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더 하면 내 성을 갈겠다”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2.10.16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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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초대 총재 정구영이 밝힌 ‘3선 개헌·유신’ 막후

일요일인 1969년 9월14일 새벽, 3선 개헌안을 날치기한 공화당 의원들이 국회 제3별관 뒷문으로 빠져나오고 있다. 본회의 의결 없는 장소 이전, 공휴일 개회는 그 자체가 불법이며 기만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로써 1971년 4·27 대선 출마 자격을 얻었고, 당선 7개월 만에 비상사태을 선포하면서 유신을 준비했다. 1972년 10월17일 박대통령은 본인이 출범시킨 제3공화국의 막을 내렸다.
■ ‘시대의 양심’-청람(淸嵐) 정구영(鄭求瑛)

인품이 훌륭한 이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평생 견지하는 삶을 영위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터이다. 하물며 혼돈의 시대에, 혼탁한 세상에서 양심을 지키며 사는 것이 지난한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럴진대 술수와 협잡, 회유와 강압이 난무하는 우리의 정치판에서 양심은 연목구어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드물지만 예외가 없지는 않다. 청람 정구영이 있다. 그는 사표로 추앙받을 만한 ‘시대의 양심’이다.

박정희 정권의 모태가 된 민주공화당 초대 총재를 지낸 청람에게 ‘시대의 양심’이라는 호칭은 언뜻 이상하게 들린다. 그러나 청람의 족적을 더듬으면 이내 수긍하게 된다. 그는 서슬 퍼런 독재 시절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재선거 실시’를 촉구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3선 개헌 불가’를 외치고, 유신 시절에는 반독재·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섰다. ‘더러운 곳에 머물더라도 깨끗함을 잃지 않은’ 청람은, 그의 아호 그대로 권력의 회유와 억압 속에서도 양심과 신념을 지키며 ‘맑은 아지랑이’처럼 살다 떠났다.

청람의 올곧고 꿋꿋한 기상 넘치는 삶을 흠모하는 예춘호씨 등은 <시대의 양심>(서울문화사)이라는 제목의 정구영 평전을 펴냈고, 지난 10월1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김종필 전 총리와 이만섭 전 국회의장 등은 “이 나라 정당 정치의 온전한 틀을 만들었고, 굳은 신념과 소신으로 우리 정치를 바른 길로 이끈 강직한 선비였다”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시대의 양심>에는 민주공화당 창당, 3선 개헌 전말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박정희 시대의 숱한 비화가 담겨 있다.  

■ “원대 복귀해야”…군 지휘부도 반대

5·16 이후 2인자 김종필(JP)은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민정 이양 시 정권을 담당할 정당 창당을 비밀리에 추진한다. 창당 작업을 시작한 지 1년여 지난 1963년 1월, 주체 세력은 청람을 가칭 재건당의 얼굴로 삼기 위해 설득한다. 재야 정치인들의 정치 참여 권유를 거부해온 청람은 결국 주체 세력의 제의를 수용해 합류한다. 가난 극복 등의 구호도 그를 움직이는 데 한몫했음 직하다. 창당 작업은 그러나 주체 세력 내 반JP 그룹의 격한 반대와 미국의 방해에 부딪혀 시련을 겪는다.

JP의 독주에 반발하는 세력은 JP가 창당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불법을 저질렀다며 책임을 물었다. 증권거래소를 장악해 주가 조작으로 엄청난 부당 이득을 취한 ‘증권 파동’을 비롯해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파친코 사건’ 등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이 그것이다. 

여기에 군의 원대 복귀를 주장하는 군부 지도자들이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나서는 등 긴장이 거듭되었다. 김종오 육군참모총장은 휘하 병력을 비상 대기시킨 뒤 해·공군 총장, 해병대사령관과 함께 박정희 의장을 찾아가 JP의 공직 사퇴와 출국 조치는 물론 “무조건 군으로 복귀”를 요구하기도 했다.

박의장의 민정 불참을 공언하는 2·18 성명은 이같은 상황의 산물이다. 박의장은  2·18 성명 발표 직후 JP를 불러 외국에 나가 있도록 조치했다.

JP는 외유에 나서기 전 청람에게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고, JP가 이른바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난 다음 날인 1963년 2월26일 민주공화당 창당대회가 열린다. 청람은 초대 총재가 되었다.

박의장의 강권 발동은 이후 본격화된다.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이던 김동하씨를 비롯한 21명을 반혁명 군부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이유로 잡아들이는 한편, 계엄 선포와 군정 4년 연장 카드까지 내비쳤다.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장교 하사관 30여 명이 최고회의 앞에서 국방장관 해임 등을 요구하는 웃지 못할 시위가 벌어진 다음 날 박의장은 군정 연장 가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한다. ‘3·16 번의’라는 비아냥거림의 대상이 되었던 성명이다.

청람은 공화당 당무위원들이 당 총재가 3·16 성명을 지지하는 선언을 발표하라고 요구하자 “군정 연장을 정당이 어찌 찬성할 수 있느냐”라며 거부했다. 청람은 정국 수습을 위해 윤보선·허정 등 재야 지도자들과 접촉한다. 그 타협 결과가 군정 연장 철회를 내용으로 하는 또 한 차례 박정희 의장의 번의, ‘4·8 성명’이다.

