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수기 노릇 더는 안 해!”
  • 조진범 I 영남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3.01.29 15:1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동흡 사태’, 박당선인-새누리당 긴장 구도의 서막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심사 경과 보고서 채택이 무산되었다.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권력의 쏠림 현상이 집중되는 이 시기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태이다. 그것도 특히 여대야소의 정국에서 여당 내부로부터 반란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당초 이후보자가 지명될 때만 해도 무난하게 처리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합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대통령은 박당선인과의 협의를 거쳐 이후보자를 지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는 박당선인의 뜻이 많이 반영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친이계의 한 핵심 중진 의원은 “당초 청와대는 헌재 소장 인선을 현 정부에서 하지 않으려고 했다. 임기 6년의 헌재 소장인 만큼 새 정부에서 임명하는 것이 맞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국가 5부 요인 중의 한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워두면 안 된다는 의견에 따라 인선에 나섰다. 그러나 철저히 박당선인의 의견에 따랐다”라고 귀띔했다.

지명 초기에 헌재 등 법조계 주변에서 이런저런 의혹들이 쏟아질 때만 해도 “그래도 대통령 당선인의 사실상 첫 인선인데…”라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그런데 이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헌법재판소장으로 부적격이라는 의견이 민주통합당은 물론 새누리당에서도 친박·친이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해 12월31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에 참석해 의총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 뉴스
당선인의 사실상 첫 인선 ‘불발 사태’

이한구 원내대표 등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가 이후보자를 보호하려 했지만, 상당수 의원이 반발하면서 당론조차 정하지 못했다. 사실상 ‘박근혜 정부의 첫 인사’인 이후보자를 여당 의원이 공개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지난 1월23일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에서 김성태 의원과 박민식 의원, 김태흠 의원은 이후보자를 대놓고 반대했다. 새누리당에서 이후보자에 대한 비토세가 확산되면서 결국 심사 경과 보고서 채택이 무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동흡 파동’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당장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와 집권 여당의 관계가 이명박 정부 때와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 소리가 나온다. 아무리 정권 초기라 해도 청와대의 일방적인 통보를 무작정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명박 정부 초기 집권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은 ‘청와대 거수기’라는 비판을 들었다. ‘고소영·강부자 내각’이라는 논란에도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은 야당의 공격을 막아내며 청와대를 보호하기에 급급했다. 감히 ‘반대’는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이동흡 파동’은 이명박 정부 초기 청와대의 일방 행보에 대한 반면교사인 셈이다.

친이계 재선인 ㄱ의원은 “이제 새누리당 의원들이 MB 정부 초기처럼 대응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박당선인에게 협조할 것은 협조하겠지만, 국민 정서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겠느냐. 박근혜 정권은 5년이 지나면 끝나지만, 새누리당은 그대로 남는다. 당이 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새누리당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그는 “박당선인과 친박계가 잘하면 당분간 잠잠하겠지만, 제대로 역할을 못 한다면 새로운 세력이 등장할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박당선인과 새누리당은 ‘이동흡 파동’ 이전에도 불협화음으로 비치는 모습을 보였다. 박당선인의 대선 공약을 놓고 당 일각에서 나온 ‘속도 조절론’과 ‘출구 전략론’ 때문이다. 대선 당시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낸 정몽준 의원은 “인수위는 공약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우선순위를 정해서 추진해야 한다”고 했고, 심재철 최고위원은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 첫 국무총리로 지명된 김용준 인수위원장은 속도 조절론과 출구 전략론에 대해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인수위와 다른 소리를 내지 말라는 박당선인의 날 선 경고로도 읽힌다.

사실 인수위와 새누리당 일각에서 나오는 엇박자는 ‘불통’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다. 박당선인과 인수위가 ‘철통 보안’을 강조하는 탓에 당과 거의 상의하지 않으면서 형성된 불만이 대선 공약 이행을 둘러싼 논란으로 표면화되었다는 분석이다. 박당선인도 불통 논란을 의식한 듯 지난 1월23일 새누리당 지도부와 원내 지도부, 새누리당 소속 상임위원장들과 오찬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당선인은 “저는 늘 국회 의견을 존중하며 일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여의도 정치를 존중하겠다는 뜻이다. 박당선인은 새 정부의 첫 관문인 정부조직법 개정과 각료 인사청문회가 국회에서 원만히 처리될 수 있도록 협력해달라고 당부했다. “국민 의견을 전달해주면 성심성의껏 반영하겠다”고도 했다. 당과 소통하겠다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새누리당에서는 좀 더 지켜보자는 것이 대체적인 기류이다. 쇄신파인 남경필 의원은 “이동흡 후보자 사태는 정리되지 않았느냐”며 급한 불은 껐으니 당장은 말을 아끼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가 1월21일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움직이기 시작한 이재오의 행보

새 정부 초기 박당선인과 새누리당이 밀월 관계를 형성할 것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존재한다. 새누리당 지도부와 원내 지도부 모두 박당선인이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선출된 터라 반발할 소지도 적다. ‘박근혜 친정 체제’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새누리당 지도부를 향해 “박당선인의 전술부대”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다만, ‘이동흡 파동’처럼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경우 새누리당 의원들이 박당선인과 당 지도부를 무작정 따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남권의 한 중진 의원은 “의원들은 민심을 매일 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민심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이동흡 파동’은 인선 과정에서 검증을 철저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박당선인에게 줬다.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와 당의 관계는 건강한 긴장 관계로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당 개혁에 대한 목소리도 벌써 나오고 있다. 친이계 좌장이었던 5선의 이재오 의원은 최근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새 정부 출범 초기에 ‘정부도 바뀌고 대통령도 바뀌니 정당도 달라지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도록 야당보다 먼저 액션을 취하자. 대선 과정에서 여야 후보 모두 정치 개혁을 강조한 만큼 당은 이에 대한 후속 조치를 적극 취해야 한다”고 오랜만에 발언했다. 정치 개혁을 고리로 박당선인과 당 지도부를 압박하면서 비주류의 목소리를 넓히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향후 이의원의 행보를 주목하는 시선이 많다. 그는 이동흡 후보자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략가로 통하는 한 친박계 인사는 “이의원 등이 존재하는 한 국회 표결에서 여당인 과반수 이상 표를 확신하기 어렵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기도 했다.

친박계 일각에서도 당이 중심을 잡을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개혁 성향의 한 친박계 의원은 “당선인과 당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다. 당이 중심을 잡고 인사·정책·소통 문제에 대해 제 목소리를 내주어야 된다. 안 그러면 대통령도 망하고 당도 망한다. 당은 잘하는 것은 밀어주고 잘못된 것은 지적해야 한다. 여당이지만 야당 역할도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점점 흥미로워지는 시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