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단맛은 짧았다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13.03.27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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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중앙정보부(중정)가 창설된 이래 안전기획부(안기부)와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뀌기까지 역대 정보기관장들의 수난은 더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들은 막강한 권력도 행사한다. 문제는 그런 특혜와 권력을 최우선적 임무인 국가 안위를 위해 쓰지 않고, 권력자인 대통령을 위해 쓴다는 데 있다. 그래서 정보기관장은 항상 대통령의 최측근이 맡았고, 그들의 말로는 대부분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비극을 맞는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과거 군사 정권 시절에는 특히 더했다. 6년 3개월 재직이라는 역대 최장 기록을 갖고 있는 김형욱 전 중정부장은 숱한 정치 공작으로 악명을 떨쳤고, 퇴임 후에는 권력의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주군’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칼을 들이댔다가 해외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실종됐다. 김재규 전 중정부장은 그런 주군을 시해한 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학성·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내란·반란죄로 구속됐고, 이현우 전 안기부장 역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퇴임하자마자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됐다.

역대 안기부장과 국정원장의 비극적 말로는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의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퇴임 후 기소만 무려 4차례나 당했을 정도로 고초를 겪었다. 1997년 대선 직전 이른바 ‘북풍(北風)’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총풍(銃風)’ 사건을 인지하고도 수사를 지시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2001년에는 안기부 예산을 선거 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이른바 ‘안풍’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았다. 안기부 자금 횡령 및 도청 사건과 관련해서도 구속되거나 검찰 조사를 받았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1993년 문민 시대를 알리는 상징적인 조치로 교수 출신 안기부장 발탁이라는 파격적 인사로 등장한 김덕 전 안기부장도 뒤끝이 개운치는 못했다. 구속은 아니었지만 안기부장에서 물러나 부총리로 재직하던 중 지방선거 연기 공작을 추진한 혐의가 드러나 부총리에서 낙마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을 거쳐 간 네 명의 역대 국정원장들도 화를 면치 못했다. 특히 ‘미림’팀으로 불리는 도청 사건 파문이 크게 불거지면서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은 결국 도청 사건으로 2005년 11월 구속됐다. 천용택 전 원장은 구속은 면했지만 검찰 조사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천 전 원장은 재임 시절인 1999년 12월 “1997년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이른바 대선 자금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켜 7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나마 노무현 정부 첫 국정원장을 지낸 고영구 전 원장은 화를 면했다. 하지만 국정원 사상 첫 내부 승진 원장으로 조명받았던 김만복 전 원장은 2008년 2월 남북 회담 문건 유출 파문으로 중도하차했다. 지난 2011년 6월에는 일본의 한 매체에 2007년 남북정상회담 관련 일화를 기고해 기밀 유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전임자였던 김승규 전 원장 역시 2006년 10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일심회 사건은 간첩단 사건”이라고 말해 피의사실 공표 및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바 있다.

그러고 보면 역대 중정부장과 안기부장 중 각각 최장 기록을 가진 김형욱 전 부장과 권영해 전 부장의 비극적 말로는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재임 기간과 권력의 치부 정도가 정비례한 셈이다. 현재까지 역대 국정원장 중 최장 기록을 가진 원세훈 국정원장은 과연 퇴임 후 선배들의 불우했던 전철을 밟지 않으며 징크스를 깰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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