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대 대통령부터 ‘4년 중임’?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2.12.1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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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논의는 시간문제… 걸림돌 별로 없어

근대 한국 정치 사상 큰 오욕들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연임’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권력의 인격화가 화근이었다. 청와대 본관 세종실에 걸린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 ⓒ 청와대사진기자단
#  제17대 대통령 취임을 보름여 앞둔 2012년 2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승리에 크게 기여한 ‘BBK대책위’ 핵심들을 오찬에 초대했다. 바로 전날 임명한 수석비서관들을 대동하고 나온 당선자는 홍준표 위원장을 비롯한 법률·공보팀장 등 9명에게 동동주를 권하며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화제가 각료 인선으로 옮겨졌다.

이때 대책위 공보팀장이었던 ㄱ언론특보가 이의를 제기했다. “총선을 불과 2개월 앞두고 왜 농민들과 싸우려 합니까? 그러는 게 정답도 아닌데….” 정부 기구 축소 개편과 관련해 농촌진흥청 등의 통폐합을 서두르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 ㄱ특보의 지적이었다. 사실이 아님에도 야당이 새 정부가 농업을 경시하는 상징으로 왜곡해 농민을 선동하고 있는데 왜 말려드느냐고 힐난했다. 돌출 비판에 당선자가 머뭇거리자 한 수석비서관이 거들었다. “아… 그건 1년 뒤에 할 것입니다.”

홍보수석의 눈짓 제지를 뿌리치며 ㄱ특보가 말을 받았다. “아니, 1년 후에 할 것을 뭣 때문에 벌써부터 열을 올려 분위기를 망칩니까? 전략적으로도 틀렸어요. 작은 정부를 하겠다는데 야당이 안 들으면 자기네 마이너스이고, 야당의 극렬 반대로 이미 예산까지 편성된 국정홍보처 등 기존의 기구를 그대로 간다면 이쪽이 손해 볼 일도 아닌데…. 공약 지킨다고 아직껏 장관조차 임명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 됩니까.”

그랬다. MB 정부는 ‘747’ ‘4대강 운하’ 등 대선 공약에 집착하다가 정국 주도권을 놓쳤다. 가뜩이나 임기 시작과 함께 터진 촛불 시위로 서슬 퍼렇게 위세를 떨칠 수 있는 집권 초반의 호기마저 잃었기에 쓸쓸한 임기 말은 예정되었던 것인지 모른다.

DJP 공동정부의 내각제 무산은 예고된 수순

“~대통령과 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 후신)에 분명한 답변을 요구합니다. 내각제를 추진할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 분명히 밝히십시오. 포기했다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소상히 국민 앞에 밝힌 후, 약속을 어긴 점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고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시기 바랍니다.”

2000년 10월 말, 자민련 내각제추진위원장이던 강창희 의원(현 국회의장)은 김대중(DJ) 대통령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강의원은 3년 전인 1997년 11월3일 국민회의 총재 DJ와 자민련 김종필(JP) 총재가 내각제 개헌과 공동정부 구성을 전제로 국민 앞에 발표한 ‘대통령 후보 단일화 등에 관한 합의문’을 상기시키며 대통령인 DJ를 몰아세웠다.

아무리 정치적 타산이 맞아떨어졌더라도 상극인 DJ와 JP가 이른바 DJP연합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각제 개헌이라는 명분이 있기에 가능했었다. 또, DJP연합이 성사되었기에 DJ는 대권의 꿈을 이루었다.

DJ는 자민련에 총리와 각료 세 자리를 할애한 공동정부를 구성했고, 임기 중반 실시된 총선에서 자민련이 17석을 차지하는 졸전으로 원내교섭단체(20석)에 미달하자 민주당 의원 3명을 탈당시켜 자민련에 꿔주는 황당한 묘책까지 구사했다. 하지만 자민련을 챙기는 것과 내각제 개헌은 다른 얘기였다. DJP연합을 위해 마지못해 응했을 뿐이었다. 정치 9단 JP가 DJ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고, ‘다른 쪽’에서 실리를 챙기며 시간 끌기를 눈감아 주었다. 심지어 자민련 간부들에게도 이런저런 식으로 말을 바꿔가며 상황을 호도했다. 사실 이념을 달리하는 주체들이 출범시킨 공동정부의 진면목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강의원이 대통령 DJ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다.

