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기획 위장 망명’ 조직 있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3.04.0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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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대출 받게 한 후 유럽 등으로 꾀어 재산 강탈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꾀어 해외로 몰래 빼내는 ‘기획 위장 망명 브로커’들이 활개치고 있다. 최근 탈북자들 사이에는 ‘누가 해외로 떴다’ ‘누구는 브로커에 속아 쪽박을 찼다’는 말이 떠돈다. 그러면서 ‘해외 망명 브로커들을 조심하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탈북자들의 ‘탈남(脫南) 현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은밀하게 진행돼왔다. 보통 탈북자들은 북한을 탈출한 후 두 가지 길을 선택한다. 중국이나 제3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거나, 아예 제3국에 정착하는 것이다. 대부분 한국행을 선택하고 있지만 일부는 미국·영국·호주 등으로 떠난다. 이들은 해당 국가에서 난민 신청을 하고 받아들여지면 그곳에 정착할 수 있다. ‘망명자 지원 정책’에 따라 정착금도 받는다.

탈북자 10명 중 8명은 북한을 탈출할 때 ‘탈북 브로커’들의 도움을 받는다. 대개 500만~1000만원의 수수료를 주기로 약속하는데, 이 돈은 나중에 정착금을 받은 후 떼어주고 나머지는 일을 해서 갚아야 한다. ‘필요악’이지만 현실적으로 제재할 방법은 없다.

일단 국내로 들어오면 국정원이 주축이 된 합동신문조에서 조사를 받은 후 하나원에서 교육을 이수하면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 정부는 탈북자 1인당 기본 정착금으로 700만원씩을 지급하고 있다.

2010년 9월 영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주영 북한대사관 앞에서 북한 정권의 인권 탄압을 규탄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 국적 숨기고 난민 신청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하나 둘 해외로 몰래 빠져나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취업이 안 되거나, 차별 등의 이유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랬다. 이들은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한국 국적 취득’ 사실은 숨기고 북한에서 온 것처럼 꾸몄다.

이에 대해 탈북자 사회에서는 ‘오죽 살기 힘들면 해외로 가겠느냐’며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탈북자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 문제가 주요 원인이다. 정부에서도 이런 사실을 파악하고 있으나 거주 이전을 제한할 수 없어 국내법으로 막기가 쉽지 않았다. 한마디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 것이다.

하지만 위장 망명 브로커들이 생겨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기자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기획 망명’은 도를 넘고 있다. 망명 브로커들은 탈북자들과 범죄를 공모하는 등 심각한 지경이다.

통일부가 산하 재단법인인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에 의뢰해 2월 한 달간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고충·피해를 접수해보니 망명 브로커들의 횡포가 극심했다. 이들은 탈북자 명의로 고가의 자동차, 휴대전화 등을 사거나 개설하게 한 뒤 위장 망명에 들어가는 비용을 일부 대주는 대신 탈북자 명의의 자동차 등을 되팔아 돈을 챙기기도 했다.

통일부 정착지원과 관계자는 “위장 망명에 대한 제보가 있었고, 피해가 많이 발생하고 있는 것 같아 현황 파악에 나섰다. 위장 망명 탈북자와 브로커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당국에 수사를 의뢰했다”고 밝혔다.

기자는 오래전부터 탈북자들로부터 ‘기획 망명’에 대한 제보를 받고 실태 파악에 나섰다. 알선 브로커들은 탈북자들에게 접근해 ‘유럽에 가면 편히 잘살 수 있다’며 해외 망명을 부추긴다. 주로 영국·벨기에·네덜란드·호주·노르웨이·프랑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TV 등을 통해 이들 나라의 자연 경관이나 이국적인 문화를 접한 탈북자들은 귀가 솔깃하기 마련이다.

