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가 아니라 짐승이었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2.12.2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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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부에게 상습 성폭력 당한 여성 충격 고백

“1993년 9월쯤 아버지는 내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당시 안방에서 인기 드라마를 보기 위해 가족이 모였다. TV를 앞에 두고 엄마와 나 그리고 아버지가 차례로 누웠다. 한창 TV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버지였다. 가슴을 만지더니 이내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성기를 만졌다.”

이서현씨(가명·32)는 19년 전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아빠, 뭐예요?” “왜 거길 만져요?”라고 소리쳤다.

그럴수록 아버지는 딸의 몸을 심하게 더듬었다. 아내가 옆에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굳게 잠근 후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이때가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아버지의 성폭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씨의 아버지는 딸을 볼 때마다 뒤에서 껴안고 가슴을 만지고 강제로 입을 맞추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점점 강도를 높여갔다.

그는 “아버지는 기회만 되면 나한테 성 접촉을 하려고 했다. 내 몸 구석구석을 탐닉하고 내 가슴을 자신의 것마냥 만졌다”라고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더욱 충격받은 것은 이씨 어머니의 반응이었다. 그는 “처음 아버지의 성추행이 있을 때부터 이런 사실을 항의하고 따졌지만, 엄마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장난 정도로 치부했다”라고 말했다.

12월18일 10년간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한 이서현씨가 기자와 인터뷰하는 도중 흐느끼고 있다. ⓒ 시사저널 전영기

중학교 때부터 성폭력 시작

이씨는 중학교 3년 내내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아버지의 성노리개로 살았다. 입을 맞추고, 더듬고, 만지고, 주무르고, 아버지는 기회만 있으면 딸의 몸을 탐했다. 아버지가 아니라 짐승의 모습이었다. 강하게 거부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하게 반항하면 ‘치한이 공격했을 때 방어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버지가 딸이 예뻐서 만지는 것이다’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라고 말한다.

이런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학교가 끝난 후에는 집에 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학교 주변을 배회하다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 학교가 유일한 피난처였던 것이다. 아침에 학교에 갈 때가 가장 행복했고, 집은 가장 가기 싫고, 무서운 곳, 있기 싫은 장소였다.

아버지에게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버지를 피해 일부러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친구들은 방학을 기다렸지만 서현씨는 그 반대였다. 오히려 방학이면 집에 가야 한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집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짐승이 먹잇감을 기다리듯 아버지는 그렇게 있을 것이 뻔했다. 어쩔 수 없이 집에 가야 할 상황이 생기면 아버지는 그때마다 야수로 돌변했다.

이씨의 어머니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항의라도 하면 “별것도 아닌데 네가 유별나다”라고 하거나 “됐다. 이제 그만하자”라면서 애써 외면했다. 중학교 때는 가출도 했었다. 학교 옥상에 올라가 자살할 생각도 했지만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이씨의 아버지는 왜 이런 행동을 반복적으로 했을까. “아버지는 원래 직업 군인이었다. 부사관으로 근무하다 그만둔 후 집에서 한동안 빈둥빈둥 놀았다. 엄마가 노점을 해서 생계를 꾸렸다. 아버지의 최종 학력은 ‘중졸’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대졸’이라고 속였다. 그래서인지 학벌에 대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심했다. 나도 아버지의 학력이 ‘대졸’인 줄 알았다가 중학교에 들어와서 비로소 중졸이라는 것을 알았다”라고 말했다.

서현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극도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폭행과 폭언이 끊이지 않았다. 따뜻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씨는 “아버지는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술을 많이 마셨지만 주사는 없었다. 술김에 한 짓은 아니다. 동생과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하면 뺨을 때리거나 ‘너희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다’라고 협박도 일삼았다.”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버지’라는 것은 단지 ‘혈연 관계’일 뿐이었다. 부녀간의 따뜻한 정(情)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서현씨가 고등학생일 때였다. 생리통이 심해 길에서 쓰러져 119에 실려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마다 이씨의 아버지는 “생리통이 아니라 낙태한 것 아니냐”라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했다. 그때의 충격은 서현씨의 가슴에 고스란히 상처로 남았다.

그는 어떻게 하든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은 서울에 있으면서 기숙사가 있는 곳으로 진학했다. 집에는 거의 내려가지 않았다. 추석이나 설날 명절에도 기숙사에 혼자 남았다. 친구들은 이런 이씨에게 의문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는 “서울에 혼자 떨어져서 살아 보니 집(기숙사)이 이렇게 편한 곳인 줄 처음 알았다”라고 말한다.

‘아버지 살해 충동’ 느껴

서현씨가 나이가 들고 성숙해도 아버지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2001년에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휴학했을 때의 일이다. 대학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귄 남자친구가 있어 함께 고향에 내려갔다. 집 근처에 있는 명승지를 갔다. 아버지도 따라 나섰다.

그런데 이씨의 아버지는 남들이 다 보고 있고, 특히 남자친구가 가까이 있는데도 딸의 몸을 더듬었다. 마치 ‘넌 내 것이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후 아버지는 서현씨가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너, 그놈과 성관계를 했냐, 안 했냐? 했으면 몇 번이나 했냐?”라며 집요하게 성관계 유무와 횟수를 따져 물었다.

이씨는 서울에 있는 회사에 취업한 후에는 집에 가는 발걸음을 뚝 끊었다. 2004년 봄에 마지막으로 고향 집에 갔다. 그때 아버지에게 그동안 자행했던 성폭력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기억이 없다. 너를 사랑해서 그랬다”라고 하는 등 궤변을 늘어놓으며 발뺌을 했다. 그 후 아버지와의 연락을 단절하고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올해 5월 어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할 수 없이 입원해 있던 병원을 찾아갔다. 그때 아버지도 만났다. 그는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10여 년 만에 만났는데도 전혀 반가워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가족 대기실에서 책을 보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뒤에서 나를 껴안으려고 했다. 아버지에게 나는 여전히 성 먹잇감에 불과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씨는 중학교 때부터 10여 년 동안 아버지에게 당했던 성폭력이 잊혀지지 않는다. “평생 떨쳐낼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약을 먹어야만 잠을 잠 수 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대인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날카롭고 공격적인 성격이 되어갔다.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서인지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는 아버지를 죽이려는 생각도 했었다. 지금도 기회만 되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와 만나지 않겠다. 아버지가 죽어도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는 사회생활을 한 후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바꾸었다. 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성(姓)도 지웠다. 지금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는 성을 빼고 ‘이름’만을 말한다. 그만큼 자신의 삶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고 한다.

기자가 ‘아버지가 처벌받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더니 “당연하다. 고소해서 처벌이 가능하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고소할 것이다”라며 입을 꽉 다물었다.

그는 또 “내 주변에도 친족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속앓이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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