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극한 아픔이 가슴을 찢고 창자를 태운다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3.03.27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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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① / 부왕 중종의 승하 때 지은 제문

중종 39년(1544년) 5월15일(임자), 당시 세자로서 30세였던 인종(1515~1545년)은 세자시강원의 궁료들에게 생강을 하사하면서 수찰을 내렸다. 중종이 승하하기 5개월 전의 일이다.

그 수찰은 <중종실록>의 해당 날짜에 실려 있고 <열성어제>에도 나와 있다. 단, <열성어제>는 정해년의 일이라고 했으나 갑진년의 일이라야 옳다.

“내가 <논어>에 공자의 음식에 대한 절도를 기록한 것을 보니 ‘생강을 끊지 않고 먹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입과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정신을 소통시키고 입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여러분들은 공자를 사모하는 사람들로서 비록 말단인 음식 같은 것에 대해서도 반드시 법을 취하고 있을 것이기에 지금 이 채소를 시강원에 보내는 것이니, 한번 맛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공자가 생강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는 <논어> ‘향당’ 편에서 공자의 식생활 습관을 밝힌 대목에 나온다.

 

唯酒無量(유주무량)하시되 不及亂(불급란)이러시다 沽酒市脯(고주시포)를 不食(불식)하시며 不撤薑食(불철강식)하시며 不多食(불다식)이러시다

 

ⓒ 일러스트 유환영
술에서만은 미리 정한 한계가 없되, 몸가짐이 흐트러질 정도까지 마시지는 않았다. 사 온 술과 사 온 포는 먹지 않았다. 생강을 남기지 않으시되 많이 드시지는 않았다.

공자는 술을 잘 마셨다. 술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잔에도 여러 크기가 있었지만, 공자는 미리 몇 잔만 마시겠다고 제한하지 않았다. 하지만 술을 마셔서 혈기가 화평하고 맥이 통창하면 그만 마셔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했다.

당시 민간의 술은 맛이 떫었고 시장의 고기는 독성을 지녔으므로 공자는 시장에서 술과 포를 사 먹지 않았다고 한다. 혹은 집에서 빚고 만든 술과 포가 떨어졌다고 굳이 사오지는 않았는지 모른다. 이어서 ‘생강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옛 사람들은 생강이 몸의 탁한 기운을 제거해주고 신명을 통하게 해준다고 믿어 즐겨 먹었다. 공자는 식사에 나온 생강이나 생강 과자를 다 먹었지만 더 먹으려고 욕심을 내지는 않았다.

5세부터 글 읽힌 왕자의 책 사랑

그런데 인종은 생강이 정신을 소통시킬 뿐 아니라 입 냄새를 제거해주기도 한다고 해서 자신의 글 선생인 시강원 궁료들에게 생강을 특별히 보낸 것이다. 조금 섬세하다 할 정도로 다정다감했던 듯하다.

인종은 부왕 중종이 재위 39년(갑진년) 11월 경술(15일)에 창경궁 환경당에서 승하하자 6일 만에 즉위했다. 조선의 제12대 군주다.

인종은 3세에 이미 한자의 뜻을 통했으며, 자라면서 장난을 일삼지 않았다. 중종이 경복궁 사정전에 나와 원자(세자가 되기 전 왕자)가 글 읽는 모습을 보는데 인종이 그때 5세였다. 보양관 남곤·조광조와 승지·사관 등이 들어와 모시고 있었다.

원자는 옥띠를 매고 가죽신을 신고 단정히 손을 모으고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소학>을 물 흐르듯 읽고, 뜻을 해득하고 분석함에 목소리가 어질고 두터웠다고 한다. 이듬해 6세가 되던 1520년 4월 세자로 책봉되었다. 13세 때는 궁료를 시켜 <사물잠(四勿箴)>(정이)과 <심잠(心箴)>(범준) 및 <서경> ‘무일’ 편과 <시경> ‘칠월’ 편을 써서 바치게 하고는 마음으로 따랐다. 또 손수 성현의 격언과 훈계를 써서 가까이 벌여놓고 반드시 준행했다.

