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자들, 재벌 총수 향해 포문 열다
  • 김지영 기자 (young@sisapress.com)
  • 승인 2012.12.2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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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희 건국대 교수, "검찰, 재벌의 파견 근로자법 위반 철저히 수사해야"

12월13일. 전국의 법학 교수 35명이 정몽구 현대차 회장을 ‘파견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파견근로자법) 위반으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법학 교수들이 재벌 회장을 고발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2000년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 등 법학 교수들은 이건희 삼성 회장이 에버랜드 전환 사채를 헐값에 발행해 아들 이재용씨에게 편법 증여했다며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정몽구 회장을 고발한 법학 교수들은 보도자료를 통해 “법률과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시키는 재벌 총수의 위법 행위로 인해 법치주의가 훼손되고 법 앞의 평등이 무력화되고 있다. 법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법원이 인정한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거대 재벌의 불법 행위를 검찰과 정부가 방관하고 있다. 이처럼 금력이 법 위에 군림하는 작금의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해 고발에 이르게 되었다”라고 고발 배경을 설명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 지분 가운데 약 5.17%, 현대차의 최대 주주(20.78%)인 현대모비스 지분 중 약 6.96%를 소유하고 있다. 사실상 현대차를 소유·지배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차는 울산과 전북 전주, 충남 아산 등의 공장에서 자동차를 제조하고 있다. 현대차의 자동차 조립, 생산 작업은 대부분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자동 흐름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작업 시스템에는 현대차가 직접 고용한 정규직뿐 아니라 현대차와 형식상 도급 계약을 맺은 사내 하청업체 소속 근로자들이 투입되어 근무하고 있다. 사내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근로 형태를 보면, 현대차의 정규직 근로자들과 함께 배치되어 현대차의 작업 지시서 등에 의해 단순·반복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현대차는 사내 하청업체 근로자들에 대한 작업 배치권, 변경 결정권 등을 갖고 직접 지휘하거나, 사내 하청업체 소속 현장 관리인 등을 통해 구체적인 작업을 지시한다.

법조계에서는 “현대차의 하청업체 근로자들은 현대차로부터 직접 노무 지휘를 받는 근로자 파견 관계임이 분명하다. 파견근로자법상 제조업의 직접 생산 공정 업무에서의 근로자 파견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데도, 현대차는 이를 위반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 시사저널 이종현

대법원·노동부 “현대차 ‘파견근로자법’ 위반”

법학 교수 35명의 정몽구 회장 고발을 처음 기획하고 제안한 사람은 바로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였다. 기자는 12월18일 오후, 건국대의 한교수 연구실에서 한교수를 만났다. 한교수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사내 하청 해고자 신분에서 정규직으로 판정받은 최병승씨와 비정규직지회 천의봉 사무국장 등 2명)이 현대차 울산공장 주차장 송전 철탑에 올라가 농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 11월 정회장 고발을 처음 기획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한교수는 참여연대와 진보 성향 법학 교수 단체인 ‘민주주의 법학 연구회’ 소속 교수들에게 12월 초 나흘 동안 메일이나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정회장 고발을 제안했고, 여기에 뜻을 같이한 교수는 35명이었다.

법학 교수들이 검찰에 제출한 고발장에 따르면, 현대차는 파견근로자법이 제조업의 직접 생산 공정 업무에서의 근로자 파견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내 하청업체에 소속된 근로자들을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파견근로자로 사용해 파견근로자법 제5조 제5항 및 제7조 제3항을 위반했다. 2004년 울산지방노동사무소와 전주지방노동사무소는 현대차 노조 등의 진정을 받아 현대차가 사내 협력업체를 이용해 형식적으로 도급 계약을 맺고 있으나, 불법으로 근로자를 파견받았다고 판단한 바 있다.

또한 현대차의 불법 파견 근로 행태에 대해 대법원은 2010년 7월22일 판결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자동 흐름 방식으로 진행되는 자동차 조립·생산 작업의 의장 공정에 종사하면서 정규직 근로자들과 함께 단순·반복적인 업무를 수행해온 현대차의 하청업체 근로자들은 현대차와 근로자 파견 관계에 있다’라고 판시하기도 했다. 이같은 대법원 판결은 파기 환송심에서 현대차의 재상고를 거쳐 같은 내용으로 지난 2월23일 확정되었다.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통해 현대차가 불법으로 파견근로를 해왔음이 인정된 셈이다.

법학 교수 35명은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의 위법 행위를 지시 또는 묵인하고 있다. 국가의 비호 아래 성장한 거대 재벌의 대표자인 정몽구 회장이 사회에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엄청난 부를 배경으로 법과 판결을 따르지 않고 무시함으로써 법 앞의 평등을 형해화하고 있다”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현재도 불법 파견…반성의 기미 없어”

한교수는 “2004년 노동부의 불법 파견 판단과 2010년과 2012년 현대차의 불법 파견근로 행태를 파견근로자법 위반으로 판단한 대법원 판결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위반 행위를 전혀 시정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현재까지도 불법 파견을 계속하고 있다. 심지어 파견근로자들을 부당하게 해고하는 등 반성이나 시정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대로 두면 해결될 수 없겠다고 판단되어 정회장을 고발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회장이 고발당하자 현대차측에서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현대차측은 12월18일 오전 10시 한교수를 만나자고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차측이 갑자기 한교수와의 약속을 취소했다고 한다. 한교수는 “현대차측이 왜 갑자기 약속을 취소했는지 그 사유를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정회장을 향해 포문을 연 한교수에 대해 자칫 ‘대학 운동권 출신이 아닐까’ 하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서울대 법대 77학번인 한교수는 “내가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삐딱하게 보는 것 같기는 하다. 대학 1학년 때 ‘고전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그때는 운동권 동아리가 아니었다. 나중에 그 동아리가 운동권으로 바뀌었는데, 그때는 관여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착했다”라며 웃었다.

그는 “노동위원회의 결정과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지금까지 정회장의 위법 행위를 묵과해왔다. 이제부터라도 철저히 수사해 엄벌에 처해야 할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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