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인격 장애 살인’으로 거짓 자백했다 들통 난 미국 ‘케네스 비안치 사건’
  • 표창원│경찰대 교수 ()
  • 승인 2012.10.3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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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19일 법정에서 흐느끼며 진술하는 연쇄 살인 용의자 케네스 비안치(왼쪽). ⓒ AP연합
1977년 가을부터 1978년 겨울 사이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외곽 언덕배기 이곳저곳에서 옷이 모두 벗겨진 여성들의 시신 10구가 발견되었다. 경찰 감식과 법의관 부검 결과 피해자들은 모두 강간당한 뒤 목이 졸려 살해되었다. 범행 수법이 똑같은 ‘동일범에 의한 연쇄 살인’이었다.

1979년 1월11일, LA로부터 약 2천㎞ 떨어져 있는 워싱턴 주 벨링햄에서 두 명의 여성(22세 카렌 맨딕, 27세 다이앤 와일더)이 살해당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옷은 모두 입혀져 있었으나 경찰 감식 결과 두 여성 모두 강간당한 뒤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경찰의 현장 수사 결과 범인이 남긴 발자국·지문 등의 증거가 발견되었다. 다음 날 아침, 범죄 장소였던 빈집의 관리를 맡은 경비용역원 중 한 명으로 얼마 전 LA에서 이사 온 28세의 청년 케네스 비안치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벨링햄 경찰은 이 사실을 LA 경찰에 통보했고, 곧 LA 경찰 수사진이 벨링햄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비안치는 계속 횡설수설하면서 LA 연쇄 살인에 대해 전혀 모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벨링햄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에서도 같은 태도를 취하던 비안치는 경찰이 족적과 지문 등 증거를 들이대자 사실은 자신이 종종 기억을 잃는 기억상실증 환자이며, 그 당시에도 기억을 잃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진술했다.

최면 심문 결과 ‘다중인격 장애’로 보였지만…

비안치의 변호사 브렛은 범죄심리학 교수이자 정신과 의사인 도날드 룬드 박사와 최면 요법 전문가로 유명한 범죄심리학 교수 죤 왓킨스 박사에게 비안치에 대한 정신 감정을 요청했다. 곧 최면 신문이 실시되었고, 심문 도중 자신이 ‘케네스 비안치’가 아니라 스티브라고 주장하는 ‘다른 인격’이 등장하더니 비안치가 아닌 자신(스티브)이 벨링햄에서 맨딕과 와일더를 살해했고, LA에서는 10명의 여성을 연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1979년 3월30일 열린 공판에서 비안치의 변호사는 ‘다중인격 장애로 인한 심신 상실 상태에서 행한 범죄이므로 무죄’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검찰은 비안치측 전문가 증인인 범죄심리학자들의 진단 내용에 대한 반박을 위해 내로라하는 범죄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을 감정 증인으로 위촉했다.

그야말로 사상 최초, 전대미문의 ‘범죄심리학 대전’이 벌어진 것이다. 곧 비안치에 대한 가족력 조사, 최면 신문, 비안치의 정신세계 속에 존재하는 각 인격에 대한 심리 검사 등 복잡하고 다양한 검사와 조사들이 행해졌다. 전문가들의 진단 결과는, 전형적인 ‘다중인격 장애’라는 의견과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철저한 거짓말’이라는 양극단으로 갈렸다.

특히 다중인격 장애 환자 48명에 대한 진단 및 치료 경력을 가진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꼽히던 앨리슨 박사는 2개월여에 걸친 심층 면담과 최면, 심리 검사 결과를 정리한 1백24쪽 분량의 보고서를 냈다. 비안치 안에 ‘케네스’와 ‘스티브’ ‘빌리’의 세 인격이 존재하며 살인을 저지른 ‘스티브’는 정신분열증과 편집증을 앓고 있는 매우 폭력적인 성향으로, 비안치의 아버지가 사망한 13세 때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비안치에 대한 최면 신문 과정을 CCTV로 모니터링하던 LA경찰청 프랭크 살레르노 형사는, 비안치가 ‘스티브’로 변해 범행 과정을 이야기하던 중 자신을 ‘내가’(I)가 아닌 ‘그가(He)’로 표현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찰나를 포착했다. 곧 살레르노 형사는 추가 보강 수사를 실시했고, 조사 결과 ‘스티브’는 비안치가 과거에 심리학자를 사칭하기 위해 도용했던 심리학과 대학원생의 실제 이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비안치가 처음에는 ‘스티브’의 존재에 대해서만 주장하다가 경찰이 고용한 범죄심리학자 ‘오언’ 박사가 일반적인 다중인격 장애 환자는 두 명이 아닌 세 명 이상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자 ‘빌리’의 존재를 급조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어렸을 때부터 ‘습관적 거짓말쟁이’였던 비안치는, 머리는 좋고 욕심은 많으나 노력하기를 싫어해 편법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으며 다수의 절도 전과를 가지고 있었다.

지역 전문대학 경찰행정학과에 진학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한 학기도 채 마치지 못하고 그만둔 비안치는 경비원을 포함한 이런저런 비정규 노동 직종에 종사했는데, 어떤 직장에도 오래 붙어 있지 못했다. 욕구 불만에 차 있던 비안치는 경찰관 복장과 신분증 등을 위조해 사용하며 공범인 사촌 안젤로 부오노와 함께 여성들을 유인해 강간하고 살해하는 연쇄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치밀한 경찰 수사와 경찰측 범죄 심리 전문가의 전략에 말려들어 거의 성공할 뻔했던 ‘다중인격장애’ 흉내가 실패로 돌아간 비안치는 검사와의 ‘유죄 인정 협상’에 동의했고, 공범인 부오노의 범행에 대한 증언과 연쇄 살인에 대한 자백 및 정신질환인 것처럼 꾸며댔던 사실을 인정한 데 대한 대가로 부오노와 함께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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