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취 싸들고 국경 넘는 미얀마인들
  • 모종혁│중국 전문 자유 기고가 ()
  • 승인 2013.01.08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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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에게는 가혹, 탈미얀마인은 환영하는 중국의 두 얼굴

중국 서남부에 자리 잡은 윈난(雲南) 성. 수도 쿤밍(昆明)에서 7백98㎞ 떨어져 있는 루이리(瑞麗)는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변경 도시이다. 루이리 미얀마인 상인회 회장인 펑조. 그는 ‘차이니즈 드림’을 이룬 대표적인 미얀마인이다. 볜마오제(邊貿街)에서 보석상점을 운영하는 펑조를 루이리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국경을 넘어온 미얀마인들이 그를 찾아 중국 정착을 위한 정보를 얻고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펑조는 “20년 전 맨손으로 중국에 와 지금은 어엿한 가게를 차리고, 집과 자동차도 샀으며, 아들을 양곤 대학에 보내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중국에는 탈북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펑조 씨와 같은 탈(脫)미얀마인이 10만명에 육박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들은 군사 정권의 독재와 핍박이 극심했던 조국을 떠나 중국에 정착했다. 미얀마인 대다수는 미얀마와 인접한 국경 도시인 루이리, 텅충, 징훙(景洪) 등지에 살면서 중국인과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미얀마인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는 루이리이다. 루이리는 행정구역상 더훙(德宏)다이·징포(?·景頗)족 자치주에 속한다. 중국에서는 ‘중국 속의 작은 미얀마’ ‘대(對)미얀마 국경 무역의 거점’으로 유명하다. 또한, 미얀마·태국·라오스의 골든트라이앵글 지역에서 생산되는 마약이 중국으로 유입되는 첫 관문이기도 하다.

5백여 명의 회원이 가입한 ‘루이리 미얀마인 상인회’는 루이리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미얀마인 단체이다. 상인회는 회원 상호 간의 친목 도모와 이익 보호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최근에는 신규 유입되는 탈미얀마인의 정착과 인권 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펑조 씨는 “이전에는 정치·사회적인 원인으로 조국을 떠난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사이클론 이후에는 생존을 위해 중국으로 넘어오는 미얀마인들이 늘어났다”라고 말했다. 미얀마에서는 2008년 발생한 사이클론으로 14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중국 윈난 성 루이리의 볜마오제에 있는 보석상가 중 하나인 다루이상가. 미얀마에서 가져온 보석 원석을 가공해 팔고 있다. ⓒ 모종혁 제공
소수민족·반정부 운동 출신, 중국으로 탈출

미얀마인의 중국 유입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미얀마의 민족 구성과 사회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2009년 현재 미얀마 전체 인구 5천8백38만명 중 버마족은 70%, 소수민족인 카친·카렌·샨·몬 등이 25%, 화교 및 인도계가 5%를 차지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89.4%가 불교를 믿지만, 기독교도(4.9%)와 무슬림(3.9%)도 있다. 미얀마는 버마족과 소수민족 간의 갈등, 불교도와 무슬림 간의 대립이 심각하다. 독립을 원하는 소수민족은 무장 단체를 결성해 산간 지역으로 들어가 지금도 미얀마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일부는 중국으로 탈출해 소극적인 저항을 지속하고 있다. 군사 정권에 맞서 투쟁하다가 조국을 등진 버마족도 적지 않다.

펑조 씨는 미얀마에서 극소수인 인도계에다 무슬림이다. 소수민족이자 이슬람교도로 겪는 사회·경제적 차별을 피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재중 반미얀마 연합을 이끄는 미안 마오 씨는 버마족이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지만 양곤 대학에 다니면서 공산주의를 접한 뒤 버마 공산당 반군에 들어갔다. 공산당 반군은 1960~70년대 중국으로부터 무기와 장비, 자금 등을 지원받았다. 미안 씨는 “주로 중국과 근접한 밀림 지대에서 활동하면서 최신식 중국산 무기로 미얀마 정부군과 대등한 전투를 펼쳤다”라고 회고했다.

개혁·개방 정책 이후 중국은 미얀마 공산당 반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공산당 반군은 수년간 버티다가, 1988년 결국 미얀마 정부군에 항복했다. 투항을 거부한 공산당 반군 일부는 미안 씨처럼 중국으로 넘어왔고, 일부는 소수민족 반군으로 들어갔다. 미안 씨는 중국 정부의 배려 속에 중국 국적을 얻었고, 중국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규모는 작지만 요지에 장사가 잘 되는 식당도 운영하고 있다.