밤늦도록 <대학연의> <근사록> <자경 편> 등을 읽고, 이튿날 새벽이면 또 서연에서 강독할 책을 읽었다. 이렇게 인종은 동궁에 있던 25년간 학문에 힘을 기울였다. <열성어제>에는 인종의 시문이 여럿 전한다.

부왕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은 친히 글을 지어 제사를 드렸다.

 

하늘이 덮고 땅이 실어주어 만물이 생기고, 부모가 돌보아 자식이 자라는 것이오니, 머리카락 하나, 살 한 점 모두 하늘과 부모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혈기 있는 사람치고 누가 부모 없겠습니까만, 어둡고 막힌 저는 남보다 더 많이 어버이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기르기를 오로지 하고 또 오래하였습니다. 태어난 지 열흘이 못 되어 갑자기 어머니를 여의고 보호해주는 이 없어 제대로 자라지 못할 것 같더니, 은혜를 극진히 내려 잔악한 몸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외람되이 동궁에서 모시게 되어 은총이 매우 특별하였고, 뜰 앞에 절하고 모실 때 매양 말씀을 듣고는 분수를 감당하기 어려웠기에,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듯 우러르는 정성이 곱절 더하였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산악같이 만수무강을 길이 무궁하게 누리실 줄 믿었더니 어찌 하룻저녁에 갑자기 제가 큰 재앙에 걸려 부왕께서 순임금 연령의 반도 채우지 못하셨단 말입니까. 하늘이 너무도 멀고 아득하기만 하고 망극한 아픔이 가슴을 찢고 창자를 태우는 듯합니다.

세월이 흘러 흘러 능을 이미 정했으니 다만 궤연(?筵)을 의지할 뿐 장차 뵙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늘처럼 길이길이 땅처럼 오래오래 슬프고 사모함이 참으로 깊을 것입니다. 저승과 이승이 비록 동떨어지게 되었으나 이 마음은 반드시 통할 것입니다. 조촐한 제물을 올리오니 굽어 임하소서.

부왕 죽자 닷새 동안 엎드려 울어

조선 시대 역대 군주 가운데 부왕이 죽은 때 제문을 지어 남긴 군주는 인종이 유일한 듯하다. 이미 서른의 나이였으므로 이런 제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인데, 부왕을 추모하는 뜻이 절절하다.

다정다감했던 인종은 부왕 중종이 병에 걸리자 관과 띠를 풀지 않고 옆에서 간병했으며, 죽조차 마시지 않아 모습이 수척하고 얼굴이 검어졌다. 재상들을 나누어 보내서 두루 산천에 기도를 드리는데, 몹시 추울 때인데도 목욕재계하고 친히 대궐 뜰에 서서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하늘에 빌었다. 중종이 승하하자 머리를 풀고 발을 벗은 채 뜰 밑에 엎드려 엿새 동안이나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고 닷새 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인종은 즉위한 다음해 1545년 6월29일, 윤인경 등을 불러 세자에게 전위하고, 다음 날 7월1일(신유) 경복궁의 정침에서 서거했다. 보령 31세였다. 인종은 왕비 박씨에게 후사가 없었고 다른 자녀도 없었다.

임종에 붓을 잡고 쓰려 했으나 쓰지 못하자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생각을 신하들에게 상세히 이르려 해도 그럴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인종은 부왕의 상을 겪었거늘 상례도 마치지 못해 끝까지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며, 죽거든 부모의 능 곁에 묻어달라고 했다. 홍언필이 원상(院相)이 되어 우의정 윤인경과 함께 유명(遺命)에 따라 국새를 명종에게 올렸다.

인종은 정말로 온화하고 감성이 풍부하며 효성이 지극했다. 그가 단명한 것은 집상 때 얻은 병 때문이었을 것이다. 군주는 종묘사직을 책임져야 하거늘 집상을 예법보다 지나치게 한 것은 잘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 :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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