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죽는 건 괜찮다, 가족은 어쩌지…”
  • 이승욱 기자 (smkgun74@sisapress.com)
  • 승인 2013.01.0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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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르포 / 죽음 부르는 ‘손배소’에 울분 토하는 구미KEC 노조원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을 향한 축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2012년 12월20일, 부산 영도에서 ‘비보’가 날아왔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씨(35·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 조직차장)의 자살 소식이었다. 그러나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최씨의 뒤를 이어 불과 보름 동안에 4명의 노동자가 자살과 동료의 자살로 인한 충격으로 급서하는 등 죽음의 행렬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물음표를 달았다. ‘그들은 왜 죽음이라는 극한적 방법을 선택하는 것일까.’ 그 답은 ‘손배소(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찾을 수 있다. 손배소는 회사측이 노조를 상대로 노조의 업무 방해나 공장 점거 등 파업으로 인한 피해 손실을 구제받기 위해 법원에 배상액 판결을 청구하는 소송이다. 최씨는 죽음을 앞두고 쓴 유서에서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백58억원. 돈이 전부인 세상에 (돈이) 없어서 힘들다’라고 자살 이유를 밝혔다. 회사는 “법대로 하겠다”는 것이지만, 평생을 벌어도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결국 노동자들을 죽음의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는 셈이다.

경북 구미시 공단동에 위치한 KEC 공장 전경. ⓒ 시사저널 최준필
이씨와 정씨 “자살 직전까지 갔다”

문제는 이미 죽음을 택한 5명의 노동자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정을 볼모로 한 노조 탄압용으로 전락했다’는 오명을 쓴 손배소의 어두운 그림자는 지금도 노사 갈등이 존재하는 전국의 사업장 곳곳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제6, 제7의 비극이 잇따를 수 있는 것이다. 노동계의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2011년 5월 현재 12개 사업장에서 사측이 노조를 상대로 총 1천5백80억여 원(1개 사업장 평균 1백31억여 원)의 손배소를 제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사측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구미KEC 노조원들 역시 손배소의 중압감에 눌려 있다.

이용찬씨(51). 그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뒤부터 30년 동안을 반도체 부품업체인 구미KEC 공장에서 일했다. 잔업과 철야를 반복하는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래도 그럭저럭 무난히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씨는 20년 전 24평형(79㎡) 주공아파트 한 채를 어렵게 장만했다. 쌍둥이 아들을 두고 있는 그는 다정다감하지는 못하지만 ‘성실한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3년 전부터 어두운 그림자가 이씨 가정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그가 가입한 노조가 회사와 갈등을 빚으면서였다. 2010년 초 구조조정을 발단으로 시작된 양측의 싸움은 해를 두 번이나 넘겼다. 그 사이 이씨 가정은 생계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씨는 파업과 직장폐쇄 그리고 해고와 복직을 겪은 지난 3년 중 거의 절반의 기간 동안 월급을 받지 못했다. 이씨는 “그동안 아내가 조금씩 돈을 벌어온 덕분에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학생 아들들도 군대를 가줘서 생계비 부담을 덜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장 먹고살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회사가 노조와 이씨를 포함한 노조원에게 제기한 1백56억원의 손배소는 이씨 가정에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는 언제 날아올지 모를 가압류 통지서에 평생 모은 집까지 날릴까 봐 두려워했다. ‘평생 욕 한마디 하지 않고’ 살아온 그가 변한 것도 손배소 때문이었다. “하루는 자고 있는데 집사람이 놀라 나를 깨웠다. 내가 ‘죽이고 말겠다’며 욕설 섞인 잠꼬대를 했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굳이 말은 안 하지만 이래저래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나만 믿고 따르는 가족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정의엽씨(43). 1월3일 경북 구미시 사곡동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꾹 눌러쓴 야구 모자 아래로 구릿빛 피부가 드러나는 강인한 인상이었다. 그는 2010년 파업 사태를 겪으면서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다. 정씨는 파업과 관련해 2011년 11월 구속되어 6개월을 복역하다,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결국 회사는 정씨를 해고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노조 활동에 대해 강한 의지를 꺾지 않고 있었다. 구속 당시 노조의 조직1부장이었던 그는 지금은 수석부지회장이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는 정씨 앞에 닥친 현실적인 문제였다. 정씨에게는 2010년 8월 해고 이후 별다른 소득이 없다. 동료 노조원들이 주는 최저생계비 수준의 후원금이 전부이다. 그는 1백56억원의 손배소 외에도, 사측이 노조 지도부를 상대로 제기한 5억원 손배소를 추가로 당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부당한 회사에 맞서 싸울 것이다”라며 시종일관 강한 모습을 보이던 그도, 손배소 이야기가 나오자 숨겨둔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유서를 두어 번 썼는데, 그때마다 자식들 이야기를 쓸 때쯤만 되면 더는 글이 써지지 않았다. 나는 노조 활동을 하다 죽는 것이지만, 아무 죄 없는 남은 가족은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돌렸다.”