미안 씨뿐만이 아니다. 중국 내에 거주하는 미얀마인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혜택을 누리고 있다. 이들은 거주 도시를 떠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방 정부가 주는 임시 거류증을 받는다. 사회 활동이 자유롭고 집과 자동차도 살 수 있다. 심지어 자녀를 중국 학교에 보낼 수도 있다. 탈북자에 대한 중국 정부의 처우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이다. 이는 미얀마 정부가 북한과 달리 탈미얀마인에게 관대한 정책을 쓰기 때문이다. 미얀마 정부는 자국을 떠난 미얀마인에게 별다른 처벌을 하지 않고 있다.

탈미얀마인이 중국 정부로부터 특별 대접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이 가져오는 보석이다. 이들은 중국인이 열광하는 보석인 비취(翡翠) 원석을 휴대해 중국으로 가져온다. 비취는 ‘천국의 한 조각’이라고 불릴 정도로 색채가 아름답고 은은한 기품을 지녔다.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비취가 ‘악의 기운을 막는다’라고 해 큰 사랑을 받아왔다. 고대 중국인은 사업에서 행운과 번영을 가져다준다고 믿어 중요한 사업을 거래할 때는 비취를 오른손에 쥐고 있기도 했다.

볜마오제 외곽에 있는 한 원석 가공장에서 일하는 미얀마 노동자들. ⓒ 모종혁 제공
‘다이공’ 통해 미얀마에서 비취 공급받아

보통 비취는 중국의 보석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최대 산지는 미얀마이다. 미얀마 각지에서 채취된 비취 원석은 국경 도시에서 가공되어 중국 전역으로 보내진다. 일명 ‘보석 거리’라고 불리는 볜마오제는 미얀마인의 거리이기도 하다. 볜마오제 보석상점의 3분의 1은 미얀마인이 주인이거나 미얀마인이 중국인의 명의만 빌려 운영하고 있다. 보석상점뿐만 아니라 음식점, 일용상점, 유흥업소 등 루이리의 적지 않은 상권을 미얀마인이 장악하고 있다.

중국에 정착한 미얀마인들은 4~5년 전부터는 다이공(帶工)을 통해 비취 원석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있다. 중국과 미얀마 국경에는 철책이 있지만, 이미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다. 특히 최신형 오토바이로 무장한 다이공은 산길을 통해 미얀마에서 비취 원석을 가져와 넘기고 생활용품을 구입해 가져간다. 루이리의 변경자유무역구인 제가오(姐高)에서 만난 한 미얀마인 다이공은 “옥과 비취는 본래 값이 비싸서 한 사람이 가져오는 수량이 최소한 수만 위안에 달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돌아갈 때는 미얀마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약품을 주로 사간다. 다이공은 미얀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업 중 하나이다”라고 밝혔다.

물론 중국으로 넘어온 미얀마인이 모두 다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여성들이 겪는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적지 않은 탈미얀마 여성들이 인신매매단의 꾐에 빠져 산둥(山東),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푸젠(福建) 등지의 농촌으로 팔려나간다. 지난 2010년 2월 <중국경제주간>은 르포를 통해 그 실태를 파헤쳤다. <중국경제주간>은 “차이니즈 드림을 안고 온 미얀마 여성들이 납치되어 결혼하지 못한 농촌 노총각들에게 팔린다”라고 보도했다. 공급보다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미얀마 여성들의 몸값도 급등했다. 2008년에는 예쁘고 몸매 좋은 미얀마 여성이 2만?3만 위안(약 3백44만~5백16만원)에 거래되었지만 최근에는 4만?5만 위안(약 6백88만~8백60만원)에 팔려나간다.

하지만 아직까지 탈미얀마인의 중국 생활은 탈북자에 비하면 행복한 편이다. 이들은 중국 공안 당국의 추적과 체포의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으며 평소 생활도 매우 자유롭다. 중국 정부의 이중적인 인권 정책, 미얀마 정부의 유연한 대처, 비취라는 경제적 수단이 탈북자와는 전혀 다른 탈미얀마인의 삶과 생활을 만들어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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