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 ‘더러운 전쟁’ 때 어디에 임하셨나요”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3.03.2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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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교황 프란치스코 1세 향한 회의적 시선들

1975년 9월 알리사 코자메는 갑자기 들이닥친 9명의 남성에 의해 집밖으로 끌려나왔다.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시의 유명한 학생운동가였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어딘가에 감금되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는 심문을 가장한 폭력이 가혹하게 이어졌다. 매질에 쓰러지면 지하실에 내던져졌다. 그렇게 그곳에서 1년을 보냈고, 감옥에서 2년을 더 보냈다. 아무런 설명도, 정당한 절차도 없이 3년을 그렇게 갇혀 지냈다. 풀려난 뒤에도 아르헨티나 군사 정부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위협을 가했다.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군사 정권(1976~81년)은 ‘더러운 전쟁’(1977~80년)으로 불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동안 아르헨티나에서는 코자메와 같은 진보 활동가와 시민운동가가 정부군에 의해 납치되거나 살해됐다. 희생자 수만 3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요즘 세계 주요 언론은 아르헨티나의 지나간 불행을 다시 들추고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비유럽인 최초의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 1세(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때문이다.

교황에 선출된 이후 아르헨티나에서의 검소한 생활 모습, 빈자를 위한 구제 활동, 공용차를 타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소박한 행동 등이 소개되면서 ‘서민파 교황’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프란치스코 1세다. 그런 그에게 ‘더러운 전쟁’은 어떤 의미일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3월19일(현지 시각) 취임 미사가 시작되기 전 무개차를 타고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을 돌고 있다. ⓒ AP연합
“교황은 군사 정권을 방조했다”

1979년 아르헨티나 항구 도시 바이아블랑카에서 납치된 앨리사 파트노이는 인터내셔널비즈니스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아르헨티나의 교회는 역할 분담이 되어 있는데 그중 군을 지원하는 분야가 있다. 프란치스코 1세(당시 베르골리오 추기경)는 그 분야에 속해 있었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1세는 더러운 전쟁 당시 추기경으로 아르헨티나 예수회 수장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전쟁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과거사 논쟁으로 떠올랐다. 군사 정권이 사제를 구류하는 데 가담했다는 논쟁은 이미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구류된 두 명의 성직자는 프란시스코 야리크스와 올란도 요리오로 모두 예수회 사제였고 해방신학운동에 관여했다. 이 둘은 1976년 예수회에서 추방됐고, 그 직후 해군에 의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에 위치한 감금 장소로 연행됐다. 5개월간 고문을 당한 두 사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에서 반나체에다 약 기운에 몽롱해진 상태로 발견됐다. 일부에서는 “프란치스코 1세가 군사 정권에 이들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상태다. 교리 면에서 보수적인 그는, 아르헨티나 예수회가 해방신학에 관여하는 일을 막아왔다는 점도 정황 증거로 제기된다. 반면 “단지 용기가 없었을 뿐”이라는 이견도 존재한다.

납치 피해자인 엘레나 데 라 쿠아드라는 1977년 임신한 상태에서 어디론가 끌려갔다. 감금 기간 동안 딸을 출산했지만, 이내 생이별을 해야 했다. 감옥에서 태어난 아이는 정부에 협조적인 가정에 입양됐다. ‘더러운 전쟁’ 기간 동안 감금된 뒤 감옥 안에서 출산한 임산부들은 아기들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 이처럼 정부가 ‘훔쳐’ 강제로 입양시킨 아이는 500명에 달한다. 2010년 영아 강제 입양과 관련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프란치스코 1세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프란치스코 1세는 군사 정권이 사건에 관여한 것을 알고 있었고,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프란치스코 1세 교황이 독재 정권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조든 방관이든 간에 ‘소극적’이라는 성향은 지금의 교황을 파악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 있다. 비슷한 시기 인접 국가인 칠레나 브라질도 독재 정권에 지배당하고 있었지만 그곳 가톨릭 지도자들은 반정권 운동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프란치스코 1세의 ‘소극성’은 두드러진다.

3월14일 첫 미사를 집전한 ‘뉴 파파’는 “가톨릭교회가 개혁에 실패하면 영적인 기반 없는 불쌍한 NGO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베네딕트 16세도 비슷한 경고를 했다. 퇴임 의사를 밝힌 뒤 “대립하는 마음과 분열이 교회를 망치고 있다”고 쓴소리를 했다. 특히 ‘대립’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두고 바티칸 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이 존재했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퇴임과 연관이 있음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됐다.

프란치스코는 미국·이탈리아 추기경단 합작품

권력 투쟁뿐만이 아니다. 성추문 사건은 신도 들을 교회로부터 등 돌리게 만들었다. 영연방 최고위 성직자인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오브라이언 추기경은 1980년대부터 신학생들에게 부적절한 행위를 강요했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로저 마호니 추기경은 성직자가 아동에게 성적 학대를 한 사실을 알고도 은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탈리아 일간지 레프브리카는 “동성애로 굳게 맺어진 성직자들이 바티칸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교황이 퇴위를 결정하게 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돈도 얽혔다. 가톨릭 교황청의 자금을 관리하는 종교사업협회(바티칸 은행)의 자산은 약 80억 달러인데, 투명하지 못한 회계로 돈세탁 의혹을 받고 있다.

첫 비유럽 출신 교황 선출을 가톨릭의 개혁과 연관 짓는 기대감도 나온다. 지금까지의 교황과 다를 것이라는 희망도 있고, 남미 출신이라는 점 자체가 변화의 조짐으로 환영받는다. 반면 “교황청 입장에서나 새로운 사람이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회의론도 있다. 우선 거론되는 것이 그의 스탠스다. 가톨릭이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사회 문제에 대한 균형 감각이라는 지적이 많다. 예를 들어 교황의 모국인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법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동성 결혼에 대한 가치 판단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빈곤 문제를 제외하고는 프란치스코 1세의 균형은 보수 쪽으로 쏠려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다.

남미 출신 교황 선출이 정말 획기적인 일로 평가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반론이 많다. 미주의 가톨릭 성장세에 발맞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콘클라베 직후 프란치스코 1세가 선출되자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이탈리아 추기경단 일부와 미국파의 합작품’이라고 해석했다. 차기 교황으로 유력했던 이탈리아의 안젤로 스콜라 대주교를 배제하려는 일부 이탈리아 추기경들과 비유럽인 교황을 희망했던 티모시 돌런 뉴욕 대주교 등 미국 추기경단 사이에 합의가 성립했고, 그래서 생각보다 빠르게 ‘무색무취’한 프란치스코 1세가 선출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에 따르면, 1970~

2010년 유럽의 가톨릭 신도 증가율은 8%였지만 미국과 캐나다는 49%를 기록하며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이탈리아 주간지 <레스프레스>의 바티칸 전문기자인 산드로 마지스테르는 “미국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7500만명이 가톨릭으로, 이 중 히스패닉계가 많다. 이런 세를 바탕으로 11명의 추기경단에 불과한 미국은 ‘가톨릭 재생’의 상징이 되었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퇴임한 베네딕트 16세가 바티칸의 한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정한 뒤 “비바 파파(교황 만세)”를 들으며 등장한 프란치스코 1세다. 하지만 그가 맞닥뜨릴 교황청은 종교의 성지라기보다 정치력이 좌우하는 실제 세계에 가깝다. 개혁을 바라는 양 떼들의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는 이제 그의 의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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