하지만 거액의 손배소가 가압류로 이어진다면, 그의 의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워 보였다. 정씨는 “차라리 노조 활동을 하다 구속되면 나만 감방에 가면 된다. 하지만 거액의 손배소는 가족의 고통으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그 순간에 이르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1월2일 경북 구미시의 한 사무실에서 KEC 노조원 이용찬씨(왼쪽)와 정의엽씨(오른쪽)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노조 탄압용” 주장에 회사는 “사실무근”

거액 손배소로 인한 고통은 비단 이씨와 정씨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구미KEC 사측은 2011년 3월 “(노조와 노조원들이) 공장을 무단 점거해 업무를 방해하고 제품과 설비를 파손해 손실을 입었다”면서 금속노조 구미KEC 지회와 노조원 88명을 상대로 3백1억3천여 만원의 손배소를 제기했다. 그나마 사측은 2012년 8월 “영업이익 손실은 증명하기 어렵다”라며 손배소 청구액을 1백56억3천여 만원으로 줄였다. 하지만 사측이 손배소를 공동 배상 책임으로 묶으면서, 노조원 1인당 평균 배상액은 100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는 사측의 거액 손배소가 사실상 가족을 압박해 노조를 파괴하려는 의도라고 보고 있다. 그 근거로, 파업 중이던 2010년 7월2일 사측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비상 경영 상황 일보’를 기자에게 제시했다. 이 자료에는 ‘각 조합원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및 가압류 설정 예정 통지 가압류를 준비한다(압박 전략 차원)’ ‘손배소, 가압류(자금줄 봉쇄)’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구미KEC 노조는 그 밖에도 회사 기획조정실이 작성한 ‘인력 구조조정 로드맵’ 등을 근거로 지난 2011년 6월 사측을 부당 노동 행위 혐의로 노동청에 고소했고, 검찰은 지난해 11월 회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바 있다.

김성훈 금속노조 구미KEC 지회장은 “2010년 11월 노조가 파업을 철회하면서 사측은 손배소를 최소화한다고 약속했는데도 거액의 손배소를 제기했다. 실제 사측이 손배소와 가압류 등을 운운하는 바람에 조합원 1백50여 명 중 상당수가 가정불화를 겪다가 아예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 거액 손배소 뒤에는 노조를 파괴하겠다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KEC 본사 기획 파트의 한 관계자는 노조의 주장에 대해 “노조가 무단 공장 점거 이외에도 불매 운동과 각종 비방 등으로 회사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손실을 입혔다”라면서 “하지만 회사는 노·사 상생 차원에서 손배소 청구액을 당초보다 낮은 금액으로 변경해 노조원들의 부담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노조가 ‘회사의 손배소가 노조 탄압 차원’이라며 제시한 문건도 회사가 공식적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노조의 주장은 사실무근이다. 회사를 그만둔 직원이 1백50여 명이지만 노조 때문에 사직한 이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검찰의 공식 수사 결과 발표가 나오면 부당 노동 행위 등에 대한 억울함은 밝혀질 것”이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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