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묵은 빚
  • 안동현 | 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 승인 2013.01.2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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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뜬금없이 눈 덮인 설악산이 보고파 가족을 채근해 무작정 길을 나섰다. 가방에 이청준의 단편소설집 하나 챙겨서. 아쉽게도 시인 김광균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달빛 아래 단편 <눈길>을 읽는 맛은 제법이었다.

<눈길>은 이청준의 자전적 소설이다. 장자에게 재산을 물려줬다가 가산을 탕진한 어머니는 대도시 고등학교에 다니는 둘째아들을 배웅해 산 하나를 넘는다. 아들을 보낸 후 홀로 돌아가는 길. 그 눈길에 흩뿌려진 아들의 발자국은 못난 어미의 가슴에 찍힌 화인이다. 그것이 아들이 그토록 부정하고자 했으나 몇십 년이 지난 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묵은 빚이었다.

이 소설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하고픈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1963년 12월17일은 박정희 대통령이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날이다. 박근혜 당선인에게 꼭 읽어볼 것을 권하는 것이 바로 그 취임사이다. 당시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는 상대인 윤보선 후보에 비해 서민 후보, 진보 개혁 세력으로 간주되었으며 좌익 전력으로 인해 선거 기간 내내 색깔론에 시달렸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요지경이다. 취임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조국 근대화와 민주주의 확립이다. 주지하다시피 박정희 대통령은 근·현대사를 통해 유례없는 경제 성장으로 조국 근대화에 성공했으나 독재로 민주주의를 퇴행시켰다. 이로 인해 우리 정치권이 산업화 세력과 민주 세력으로 갈라지고 사사건건 대립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묵은 빚이고, 싫든 좋든 아버지의 부채는 이제 박근혜 당선인의 몫이 되었다.

박근혜 정권이 향후 5년간 어떻게 평가되는가에 따라, 공과는 뚜렷하지만 총론적 평가가 엇갈리는 아버지의 최종 성적표 역시 달라지게 될 개연성이 크다. 이 정권의 성공 요인은 간단하다. 아버지가 취임사에서 말한 것처럼만 하면 된다. 특히 그중 아버지가 실패한 부분을 치열하게 이행하면 된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패배한 소수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또 그를 보호하는 데 더욱 의의가 있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된다. 낫세르의 뜨거운 가슴과 사다트의 차가운 머리를 합치면 가장 이상적인 파라오가 될 것이라고 한다. 박근혜 당선인은 먼저 따뜻한 가슴으로 국민에 다가서라. 국민을 어려워하고 진정으로 섬기면 된다. 항상 낮은 데로 임하고 서민의 입장에서 판단하라. 사회 대통합은, 못 가지고 헐벗은 사회적 약자를 최우선으로 할 때 기대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양극화 시대에 재도약은 평등에 대한 확신의 토양에서 다시 자랄 것이다. 눈앞의 성장률보다는 잠재성장률에 주목하라. 그것이면 아버지의 묵은 빚은 해결될 것이다.

한 달 반이면 당선인은 이제, 30여 년 전 두 동생의 손을 잡고 눈물을 뿌리며 걸어나왔을 그 길을 홀로 걷게 될 것이다. 청와대 곳곳을 살피다 보면 어딘가 아버지의 흔적이 묻어나올지도 모르겠다. 그 흔적을 보며 다짐하고 또 다짐해 국민을 행복하게 한 대통령, 약자를 보듬은 대통령으로 5년 뒤 그 길을 나서기 바란다.

*일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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