강의원은 ‘정치인에게는 오늘 살고 내일 죽는 길이 있지만, 나는 오늘 죽어 영원히 사는 길을 택했다’며 자민련을 박차고 나왔다. DJ는 의원 1명을 더 꿔줘 교섭단체 자민련을 유지시켰다. 그러나 충청의 패자 JP와 대립각을 세웠기에 낙선을 거듭하기도 했던 강의원은 소신과 원칙·강단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얻음으로써 오늘의 영예를 얻는다.

‘공약 털기’ ‘개헌 대비’가 당선인의 우선 과제   

12월19일,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박 당선인은 내년 2월25일 취임 전까지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지만 실제로는 대통령보다 막강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단임 대통령이기에 ‘취임과 동시에 레임덕이 진행된다’는 한국적 현실을 감안하면, 당선인 시절이 ‘최고’일 수도 있다.

그같은 당선인에게 취임까지의 66일은 ‘힘센’ 만큼 바쁜 시간이 될 터이다. 선거운동 과정의 긴장과 강행군 여독을 풀 여유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이 66일간의 준비 여하에 따라 5년 임기의 성패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논공 인선도 해야겠지만, 국정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시급하다. 삐끗했다간 5년 뒤 평가는 보나마나다.

큰 그림의 뼈대는 아무래도 대선 당시 내건 공약(公約)이 될 수밖에 없다. 국민과의 약속인 만큼 이를 준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공약의 실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많은 공약을 포기하는 일이다. 물론 포기 대상 공약은 공약(空約)을 가리킨다. 표를 얻기 위해 앞뒤 안 재고 던졌던 공약들을 끼고 가다가 나라 살림을 거덜낼지 모르니 지키지 못할 공약들을 털어내는 일도 시급하다. 하지만 실제 터는 작업은 나중 일이다. 대선 잉크도 마르기 전에 공약을 뒤집을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훗날 어느 적당한 시점에서, 어떻게 이들을 호도할 것인가 등은 미리 강구해둬야 한다. 그렇지 않다가는 경제 민주화, 복지 등의 이름으로 흩뿌린 무책임한, 숱한 시혜적 약속들이 부메랑이 되어 정권을 위협할 것이다.

큰 그림과 관련, ‘空約 털어내기’와 같은 선상에서 우선 주시할 대상은 ‘개헌’이다. 박근혜 당선인,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모두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각론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개헌’이라는 대전제는 일치한다.

박 당선인은 ‘대통령 4년 중임 개헌’ ‘책임총리제’ 등을 포함하는 정치 쇄신을 공약했다. 2007년 1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4년 연임제 개헌’을 제안하자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일갈했던 박 당선인이었지만, 그랬다. 박 당선인 자신도 4년 중임제 및 정·부통령제를 선호하지만 대선 전의 개헌 논의에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문재인 후보도 ‘4년 중임 정·부통령제 개헌’을 공언했다. ‘안철수 전 후보’의 입맛을 의식한 공약인 만큼 권력 분점을 상정한 개헌에 무게가 실려 있다.

얻을 게 없는 새 대통령 의지가 관건

이렇듯 양대 정당 대통령 후보가 공히 다짐했기에 개헌은 예정된 수순이다. 그렇지만 개헌은 대통령으로서는 가장 달갑지 않은 대목이다.

현행 헌법 제128조 2항은 ‘대통령의 임기 연장 또는 중임 변경을 위한 헌법 개정은 그 헌법 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효력이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4년제 중임’ 개헌이 되더라도 현직 대통령은 상관없다는, 즉 ‘중임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최고 권력자의 야욕에 쐐기를 박은,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의 권력 연장을 위한 3선 개헌에 넌더리를 낸 데서 비롯한 역사적 산물이다. 일각에서는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효력이 없다’는 조항 그 자체를 개정하면 되지 않느냐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지만 턱도 없는 얘기이다. 학술적 타당 여부를 따지기 이전에 여론의 뭇매에 견디지 못할 것이다.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면 여기에 관심의 상당 부분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촉각을 곤두세우는 측은 비단 정치권뿐이 아닐 터이다. 분분한 논란 속에 정부 추동력의 상당 부분의 멸실은 불가피하다. ‘4년 중임’은 당연히 ‘차기 대통령’을 떠오르게 만들 것이고, 그런 가운데 대통령의 권위 훼손은 훤히 내다보인다.

