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국제 인물] 중국은 이제 ‘시진핑 스타일’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2.12.2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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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와 뚜렷한 차이…전혀 다른 길 걸어갈 듯

지난 11월8일 중국 베이징의 중국 공산당 제18차 당 대회. 이 자리에서는 중국 최고 통치 기관인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7인의 멤버가 새롭게 선출되었다. 일주일 뒤인 11월15일, 새로운 상무위원들은 척추를 곧게 펴고 딱딱한 미소를 지으며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그 무리의 한가운데 어두운 색깔의 양복을 입은 시진핑 당 총서기가 있었다.

중국 공산당 총서기와 당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꿰차며 중국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시진핑을 중심으로 향후 10년을 책임질 지도부가 새롭게 등장했고, 중국의 정권 교체는 그렇게 완료되었다. 불확실성이 큰 중국의 미래를 새로 맡은 59세의 수장에게 2012년 세계는 큰 관심을 나타냈다. <시사저널>은 ‘2012년 올해의 인물’ 국제 분야에 시진핑 당 총서기를 선정했다.

중국에서는 역대 중국 공산당 지도부를 마오쩌둥이 핵심인 1세대(1949~1976년), 덩샤오핑이 중심인 2세대(1976~1989년), 장쩌민이 주축이 된 3세대(1989~2002년) 그리고 후진타오가 버틴 4세대(2002~2012년)로 각각 구분한다. 올해 새롭게 탄생한 시진핑 지도부는 이 기준에 따르면 5세대가 된다.

ⓒ Xinhua 연합
청년 시절 ‘하방’으로 큰 고초 경험

중국은 새로운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다. 중국 최고 권력을 쥐었던 전임자들은 경제력과 중국 내 정치적 안정성을 연결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조화를 유지하는 것조차도 어려워지고 있다. 경제는 침체되고, 부정부패가 도처에서 생겼다. 수많은 사회 문제는 중국 국민들에게는 좌절을, 정부 내에서는 우려를 증폭시켰다. 이처럼 불확실성이 커진 때 중국을 짊어진 시진핑의 10년 계획에 세계의 시선이 모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시진핑을 파악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것이 그의 성장기이다. 시진핑은 ‘문화대혁명’(1966~77년, 이하 문혁)의 혼란 속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문혁 기간 동안 시진핑의 나이는 13~24세였다. 전임 후진타오의 경우, 1942년생으로 문혁이 시작된 1966년에 이미 24세 성인이었지만 시진핑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문혁과 함께 보낸 첫 지도부이다.

시진핑은 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집단 거주지인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자란 ‘홍색 귀족’ 출신이다. 시진핑을 두고 ‘태자당’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은 그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勛·1913~2002년) 전 부총리 때문이다. 그러나 1962년 시중쉰이 실각하고 문혁의 바람마저 불자 13세 때에는 교화시설로 가야 했고, 15세 때에는 ‘지식 청년’이라는 신분으로 분류되었다.

문혁 기간 동안 중국에서는 ‘상산 하향 운동’이라는 것이 실시된 바 있다. 지식 청년으로 불리는 도시의 청소년을 농촌에 파견해 육체 노동을 통해 사상을 개조하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운동이었다. 지식 청년을 농촌에 파견하는 것을 ‘하방’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모두 당시 농촌 생산대에 입대해야 했다. 산시(陝西) 성 옌안(延安) 시 량자허(梁家河) 촌으로 하방된 시진핑은 칭화 대학에 입학하기 전인 1975년까지 약 7년간 이곳에서 육체 노동과 굶주림까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옌안은 중국 혁명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극빈 지역이기도 했다. 과거 국민당 정권의 지배가 거의 없었던 곳이며 공산당의 근거지가 된 지역이다. 이런 극빈 지역에서 보낸 청소년기가 시진핑에게 중국의 서민 생활에 대한 감각을 기르는 매우 귀중한 시기와 체험이 되지 않았겠느냐는 분석이 많다. 도·농 간 균형이 무너진 지금 중국 사회 문제에 대해 시진핑에게 도시 엘리트와는 다른 해결법을 기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진핑을 파악하는 또 다른 가늠자는 그의 아버지 시중쉰이다. 1930년 마오쩌둥이 ‘대장정’을 마친 장소에서 게릴라 기지 구축을 도왔던 공산당원 시중쉰은 반세기 뒤에 광둥 성 경제특구를 설립했다. 홍콩으로 도망가는 중국인들을 사살하기보다 개혁·개방의 혜택으로 중국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을 만들기 위해 속도를 낸 온건파 정치인이다. 시중쉰은 개혁·개방 노선이 시작된 1978년 광둥 성 당 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이듬해 제1서기, 즉 광둥 성의 수장이 되었다. ‘경제특구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10분 연설에 ‘인민’ 단어 19번 사용

세 번째 가늠자는 시진핑 그 자신의 경험이다. 그는 대외 경제의 최전선인 연해 지방 자치단체에서 수장을 맡으며 정치적 자산을 쌓아왔다. 중국 지도부의 중추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시·자치구에서 실적을 쌓아야 한다. 시진핑은 1985년부터 2007년까지 푸젠 성, 저장 성, 상하이 시를 돌며 당서기를 맡았는데 이곳 모두 대외 경제에서 광둥 성과 대등할 만큼 중요한 지역이다. 푸젠 성 하문 시는 중국 정부가 처음으로 지정한 네 곳의 경제특구 중 하나인데 시진핑은 이곳에서 부시장을 역임했다. 당서기를 맡은 저장 성 온주는 민영 기업들이 들어온 곳으로 대외 경제 기지라는 측면에서 중국의 중요한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지역이다. 상하이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시진핑은 경제 낙후 지역인 구이저우 성과 티베트에서 경력을 쌓은 후진타오 전 당 총서기와는 전혀 다른 과정을 밟고 올라왔다. 아버지로부터의 경험 그리고 스스로가 걸어온 길을 보았을 때 대외 경제나 글로벌 감각에서 시진핑은 후진타오와는 전혀 다른 인물일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중국 전문가들은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위상을 잘 이해하고 있을 시진핑이 엉뚱한 강경 노선을 택할 가능성은 작다고 보고 있다.

다만 중국 공산당의 정점에 서기 위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정치인들은 터프함과 신중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 했고, 중국 인민들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워야 했다. 당 대회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시진핑은 10분 정도에 불과한 짧은 연설에서 ‘인민’이라는 단어를 19번이나 사용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문혁의 광풍을 거쳐 극빈 지역의 밑바닥에서부터 권력의 중심까지 올라온 사람이다. 특히 외압 등에 굴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데 그런 의미에서 중국을 상대해야 하는 해외 국가들에는 벅찬 상대가 될 수 있다.

후진타오는 10년 전인 2002년, 당 총서기에 취임한 지 20일이 지난 12월5일에 허베이 성 시바이 포를 방문했다. 시바이 포는 마오쩌둥이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에 머물렀던 곳으로 ‘혁명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이다. 반면 10년 뒤인 지난 12월7일,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최고 책임자의 자격으로 아버지 시중쉰이 경제특구를 만든 광둥 성 선전을 다녀갔다. 그리고 덩샤오핑의 동상에 헌화했다. 광둥 성 시찰 중 그가 강조한 화두는 ‘개혁·개방의 지속과 개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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