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망 있는 자를 신중히 택해 그 지위에 둬라
  •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 승인 2013.04.03 14: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종 ② / 새로 정승 뽑는 복상 앞두고 대신들에게 내린 친서

인종은 동궁으로 있을 때 학문에 힘써 세자시강원의 관직인 궁료를 선발할 때 대단히 신중하게 했다. 학자로서 저명한 이언적(李彦迪)이 빈객이고 유희춘(柳希春)이 사서(司書)였으니 당시 시강원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주역>을 강론할 때는 특별히 목은 이색의 후손 이여와 허균의 부친 허엽을 불러 연찬했다.

이여가 이언적과 함께 서연(書筵, 세자의 강학 자리)에 들어가니 인종은 세밀한 내용까지 물었다.

ⓒ 일러스트 유환영
이언적의 규간을 감격하며 받아들여

하루는 송괘(訟卦)를 강하는데, 육삼(六三) 효의 ‘옛 덕을 간직함(食舊德)’에 이르러 인종은 “이것은 <중용>의 ‘군자는 현재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맞춰 행해야 할 도리를 행한다’는 말과 같은 뜻인가”라고 했다. 마침 입시했던 허엽이 그 문제를 풀어서 답변하자 인종이 탄복했다. 허엽이 추억한 일화다.

이언적(1491~1553)은 본관이 여주,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이다. 1514년(중종 9년) 문과에 급제했고, 1530년 사간으로 있을 때 김안로에 대한 중용을 반대하다가 배척을 받아 경주 자옥산에 은거했다. 김안로의 아들 희(禧)가 공주에게 장가들었는데 바로 인종의 맏누이다. 김희는 연성위에 봉해지고 김안로는 갑자기 재상직에 승진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시강관에 겸직 발령되고 다른 여러 벼슬을 거쳤다.

1538년(중종 33년) 2월 조강에 시강관으로 참석한 이언적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국가의 대사는 대신이 총괄하고 조정의 득실은 대간이 규찰하며, 국왕을 모시고 계책을 수립하는 시종신으로 말하자면 임금의 덕을 보필하는 것이 그 직책입니다. 지금 조정의 국면이 수시로 뒤바뀌어 원기가 위축되고 풍속이 무너졌는데 그 근원은 모두 전하께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덕을 굳게 지키지 못하시는 데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굳게 덕을 지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시고, 밝게 사람을 살피시어 옳고 그름을 분변하소서. 대개 궁궐의 인연을 이용해 진용되기를 바라는 자는 바른 사람이 아니고, 조정에 우뚝 선 채 맹종하는 것을 숭상하지 않는 자는 군자입니다.

 

이언적은 국왕의 측근이 되어 그 진용이 되려는 자는 바른 사람이 아니고, 조정에 우뚝 서서 바른 도리로 자신을 지켜 나가는 자야말로 군자라고 했다. 대개 김안로가 권력을 누릴 때 온 조정이 그에게 쏠린 현상을 비판한 것이다.

이언적의 주장에 대해 중종은 자신이 즉위한 이래 조정에 여러 차례 변이 있었던 것은 자신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데 원인이 있었다고 자책하며 주의하고 살피도록 하겠다고 받아들였다.

이언적은 1543년(중종 38년) 11월 의정부 좌참찬에 제수되자 52세인 부모의 병을 이유로 사퇴해 안동부사에 제수되었다. 장차 떠나려 하면서 이언적은 동궁을 규간하는 글을 올렸다. 동궁은 손수 답장을 써서 주었다. 그 글이 이언적의 연보에 실려 있고, 뒷날 <열성어제>에도 실렸다.

 

공이 외임을 받은 것은 공의 효성에서는 잘된 일이오. 나는 아름다운 말과 바로잡아주는 논을 오랫동안 듣지 못하던 차에 특별히 공이 지극하고 절실한 설을 주어 마음속에 감격해 명심하며 잘 따라 실천하겠소.

 

결국 이언적은 안동부사로 나가지 않고 대사헌으로 머무르게 되고, 다음 해에는 홍문관제학과 동지성균관사를 겸하게 된다. 3월에 체직되어 안동으로 내려갔다. 그 이듬해 8월 지중추부사 겸 세자우부빈객으로 초빙되었으나 사직했다.

이언적을 재상으로 삼으려 애쓰기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했다. 1545년 정월 인종은 복상을 명했다. 복상이란, 새로 정승이 될 사람을 가려 뽑기 위해 사람을 추천하는 일을 말한다. 인종은 친서로 대신에게 다음과 같이 하유했다. <열성어제>에는 1544년의 친서로 되어 있으나 <국조보감>에는 1545년의 친서로 되어 있다.


보상(재상)의 직책은 온갖 책임이 다 모이는 곳이니, 적임자가 재상 자리에 앉게 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그렇지 않으면 난리와 패망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옛날의 명군은 반드시 훌륭한 유학자나 큰 덕망을 갖춘 자를 널리 뽑아 임용했으며 담장을 쌓는 인부 가운데서 선발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지금 두 재상이 차례로 승진했으니 그 후임자를 선발해야 하겠다. 생각건대, 우리 선왕께서 인재를 배양하신 것이 성대하다고 하겠으니, 발탁해 제수한다면 반드시 적임자가 있을 것이다. 덕망이 있는 자를 신중히 택해 그 지위에 두도록 하라. 내가 부덕한 몸으로 참혹하게도 큰일을 당함에 몽매해서 전혀 살필 수가 없으므로, 국가를 경영하는 중대한 일이 모두 대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 훌륭한 재상을 얻는다면 국가의 복이다.

 

당시 인종의 뜻은 이언적을 재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었다. 우의정 윤인경이 동료 재상이라는 이유로 인피하고 들어갔다. 부왕의 장례를 끝낸 후 인종이 다시 복상을 명하자, 윤인경이 또 “자급으로 보아 차례가 된 사람은 병이 들어 외방에 있으므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맞춰 나오기 어렵습니다”고 말하고 끝내 이언적을 뽑지 않았다.

안동에 있던 우찬성 이언적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자 인종은 “왕년에 경이 올린 열 조목의 상소를 선왕께서 나에게 내려주어 보게 하셨다. 또 경이 서연에 들어와 참여했을 때 한 말이 모두 바른 것이었으므로 내가 일찍이 탄복했다. 내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지어 보내게 하니 경은 모름지기 병을 치료하고 올라오도록 하라”고 말했다.

1545년 7월 인종이 승하하자 이언적은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했다. 원상이란 국왕이 죽은 뒤 졸곡까지 스무엿새 동안 정무를 행하는 임시 벼슬을 말하는데, 후사 왕이 어릴 경우 일정 기간 정무를 더 보았다.

명종이 즉위한 후 이언적은 경외의 관서에서 법에 맞지 않는 가혹한 형장을 쓰지 않도록 건의해 받아들이게 하는 등 국정을 쇄신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윤원형이 주도한 을사사화의 추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과 이기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인종은 대대로 조정에서 중신으로 있던 집안 출신의 관료들을 존중했다. 그것이 왕권을 확립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종이 이언적을 각별히 우대한 것은 이언적이 부왕 때부터 경연에서 바른 말을 하고 또 서연에서 자신을 계도한 것이 올바른 도리에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이언적이야말로 ‘옛 덕을 간직한’ 인물이었다.

오늘날 권력의 장에서 사욕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인종과 이언적의 관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송괘 육삼(六三) 효사에 이렇게 말했다. “옛 덕을 간직하여 올곧으면 당장은 위태롭지만 끝내 길하리라.”   

참고 : 심경호 <국왕의 선물>, 책문, 2012.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