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더 국악 사랑하는 외국인들
  • 한덕택│전통문화 평론가·한국외대 연구원 ()
  • 승인 2012.10.09 10:1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단순히 즐기고 배우는 차원 넘어 연구·연주까지 ‘척척’

(왼쪽)조세린, (오른쪽 상단부터 순서대로) 힐러리 핀첨 성, 이안 코이츤베악(왼쪽), 힐러리 핀첨 성. ⓒ 힐러리 핀첨성, 조세린 클락, 이안 코이츤베악 제공
한국사에 기록된 첫 귀화 외국인은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후이다. 머나먼 여정 끝에 한반도 남쪽에 도착한 그녀가 김수로왕과 만나 국모의 자리에 오른 지 2천년이 가까워온다. 최근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1백20만명을 웃돌 정도로 한국은 글로벌 국가가 되었다. 외국인을 만나거나 사귀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방송인이자 국제변호사인 하일씨,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연임한 이참씨, 제프리 존스 전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변호사) 등은 이미 유명인이다. 한류 스타인 걸그룹과 아이돌 중에도 외국인 멤버가 있고, 전국 각 대학에는 외국인 교수와 유학생들이 넘쳐난다. 이들 외국인 중에 우리의 전통문화를 배우고 즐기는 사람들 또한 점점 늘어가고 있다.

전통 공연예술 현장을 자주 찾으며 만난 이들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우리의 전통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강의와 연주를 하는 외국인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한국인과 결혼해 자녀를 두고 있는 사람도 있고, 한국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겉모습만 외국인이지 오히려 우리보다 더 한국인의 문화를 사랑하고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2009년 덕수궁에서 열린 <국악 활개 펴다>라는 공연의 사회를 볼 때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의 힐러리 핀첨 성 교수를 만났다. 그는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음악인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현지의 대학 연구소에서 한국 음악 및 동아시아 관련 연구원 및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하며 한국 음악을 연구했다. 20여 년 전 처음 들은 한국 전통음악의 신비한 음색에 매료되어 국악의 독창성을 연구해왔다. 한국 현대음악과 전통음악의 접목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단행본 <1930년대 한국의 신민요>를 펴냈고, <이론에서 실제로: 한국 작곡자들의 변> 등 한국 음악과 관련한 논문도 다수 내놓았다. 한국의 악기 중 해금을 좋아해 직접 연주를 하기도 한다. 그의 초등학생 딸은 판소리를 배우며 그것을 전공으로 삼아 계속 공부할 것을 고민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모전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의 헤더 윌로비 교수 역시 한국 판소리와 사랑에 빠진 외국인이다. 대학 시절 의학도로서 선교 활동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기회에 판소리를 접한 그녀는 귀국 후 전공을 음악학으로 바꿨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판소리에 대한 갈증이 풀리지 않아 다시 한국을 방문해 이주은씨에게 소리를 배우며 전국의 명창들을 만나러 다녔다. 지금도 북을 마주하고 소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가끔은 부채를 쥔 채 직접 소리를 하기도 하고,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일도 하고 있다.

조세린(가운데)과 힐러리 핀첨 성(오른쪽). ⓒ 힐러리 핀첨 성 제공
내용도 모르는 판소리를 5시간 동안 감상한 독일인

배재대학 아펜젤러학부의 조세린 교수 또한 우리 음악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외국인이다. 알래스카 출신인 그녀는 군인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일본과 중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중국의 쟁과 서예를 배우는 등 동아시아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다. 약 20년 전 가야금을 접한 후 그 매력에 빠진 조세린은 그 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가야금과 가야금 병창을 주제로 논문을 써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한국 강단에 섰다. 지금도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병창을 수련하며 직접 연주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한국 음악을 더 많이 사랑했으면 한다는 그는 해외에서도 우리 음악을 자주 연주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대전 지역에서 활동하는 화가의 전시회에서 가야금 명인 황병기 교수의 작품을 연주하는 등 한국의 전통예술에 담긴 예술혼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 음악을 사랑하는 외국인으로는 독일에서 연극학 박사 과정을 이수하며 현재 주한 독일문화원에 근무하는 이안 코이츤베악 씨도 빼놓을 수 없다. 주독 한국문화원에서 젊은 소리꾼 이자람씨의 짧은 공연을 보고 판소리의 매력에 빠진 코이츤베악 씨는 이후 연극을 보기 위해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온 그가 한 달 동안 본 공연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최영길 명창의 <심청가>였다. 처음에는 줄거리도 잘 몰랐지만 5시간 동안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청중이 직접 참여하고 함께 공감하는 것이 판소리의 매력이라고 진단했다. 단순한 음악이 아닌 연극적 요소가 강한 판소리의 매력에 빠진 그는 판소리에 관한 책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판소리 공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고 있다. 현재도 판소리 공연에 대한 공연평을 한글로 직접 작성해 매체 등에 기고하고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외국인이 한국의 전통문화에 남다른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서울 성북동 한옥마을의 난개발을 저지한 파란 눈의 한옥 지킴이 피터 바돌로뮤 씨, 한국의 전통문화 유적을 답사하고 한국 문화를 배우고 있는 주한 외국대사부인회, 한국에 장기 체류하며 이제는 한국 사람 못지않은 문화적 식견을 자랑하는 유럽연합상공회의소와 주한미국상공상회의소의 회원 등….

