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주자’와 ‘민주화 투사’ 사이 딜레마에 갇히다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3.02.0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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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아웅산 수치, 소수민족·개발 사업 문제 두고 고민 빠져

닮은 듯 다른 두 여성 정치인이 만났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미얀마(버마) 민주화 운동 지도자이자 민족민주동맹(NLD) 대표인 아웅산 수치 의원이 지난 1월29일 손을 맞잡았다. 전날인 28일 수치 의원은 ‘2013 평창 스페셜올림픽 세계대회’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닷새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두 사람은 닮았다.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정치 지도자로 컸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 후광에서 벗어나 이제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다. 대통령에 대한 도전이 그것이다. 박당선인이 먼저 그 꿈을 이뤘다. 이제는 수치 의원 차례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험난한 여정이 남아 있다.

수치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독립의 아버지이다. 수치는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이끌었고, 199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군사 정부에 의해 15년간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2010년 11월13일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수치는 지난해 4월 치러진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정치권에 정식으로 발을 들였다.

정치인으로 데뷔한 수치. 미얀마의 변혁이 수치의 손끝에서 나오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무수히 많다. 선택의 분기점에서 수치가 어떤 말을 할 것인지 귀를 쫑긋 세운다. 수치만이 지난해 3월 취임한 테인 세인 군사 정부의 대항마가 될 수 있어서다. 그런 수치는 최근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1월29일, 미얀마 민주화 지도자이자 야당 NLD 대표인 아웅산 수치 의원이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는 수치 의원. ⓒ EPA 연합
미얀마를 흔든 구리 광산 반대 운동

미얀마 북서부에 위치한 몽유와가 요동친 것은 지난해 11월29일 새벽이었다. 오전 2시30분, 미얀마 정부의 치안부대가 마을 주민과 승려로 이루어진 3백여 명의 레파다웅 구리 광산 반대 시위대를 강제 진압했다. 이날 부상을 입은 사람은 30여 명으로 알려졌지만 80여 명에 이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레파다웅 구리 광산 프로젝트는 중국과 미얀마의 합작품이다. 구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중국은 이곳을 노렸다. 중국 국영 군수업체인 북방공업공사와 민간 업체인 완바오가 미얀마 군부가 소유한 이코노믹홀딩스와 합작해 이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개발 사업비만 약 10억 달러 규모이다.

2010년 6월 계약이 체결되자마자 광산 개발을 위한 부지 확보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레파다웅 인근의 주민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서슬 퍼런 군정 시절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인근 지역에 살고 있는 수만 명의 토지가 헐값에 강제 수용당했다. 사찰도 예외가 아니었다. 개발 과정에서 환경 훼손도 발생했다.

구리 광산 반대 시위는 여러 면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주민들을 지지하는 50명 규모의 시위가 멀리 떨어진 양곤에서도 벌어졌다. 구리 광산 개발 중단과 중국 기업의 철수를 요구한 8명은 국가를 모욕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국민을 지배해온 군사 정부와 관련된 기업을 상대로 ‘철수’를 요구한 보기 드문 시위라는 점에서도 주목받았다. 테인 세인 정부의 대처에 따라 ‘민주화에 대한 진심’을 엿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되는 사건이다.

정부의 치안부대는 11월28일까지만 해도 시위대의 해산을 종용했다. 그러다 갑자기 다음 날 새벽에 물리력을 행사했다. 29일은 수치가 항의하는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수치 방문 전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공권력을 투입한 셈이었다.

격렬한 진압 작전이 펼쳐진 29일 오전, 수치는 예정대로 현장과 가까운 만달레이 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은 뒤 NLD 관계자들과 함께 몽유와로 향했다. 구리 광산 근처에서 마이크를 잡은 수치는 강제 진압에 대한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았다. 그는 “국제 사회의 신용을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판단이 여러분을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구리 광산 개발을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법한 장면이었다.

그 배경에는 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깔려 있다. 중국과 벌이는 합작 사업은 최근 난항을 겪고 있다. 이라와디 강 상류에 건설하려고 했던 대규모 댐 미트소네가 대표적이다. 생태계 파괴, 수많은 이주민 발생 등을 이유로 지난해 9월 테인 세인 대통령은 개발 프로젝트 중단을 결정해 국내외에서 환영을 받았다.

37억 달러 규모의 댐 개발 계획이 중단되자 중국측은 격분하며 계약 준수를 호소해왔다. 이전 군사 정권 시절의 프로젝트이지만, 국가 간 합의가 일방적으로 파기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번 구리 광산 개발마저 중단될 경우 거액의 위약금 청구 소송 등 강경하게 나올 가능성이 커진 상태이다.

시위대 강제 진압 이후 구리 광산 문제가 생각보다 커지자 정부는 신속하게 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12월2일, 30명 규모의 조사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된 사람은 수치였다. 조사위원회는 개발 사업 자체의 타당성 평가까지 포함해 1월 말까지 대통령에게 중간 보고서를 내야 한다.

어려운 자리인데도 수치가 허락한 이유는 2015년 대선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미 외신을 통해 수차례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힌 수치에게는 테인 세인 군부를 마냥 적으로 돌릴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미얀마 헌법에 따르면 외국인과 혼인한 사람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다. 1999년 암으로 숨진 영국인 남편을  두었던 수치는 개헌이 되어야 대선 출마가 가능한데, 개헌은 군부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다.

미트소네 댐의 경우처럼 이번 구리 광산도 미얀마 국민 정서는 ‘중단’으로 기울고 있다. 미얀마 국민들은 ‘군인’과 ‘중국’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혐오한다. ‘군인’은 40여 년간 지속된 군사 정부 때문이다. 국민들은 미얀마 경제를 잠식하는 중국을 싫어한다. 미얀마 제2 도시 만달레이만 해도 중국 자본의 잠식이 심각하다. 중국인들은 외국인 투자가 제한된 시절부터 미얀마인 호적을 구입해 부동산을 구입하고 사업을 해왔다. 미얀마의 각종 자원도 중국이 잠식해 갔다.

수치가 ‘개발 중지’라고 판단하면 대중국 관계가 악화될 것이다. 반면 ‘개발 진행’으로 결정할 경우 국민들이 실망하게 된다. 조사위원장 아웅산 수치는 ‘민주화 지도자’와 ‘현실 정치인’ 사이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다.

소수민족 박해 문제에도 말 아껴

이미 이런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지 수치는 경험했다. 지난해 5월 미얀마 서부 라킨 주에서 불교도와 무슬림 소수민족 로힝야족 사이에 충돌이 발생해 약 10만명이 피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라킨 주 사태에 침묵하던 수치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관용을 호소하고 있지만 문제의 원인을 보지 않고 도덕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라며 국가가 없는 로힝야족을 옹호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미얀마에 사는 약 80만명의 로힝야족은 유엔이 인정한 ‘가장 박해받는 민족’ 중 하나이다. 미얀마인들은 이들을 적대시하고 있다. 무슬림인 로힝야족을 옹호할 경우 국민 대다수인 불교도의 반발을 살 수 있고, 방치할 경우 소수민족 억압을 용인한다는 비판에 빠지는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었다. 정치 지도자로 나선 수치는 가택연금 기간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지금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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