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과 실만 있으면 못할 게 없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2.12.1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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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박물관 세운 손인숙 공예가

‘자수’라는 말에는 ‘전통’이라는 말이 숨어 있다. 대개는 베갯잇이나 한복에 실로 수놓은 문양을 생각하고 지금의 일상생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보존 대상으로 여긴다. 자수 공예가 손인숙씨(62)는 그런 점에서 독특하다. 3대에 걸쳐서 자수 공예를 했지만 ‘전통 자수’가 아닌 창작 자수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그녀는 당초 무늬나 구름 무늬, 모란 무늬를 수놓는 대신 수 자체를 현대미술 쪽으로 끌어들였다. 그가 사는 주변의 양재천이나 대모산 풍경, 봄·여름·가을·겨울을 다룬 8폭 자수 병풍을 보면 현대 회화 작품 같다. 특히나 계절을 다룬 그의 연작 중에는 밑그림 없이 바늘과 실만 가지고 ‘마음 가는 대로’ 떠오르는 이미지만으로 작업한 작품도 있다. 그에게는 실과 바늘이 물감과 붓인 셈이다. 그는 “바늘과 실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 시사저널 전영기

그는 자신의 창작 자수를 목공예와 결합시키기도 한다. 얼핏 전통 화초장을 연상시키는 3층장 겉면을 자수 작품으로 장식하고, 전통 약장에도 칸마다 자수 작품을 붙이는 식이다. 겸재의 <금강전도>나 단원의 <미인도>, 조선 왕의 행차도 같은 전통 회화를 자수로 재탄생시켰다. 전통 사찰의 아름다운 처마 장식을 사진처럼 극사실화해 자수 작품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자수 분야 무형문화재 이수자이기만 해서는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과감히 자수를 현대화시키고 오늘의 감성을 담아내고 있다. 그 스스로도 나는 “전통 자수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장인이 아니라 예술가’라는 자부심을 담고 있다. 

“나는 장인이 아닌 예술가”

이화여대 자수과(현 섬유예술공학과)를 나온 그는 자신이 자수의 세계에 빠진 것을 모두 어머니의 공으로 돌렸다. 초대 경상남도 교육위원을 지낸 그의 어머니의 ‘창의적인 교육’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얘기였다. “1969년에 부산 동래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합격해 서울로 대학을 올 때는 큰 꿈을 안고 왔다. 막상 대학에 와서 교육을 받아보니 창의적인 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다. 요즘 내가 맡고 있는 대학교 4학년 전공 수업을 여기 박물관에서 진행하는데, 나는 예술에 대한 포커스보다는 전반적인 삶에 초점을 맞춰 강의한다. 이 강의를 들은 학생들이 안경 디자이너도 될 수 있고 머플러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다. 핵심은 그들이 좋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좋아서 했기 때문에 행복했고, 내가 잘하는 것을 한 것 같아서 행복했다. 그 다음은 나눠야 한다. 이 자수박물관을 통해서 여러 사람이 내 작품의 주인이 되어주면 좋겠다. 그래서 번듯한 박물관을 지으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박물관’은 그가 살던 아파트 1층이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경남아파트 1층의 60평쯤 되는 갤러리에는 그의 작품과 자수 관련 민속품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다. 경기도 죽전에도 그는 이런 방식의 자수박물관을 하나 더 세웠다. 그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수서지구(자곡동)에 3백50평가량의 자수박물관(가칭 청예 수 박물관)을 짓는 것이다. 이미 조감도가 나오고 부지도 확보되었지만 이런저런 문제가 걸려 착공이 미루어지고 있다.    

그가 개포동 자수박물관의 문을 연 것은 지난 2009년이다. 아파트 화단 1층을 독점하고 있는, 풍경이 그림 같은 집이다. 그는 이 집을 박물관으로 꾸미고 같은 건물의 5층에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갔다. 이 박물관에는 지난 3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다. 그의 팬클럽(후원회)도 1천5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대부분 알 만한 유명인이다.

대학 졸업 뒤 50여 회가 넘는 국내외 전시회를 가졌지만 그는 자수박물관 개관을 기점으로 자신의 활동 시기를 구분했다. 박물관 개관을 계기로 자신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60세가 되기 전까지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작품만 했을 뿐이다. 어머니가 그러셨다. ‘가진 게 열 개라도, 하나라도 확실한 것이 있을 때 내놓으라고. 숲이 우거져야 호랑이가 온다. 미리 숲을 이뤄놓아라. 앞으로는 문화 전쟁이 난다.’ 그런 말씀을 40년 전부터 하셨다. 박물관은 알리는 장소 아닌가. 그래서 나만 즐기던 공간에서 남과 교류하는 장소로 만들기 위해 4년 전에 박물관을 열었다.”

창작 자수는 자랑스러운 한국의 콘텐츠

그는 지금까지 작품을 한 점도 팔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국립민속박물관에 그의 작품과 어머니의 작품, 전통문화 이수자인 동생 손경숙씨의 작품 1백35점을 기증했다. 작품도 팔지 않고 수천 점의 작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특히 그의 작품은 틀(액자) 자체가 전통 옻칠을 하고 정교한 조각을 한 목공예품이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제작비가 많이 든다. 그는 공을 남편(홍환선씨·66)에게 돌렸다. “내가 남편 통장을 다 썼다. 평생 후원자이다.” 은퇴한 사업가인 그의 남편이나 두 딸도 그가 자수박물관에 재산을 쏟아붓는 것(?)에 모두 흔쾌히 동의했다고 한다. 그는 남편의 외조 말고도 함께 작업했던 많은 공예 장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는 조각 장인·옻칠 장인·매듭 장인·배접 장인 등 각 분야 전통 장인과 30여 년 동안 한 팀처럼 작품을 함께 만들어왔다. 자수는 그가 하지만, 목공예와 결합시키거나 노리개에 응용하는 등 퓨전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수 작품은 목공예·목가구·보자기·장신구·함·병풍 등 21가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이런 그의 세계를 둘러본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 큐레이터는 방명록에 ‘놀랍다’라는 요지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미국의 미술계 인사들이 와서 이런 장르는 처음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작품 틀이나 가구 자체도 다 디자인을 해서 만든 창작품이다. 기존의 놋쇠 경첩 대신 흑단으로 깎아서 경첩을 만든 편지통도 그렇고…. 나는 촌사람이지만, 내 작품은 세계 어디에 가도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한국의 콘텐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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