제18대 대통령 개인에게는 득은커녕 손해만 그득한 개헌이다. 따라서 새 대통령으로서는 어떤 이유를 붙여서라도 최대한 미루고 싶은 대상일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 반대 야당 의원 50여 명을 헌병대로 끌고 갔다. 결국 경찰과 군인이 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기립 표결로 통과되었다. 이른바 ‘발췌 개헌’의 개헌안은 공고도 되지 않은 위헌적인 것이었다. ⓒ 뉴스뱅크이미지
개헌 자양도 충분… 막아서 될 일 아니다

하지만 이는 새 대통령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양대 정당 대통령 후보들이 모두 공약했다고 해서만이 아니다. 정치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가 여기에 휩쓸려 밥그릇 챙기기에 나서는 상황이 조성된 탓이다.

12·19 대선 결과 이긴 쪽은 이겼기 때문에, 진 쪽은 졌기 때문에 내부 정비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특히 패배한 정당은 치열한 책임 공방 속에 홍역을 단단히 치러야 한다. 그리고 혹독한 진통 진무와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 전선을 외부로 돌린다. 통상 대정부 공세 강화로 나타나지만 차기 정부에서는 개헌이라는 더 큰 호재까지 있다.

게다가 12·19 대선의 최대 복병이었던 ‘안철수 변수’가 정계 개편에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문재인 후보가 공동정부의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 단일화 상대로 삼았던 안철수 전 후보이지만 새로 전개될 정치판에서 그의 모습을 미리 규정키는 어렵다. 12·19 대선의 연장선에서 민주당과 연대를 계속할지, ‘안철수 신당’으로 활로를 개척할지는 미지수이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야 모두에 충격을 가하리라는 사실이다.

그뿐이 아니다. 박 당선인은 “총선 후보를 여야가 동시에 국민 경선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겠다”라며 비례대표의 경우 당에서 3분의 1을, 나머지를 일반 공모로 추천한 뒤 당원이나 국민경선을 통해 후보를 추려내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이 밖에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들의 공천제 폐지 등 정치권을 바닥부터 뒤흔들 각종 구상을 공약했다.

비례대표를 100명으로 늘이고, 안철수 전 후보를 의식해 의석을 대폭 줄이는 방안 등등을 제시한 문후보의 경우도 정치권을 들쑤시기에 충분한 밑거름을 살포한 상태이다. 

대통령으로서는 정부 기구 개편, 중수부 폐지를 중심으로 하는 검찰 개혁, 재벌 정책 수정·보완, 복지 대상 확대 및 예산 조정 등등 국민적 관심을 끌 소재는 충분히 확보하고 있다. 반값이 되었든 전면 면제가 되었든 대학 등록금 조정과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전환, 육아 정책 전면 개편 등 이목을 돌릴 소재는 얼마든지 있으나 개헌 열기를 식히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어려운 경제’라는 비정치적 요인이 큰 변수

1948년 제정된 헌법은 9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이 가운데 절차와 개정 내용 등이 그런대로 ‘온전한’ 개헌은 4·19 혁명 이후의 제3차와 1987년 민주화 항쟁 직후의 제9차 개헌에 불과하다. 대개는 최고 권력자의 권한 강화나 임기 연장을 위한 오점과 허점투성이 개헌이었다. 절차와 과정도 상상을 초월하는 한심한 것이었다.

경찰과 군인들이 의사당을 포위한 상태에서 기립 표결로 통과시킨 제1차의 ‘발췌 개헌’을 필두로, 개헌안 부결을 선포했다가 산정 방식(반올림) 착오를 이유로 뒤집은 제2차의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반대하는 여당 의원을 정보부에 데려다 두들겨 패고 야당을 따돌리려 캄캄한 새벽 의사당 별관으로 장소를 옮겨 방망이를 두드린 제6차의 ‘3선 개헌’, 국회를 해산시키고 개정한 제7차의 ‘유신 헌법’ 등등 정말 딱했다.

그간의 개헌 역사에서 논란의 중심은 대통령 임기·권한 등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야가 ‘4년 중임’에 일치하고 있어 큰 장애물도 없다. 대통령의 권한 축소에도 이론이 없다. 책임총리제냐, 부통령제냐 하는 것은 대세와 상관없는 부분이다.

차기 정부에서의 개헌은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 여하를 떠나 기정사실화되었다. 언제 어떤 식으로 논의가 본격화되느냐 정도가 남아 있을 따름이다. 어두운 경제 전망 속에 전개될 개헌 공방은 이래저래 초미의 관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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