군 치세에 발칙한 상상을 끼얹는다. 독살 위협을 느끼던 왕은 닮은 사람을 찾아오라 명하고, 도승지 허균은 기방에서 야설을 풀던 광대를 찾아내 궐로 데려간다. 왕이 궐 밖에서 자는 사이 왕 대신 잠이나 자게 하려는 것이 애초 계획이었으나, 왕이 예기치 못한 혼수 상태에 빠지자 가짜 왕이 국정을 보아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가짜 왕은 차츰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내시와 궁녀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진짜 왕은 한 번도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는 주변 노동자의 삶이다. 가짜 왕은 모함이 난무하고, 백성들의 삶보다 정치 공학적 이합집산이 우선되며, 이를 대의명분으로 포장하는 정치에 분노한다. 영화는 대동법과 실리 외교 등 광해군의 주요 업적이 가짜 왕에 의해 시행된 것이라는 상상을 통해, 평범하고 상식을 갖춘 사람 누구를 왕 자리에 갖다놓아도 기존의 정치 세력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이른바 ‘상식의 정치’를 설파한다. <광해>는 <뿌리 깊은 나무>나 <선덕여왕> 등에서 보았던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나, 권력의 심연이나 선악의 모호함 등을 깊이 있게 다루지 않는다. 대신 기존 정치 세력 대 상식을 갖춘 시민을 대립 구도로 해, 단순 명쾌하게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1인 2역에 슬랩스틱 코미디까지 소화한 이병헌의 연기와 조연을 맡은 장광·심은경의 연기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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