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저씨, 평양까지 갑시다”
  • 이유심 인턴기자 ()
  • 승인 2013.01.2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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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국인지 모른 채 한국 와 난민 인정받은 콩고 전직 국가요원

2002년 9월14일 자정쯤, 중국 톈진에서 출항한 여객선이 인천항에 들어왔다. 콩고 사람 욤비 토나 씨(46)는 배에서 내려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한국으로 오기 위해 무려 5개국을 거쳤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인천항에서 평양까지 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짧은 영어로 택시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여기서 평양까지 먼가요?”라고. 택시 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노(No) 평양! 노 평양!”이라는 대답만 되돌아왔다. 이곳은 한국이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토나 씨는 한국이 분단 국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월24일 욤비 토나 씨가 한국에서 콩고 난민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복잡한 한국 지하철도 그에게는 이제 익숙하다. ⓒ 시사저널 박은숙
난민 신청, 6년 동안 거부당해

콩고민주공화국 비밀정보국(ANR) 요원으로 승승장구하던 토나 씨는 2002년 6월29일, ‘콩고 정부 관료들이 일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반군에게 줄 것이다’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대통령실과 비밀정보국 내 각 팀장 그리고 야당인 민주사회진보연합에 전달했다. 겉으로는 정부군과 반군이 맞서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이들이 은밀한 거래를 이어왔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만약 대통령이 이 사실을 모른다면 당연히 알아야 할 중대한 사안이었고, 반대로 대통령의 묵인하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보고서는 경고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보고서를 제출한 지 3일 후 그는 체포되었다. 죄명은 ‘국가 기밀 유출’이었다.

‘그날’ 보고서를 내지 않았다면 그의 운명은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난민이라는 생소한 이름표가 그를 따라다니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만약 그날로 돌아간다면 그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토나 씨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정보요원의 임무이다”라고 말한다.

천신만고 끝에 온 한국이었다. 한국은 유엔 난민협약에 가입한 국가이지만, 머무를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한국 정부는 직장을 구해 일하면 불법 체류자가 된다고도 경고했다. “가지고 있는 돈은 없고, 일은 못 하게 하고, 뭐 이런 나라가 있나 싶어 엄청 후회했다”라고 토나 씨는 회고했다. 머무를 곳이 없다는 문제보다 심각한 것은, 난민으로 인정받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점이었다.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무려 6년이나 걸렸다.

“매번 (난민 신청) 인터뷰 때면 ‘오늘은 거짓말하지 마라’라는 말로 시작했다”라고 했다. 물론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콩고에 두고 온 가족과 동료들이 있었고, 탈출 과정을 지나치게 세세히 설명할 경우 그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걱정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의 대학 동기이자 비밀정보국 동료였던 ‘아돌프’라는 친구가 내 탈출을 도운 것이 탄로 나는 바람에 그 역시 난민 신세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현재 아돌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그의 아내와 아이는 앙골라에서 난민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토나 씨가 난민 신청 인터뷰를 할 때마다 모든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인지, 출입국관리소는 토나 씨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6년은 그렇게 덧없이 흘러갔다.

욤비 토나 씨의 가족들. 지난해에는 막내딸이 한국에서 태어났다.
자서전 <내 이름은 욤비> 출간

그동안 그의 삶은 악몽과도 같았다. 콩고 킨샤사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비밀정보요원까지 지냈던 그가 우리나라에 와서는 인쇄소부터 사료 공장, 방사 공장 등을 전전했다. 공장 사람들은 피부색과 언어 등이 다른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갑자기 내 바지를 벗기려 드는 사람, 샤워하면 문을 열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다. 단지 궁금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곳에서 그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한 번은 토나 씨의 친구인 이호택 ‘피난처’(난민 지원 단체) 대표가 토나 씨가 일하는 공장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이대표는 “당시 회사 사장님을 만나서 ‘토나는 내가 제일 아끼는 사람이다. 정말 자랑스러운 친구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진짜 토나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사장님은 ‘그런 새끼를 왜 좋아하냐. 한심한 인간이다’라고 말하더라”라고 말했다. 이대표가 그 까닭을 묻자, “실수를 밥 먹듯이 한다”라는 퉁명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이대표는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토나의 마음이 콩고에 있는 가족에게 가 있지, 한국어도 잘 못하지, 일을 잘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가족을 데려올 수도 없다. 공장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이유였다. 둘째아들 조나단은 언젠가 국제 전화를 하면서 “아빠 생일 선물을 샀다. (한국에 가서) 선물만 주고 오면 안 되느냐. 귀찮게 하지 않겠다”라며 토나 씨를 졸랐던 가슴 아픈 과거를 털어놓았다. 콩고의 정글에서 숨어 지내던 아들은 끝내 그 선물을 전해주지 못했다. 그럴수록 그는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 영어를 배웠다. 영어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는가 하면, 짬만 나면 서점에 가서 영어책을 펴놓고 공부했다. 출입국관리소 담당 공무원은 토나 씨가 쓰는 프랑스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로지 영어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는 “통역을 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건 바로 내 자신뿐이었다”라고 말했다.

2008년 2월20일, 행정 소송 끝에 마침내 그는 난민 지위를 획득했다. 행정 소송은 토나 씨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소송에서 졌다면 한국을 떠나야 했다. 콩고로 강제 송환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누군가가 좋으면 (그 사람을) 100% 다 좋아하는 것 같다. 반대로 누군가가 싫으면 100% 싫어하는 것 같다. 법무부 선생님들은 내가 100% 싫은 것 같았다. 그래도 성공할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난민으로 인정받기 위한 6년 동안 그는 좌절 대신 긍정을 택했다.

난민으로 인정받은 그해 여름, 토나 씨는 가족들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성공회대학교 아시아비정부기구학 석사 과정도 마쳤다. 최근에는 <내 이름은 욤비>라는 책을 발간했다. 토나 씨는 “한국 사회는 겉으로 보았을 때 모든 게 완벽하다. 하지만 난민들,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가 책을 쓴 까닭이기도 하다. 현재는 ‘다문화’가 그의 화두이다. 올 5월께에는 다문화를 주제로 한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대한민국에도 난민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라고 한다. 그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난민들은 용감한 사람들이다.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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