■ “나쁜 개헌은 안 된다” 3선 개헌 반대

1966년 11월28일 청람은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다. 1967년 대선을 5개월여 앞둔 시점이었지만 별로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지난 4년의 치적을 감안하면 1963년 대선 때의 15만표 차와는 다르리라는 확신에서다.

이 자리에서 청람은 ‘문제는 3선 금지 규정 때문에 박대통령이 출마할 수 없는 71년 대선’이라고 거론했다. 청람은 이를 대비해 후계자 지명과, 2기 대통령 취임 1년쯤이면 등장할 3선 개헌론 경계를 당부했다. “각하의 그늘에서 권력을 누리고 치부를 한 사람들이 3선 개헌을 조를 것”이라고 예고하기도 했다.

청람은 ‘감언이설을 과감하게 뿌리치지 않으면 역사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고 했다. 이후(1967년 2월8일) 박대통령은 “선생님 말씀대로 71년 선거에는 절대 안 나가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2기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지 얼마 뒤부터 3선 개헌론은 고개를 들었고 박대통령은 1969년 7월25일 공화당 내부의 거센 반발을 거스르며 승부수를 띄운다. “국민투표를 통해 나와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겠다. 부결되면 국민의 불신임으로 간주해 즉각 물러나겠다.” 청람의 “어디에 근거를 두어 개헌을 발의하라고 의원들에게 종용하시는 것입니까? 부결되면 사퇴한다는 말은 사리에 어긋납니다”라는 직언도 허공에 흩어졌을 뿐이다.

박대통령은 1969년 5월 청와대에 불려온 김재순 공화당 대변인이 “개헌에 반대합니다.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정면으로 반대하자 “나 한 번만 더 하고 그 이상은 안 할 테야. 다음에 종필이한테 넘겨줄 거야. 도와줘”라며 설득했다. 박대통령은 “그리고 또 하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되묻는 김대변인에게 “그러면 내 성을 갈겠어”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혼란이냐, 안정이냐!’는 협박성 구호와 금품·관권을 총동원해 국민투표의 고비를 넘겼다. 1969년 8월 박대통령은 옥천 시골집에 있는 청람에게 친서를 보내 3선 개헌을 찬성하든지 탈당하든지 양자택일하라고 윽박질렀지만 청람은 모두를 일축했다. 이 친서를 전달한 것이 후일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 의원이다. 차지철이 청람을 채근하고 있을 때 청람이 ‘깊고 넓게 보는 인물’로 평가하던 김재규 보안사령관(10·26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을 사살한 중앙정보부장)도 청람을 찾아왔다. 이랬던 청람이었으나 유신 때는 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탈당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 “환관 정치 안 돼”…‘부통령’ 이후락과 맞서다

1964년 6월 청람은 JP 후임으로 공화당 의장이 된다. 청람은 이후락 비서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박대통령을 마주했다.

“청와대는 정치자금에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항간에 이후락 비서실장이 부통령이고 실제의 국무총리·재무장관·상공장관이라는 말이 공공연합니다. 비서실장을 바꾸는 게 옳습니다.”

청람은 “잘 생각해서 처리하겠다”라던 대통령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며칠 뒤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 “중국 역사를 봐도 환관 정치가 성공한 예는 없습니다. 우리 조선조도 그렇습니다. 환관 정치는 백해무익합니다. 각하의 혜안을 어지럽히는 군측간(君側奸; 왕 옆에서 왕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간신)을 제거해야 정당 정치가 본연의 궤도를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말씀대로 교체하겠습니다. 시간을 좀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하지만 소식이 없자 청람은 3주 만에 청와대에 올라가 이후락 실장 교체를 역설한다. 박대통령은 바꾸겠다고 했으나 이실장은 건재했다. 박대통령은 공화당 당무위원회가 ‘이후락 실장 해임 건의안’을 정식 의결까지 했지만 외면했고, 참다못한 청람이 대통령에게 당의장직 사퇴서를 제출했을 때 반려하는 뜻을 전해온 것도 이실장이었다.

서울문화사가 지난 10월8일 발간한 . ⓒ 시사저널 임준선

1896년 충북 옥천 출생. 경성법률전문학교 졸업 후 검사를 거쳐 30여 년간 변호사로 활동했다. 논리 정연하고 열정적인 변론으로 이름을 날렸다. 1930년 경성조선인변호사회장, 1943년 경성변호사회장, 1946년 조선법조회 이사장, 1947년 조선인권옹호연맹 이사장, 1956년 한국법학원장, 1959년 서울변호사회장·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낸 법조계 명망가이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시민을 향해 경찰이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재선거 촉구 성명서를 발표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총재가 되었고, 그해 6대 국회의원, 1964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다. 7대 국회의원 때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앞장서 반대했고 유신 체제가 출범하자 1974년 1월 탈당했다. 그해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1978년 5월22일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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