탈북자가 위장 망명에 동의하면 다음 순서에 들어간다. 우선 재산을 정리하고 현금화한다. 브로커들은 “해외에 나가기 전에 최대한 돈을 챙겨야 한다”며 금융권 등에서 가능한 한 모든 불법 대출을 받게 한다. 휴대전화 개설은 물론, 캐피털업체를 통해 차량을 할부로 뽑게 만든다. 지인 등으로부터 돈을 빌리게 하는 등 최대한 돈을 끌어모으게 한다. ‘해외로 가면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킨다.

이렇게 해서 탈북자는 전 재산을 정리하고, 사기 대출까지 받아 큰돈을 챙겨 해외로 떠난다. 돈을 대출해준 금융기관 등에서는 빌린 돈을 체납한 뒤에야 해외 망명 사실을 알게 된다.

현지에 가면 국내 브로커와 연결된 또 다른 현지 브로커가 기다리고 있다. 탈북자들은 환상을 안고 해외로 나가지만 헛된 꿈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현지 브로커들은 탈북자들이 현지 사정에 어둡다는 점을 노리고 전 재산을 강탈한다. 물론 브로커 중에는 망명에 성공한 후 수수료만 챙기는 이도 있다.

한 탈북자는 “내가 아는 사람은 네덜란드가 좋다는 꾐에 속아 불법 대출까지 받아 그 나라에 갔다. 브로커들은 이민국에 가면 몸수색을 한다며 카드, 현금 등을 잘 보관해주겠다고 꼬드겼다. 그리고는 카드는 긁을 대로 다 긁고, 현금은 통째로 삼켜버렸다. 결국 돈 한 푼 없이 알거지가 됐고, 현지 한국대사관의 도움으로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고 전했다.

‘해외 망명 사기’는 비참한 결과를 낳는다. 결국 ‘신천지’를 꿈꿨던 탈북자는 해외에 정착하기는커녕 전 재산을 빼앗긴 채 쪽박을 찬다. 여기에 불법 대출 등에 가담한 혐의로 처벌까지 받아야 한다. 또 정부에서 받은 정착지원금도 토해내야 한다.

망명 브로커 조직, 국내외에 거점

통일부 정착지원과 관계자는 “탈북자들도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다. 어학연수, 취업 등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다만 한국 국적 취득 사실을 숨기고 위장 망명을 하려다 탄로 나 국내로 다시 들어올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브로커들의 수법이 교묘해져 ‘탈북-국내 정착-위장 망명’까지 풀 세트로 기획한다는 말도 나돈다. 탈북한 후 남한에 정착해서 정착금을 받고는 대출 등을 통해 돈을 끌어모은 후 제3국에 난민으로 가장해 망명하는 것이다.

한 탈북 브로커는 “북한이나 중국 상황이 여의치 않다. 단속이 심하고 감시가 많아 북한에서 작업(탈북)하는 데 여간 어렵지 않다.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중국에 깔려 있어 위험하다. 그러다 보니 일부 브로커는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 같다. 중국을 통해 남한 사정을 알고 있는 탈북자들은 해외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위장 망명이 돈이 된다고 판단한 망명 브로커들의 규모도 점점 커지고 있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망명 브로커들은 해외와 현지 그리고 각 지역에 거점을 두고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탈북자가 많이 거주하는 서울·인천 등에는 전문 모집책이 있다.

최근에는 젊은 층보다는 장년이나 노년층을 집중 공략한다는 것이 탈북 소식통들의 말이다. 한 탈북자는 “서울·인천·경기도에 사는 탈북 노인들을 많이 꼬여서 데려간다. 해외에 가면 65세부터 많은 노년연금을 준다고 속인다. 모두 거짓말이고, 절대 속아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통일부에서는 탈북자들이 브로커의 말에 솔깃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정착지원과 관계자는 “브로커가 접근했을 때 신중해야 한다. 이런 때는 신변보호 담당관이나 하나센터 담당자, 전문상담사 등과 상담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은 “탈남하는 사람은 대출을 받았거나, 사기를 당했거나 뭔가 불이익을 당한 이들이다. 브로커들도 이런 사람에게 접근한다. 정부에서도 탈남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나쁘다고 하지 말고, 이런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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