우리는 오히려 이들을 통해 우리 음악이 가진 고유의 정체성과 아름다움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때로는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잊고 전통음악이나 한국 음악은 단순히 지루하다거나 재미없다는 선입견을 보인다. 하지만 문화의 시대, 세계와의 소통을 위한 출발점은 바로 나를, 우리를 바로 아는 것이 아닐까.


라이언 캐시디. ⓒ 라이언 캐시디 제공
필자는 지난 6월,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서울무형문화재전수회관 풍류극장에서 한국판소리보존회가 개최한 ‘제17회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에 청중으로 갔다가 이 대회에 참가한 한림대 국제학부 교수인 라이언 캐시디(Ryan J. Cassidy) 씨를 처음 만났다. 캐시디 씨는 이 대회 신인부의 유일한 외국인 참가자였다. 그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 하나인 <춘향가> 중 ‘사랑가’ 대목을 불렀다. 단정한 외모에 흰색 도포와 갓, 술 띠 등을 멋지게 갖추어 입고 똑똑 떨어지는 한국어 발음으로 고수의 북 장단에 따라 정확하게 박자를 맞추어 판소리를 하는 모습은 풍류극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판소리는 어떻게 접하게 되었나?

아내의 친구가 판소리를 배우고 있었는데 그분의 스승인 소숙자 선생님의 공연이 있다고 해서 가족과 함께 처음 판소리 공연을 관람했다. 캐나다에서 한국에 온 지 15년 가까이 되는데 판소리를 실제로 듣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꾼과 북을 치는 고수, 관객석에 앉아 있는 청중들이 바둑판처럼 같이 ‘판’을 짜고 서로 상호 작용을 하며 몰입하는 것이 아주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것을 시작으로 판소리 공연을 자주 보게 되고 소숙자 선생도 알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판소리가 어렵기는 하지만 재미있어 할 것들이 요술주머니처럼 많을 것이라며 배워보라고 했다. 선생님의 권유도 있었고, 판소리가 조선 시대의 역사와 생활상을 담고 있어 여러 가지 재미있는 공부가 될 것 같았다. 또한 한국어를 공부하기에도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 개인 사사를 받기 시작했다. 햇수로 3년째 되었다.

판소리가 가진 특별한 매력이 있다면 무엇일까?

판소리 다섯 마당 중 <심청가>를 교재로 해서 판소리를 배웠다. 판소리를 배우는 데 몇 가지 어려운 점도 있었다. 첫째, 판소리 사설 자체가 그 시대에 살았던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라 한국말이 유창하지 못한 외국 사람에게는 공부해야 할 단어와 한자 숙어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둘째, 발음 문제가 있었다. 나는 자음과 모음을 따로 떼고 붙이거나 받침 글자와 겹자음 등을 어떻게 발음하는지 아기처럼 다시 배워야 했다. 소숙자 선생께서도 늘 강조하셨지만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노래를 한다면 그 얼마나 고역일까.

어떻게 전국 판소리 경연대회에 나가게 되었나?

지난해 강원일보에 내 기사가 나간 뒤 여러 곳에서 전화가 왔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KBS 국악 한마당>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다. 내 생애 첫 공연이었는데, 너무 긴장해서 엄청 실망을 했다. 그 이후로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날 내가 제일 못 한다고 생각했던 것, 회피하고 싶은 것을 정면으로 딱 맞닥뜨려서 그것을 넘어보려 노력해보고 싶어 경연대회에 참가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특별한 계획은 없다. 한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한국의 전통음악인 판소리를 통해서 사람과 사회, 문화, 예술, 경제, 정치, 역사, 심리 등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배웠다. 사람과 문화를 이해하려면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의 언어를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루를 살든 보름을 살든, 1년을 살든,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의 언어를 이해하는 데서 휴머니즘이 생기고 모두가 다르다는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나는 그 도구로 매력적인 판소리를 골랐다.


 
 

[시사저널 주요 기사]

■ 네티즌 후리는 ‘수상한 검색어’ 마술      

■ ‘530GP 사건’ 김일병, 범행 진실 묻자 ‘울기만…’

■ 미국에서 바라본 싸이와 <강남스타일>의 마력

■ 대선 후보들에 대한 경호 활동 백태, "바짝 붙어 있거나 없는 듯 움직이거나"

■ 한국인보다 더 국악 사랑하는 외국인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