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뒤에 숨은 ‘정의로운 테러’
  • 이규대 기자·최혜미 인턴기자 ()
  • 승인 2013.04.1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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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해커 어나니머스, 익명 뒤의 ‘온라인 영웅주의’ 실체

‘나는 정의롭다. 고로 나는 해킹한다.’ 최근 논란이 된 해킹 집단 어나니머스(Anonymous)의 정신을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하자면 이렇다. 어나니머스는 4월3일 대남 선전 사이트 ‘우리민족끼리’를 해킹해 회원 명단을 공개하면서 사회에 파장을 불러왔다.

어나니머스는 해킹 이유를 “(우리의) 4대 요구를 북한에 요구하고 경고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4대 요구란 ‘북한 정부는 핵개발 및 핵위협을 멈춰라’ ‘김정은은 물러나라’ ‘북한에 민주 정부를 세워라’ ‘모든 (북한) 시민에게 검열 없는 인터넷 접근을 허용하라’ 등이다.

금전상 이익 혹은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어나니머스는 그들이 요구하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 해킹을 했다. 최근 남북 관계가 최악의 경색 국면에 접어든 상황이다. 그들의 행보는 삽시간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어나니머스의 실체는 무엇인가. 앞으로 이들은 어떤 활동에 나설까. <시사저널>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트위터·페이스북 등 SNS망을 집중 탐문했다. 온라인상에서 ‘어나니머스’를 표방하며 활동하는 이들을 다방면으로 접촉했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어논’(어나니머스의 준말)을 표방하는 이와 이번 해킹 사건에 연루된 이를 구별할 수 있었다. 일부 관련자는 어나니머스에 대한 질의를 시작하자 “어나니머스 관련 이야기는 모두 언급이 금지되어 있다. 관련 기밀을 누설할 수 없다”며 취재진을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 시사저널 전영기
핵심 그룹 30명, 익명 채팅으로 소통

최종적으로는 이번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3명의 해커와 접촉할 수 있었다. 해외에 거주하는 30대 중반의 최 아무개씨,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해커 이 아무개군, 취재진에 어나니머스측의 공식 입장을 전달한 박 아무개씨 등이다. 이들은 대면 인터뷰를 꺼렸다. 이 때문에 개인 이메일 혹은 인터넷 메신저를 통해 의사소통이 이뤄졌다.

어나니머스는 익명의 개인들이 뭉친, 누구에게나 열린 조직을 표방한다. 서로 간의 위계도 없다. 이에 대해 박 아무개씨가 내놓은 공식 입장은 다음과 같다. “어나니머스에는 리더도, 핵심 멤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지도하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잘 조율하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인원은 약 30명이라고 한다. 구성원 사이의 소통은 ‘IRC(인터넷 릴레이 채팅)’방 안에서의 익명 대화로 이뤄진다. 페이스북에도 ‘Anonymous Korea’라는 그룹이 있지만 현재는 비공개로 전환해놓은 상태다.

일부 회원은 비공개로 오프라인 모임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핵심 그룹에는 나름의 ‘진입 장벽’이 존재한다. ‘어논’을 표방한다고 해서 누구나 함께 활동하는 축으로 묶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박씨는 “우리의 뜻을 같이하면 어나니머스가 되는 것이다. 허나 잘못하다간 ‘Fake Anon(거짓 어논)’이라는 수치스러운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익명을 표방한 모임인 탓에 누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또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핵심 그룹이 30여 명일 뿐, 여기에 동조하는 수많은 이들이 국경을 가리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최근 10여 년 동안 해커로 활동했다는 최 아무개씨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유저가 총 몇 명인지도, 각자 어떤 방법으로 활동하는지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우리민족끼리’에 대한 해킹 작업은 전 세계 유저들이 함께했다. ‘오퍼레이션(공격 명령)’을 가동하면 SNS 등에 공개돼 다른 나라 유저들도 쉽게 동참해 대규모의 공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어나니머스의 활동을 두고 이른바 ‘배후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나오기도 한다. 북한 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의 회원 명단을 공개한 행동이 사회적으로는 우파 성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 보수 시민단체 혹은 극우 성향의 웹 커뮤니티 일베(일간 베스트 저장소)와의 관련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박씨는 “어나니머스는 연관된 단체가 전혀 없다. 우리는 누구의 지시나 명령을 받고 행동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했다. 국정원 관계자도 “이런 오해를 많이 받고 있지만,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며 ‘사주설’을 부인했다. 실제로 ‘어논’들의 SNS를 살펴봐도 관련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진보 개혁적인 성향을 지닌 이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해킹과 정치 행동 결합된 ‘핵티비즘’ 본격화

 어나니머스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행동을 통한 정의를 추구한다. 이것이 해킹과 정치 행동이 결합된 ‘핵티비즘(hacktivism)’ 성향으로 나타난다. 왜 이들은 해킹이라는 수단으로 정의를 실현하겠다며 나선 것일까. 그 행동의 동기는 무엇일까.

어나니머스는 스스로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영화 <브이포벤데타>의 ‘가이 포크스’ 가면을 내세운다. 영화의 주인공 ‘브이(V)’는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자다. 가면을 쓰고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폭력과 테러의 방식으로 자신의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이다. 지금 어나니머스를 표방하는 이들이 해킹이라는 사이버 테러를 통해 ‘브이’를 추종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핵티비스트(Hactivist, 해킹을 통한 행동주의자)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공격을 하면 그들은 우리를 테러리즘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체포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정의라 칭합니다”(@Anonsj)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어나니머스 회원인 고등학생 이 아무개군은 “온라인에서 정의롭지 않은 것에 반대하며 심판하는 게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군은 ‘어나니머스 제타스’ 사건에 매료됐다. 멕시코의 갱단 제타스에 한 회원이 납치되자 어나니머스가 ‘조직과 관련된 정보를 폭로하겠다’며 제타스를 협박해 문제를 해결했던 사건이다. 이에 대해 이군은 “인터넷 정보가 무기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 셈”이라고 말했다.

정의로운 행동의 전제는 결국 불의(不義)의 상황이다. 정의롭지 못한 외부의 적을 상정하고 이를 타깃으로 삼아 공격해야 한다. 현재 해외에서 활동하는 어나니머스의 ‘공공의 적’은 이스라엘이다. 팔레스타인과 갈등하며 분쟁을 낳는 이스라엘을 해킹으로 공격한다. 그래서 이들은 “이스라엘을 인터넷에서 지워버리겠다”는 포부를 내세운다. 이와 비교할 때 지금 한국의 어나니머스는 국제 어나니머스의 행동 패턴을 정확히 복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북한을 한반도의 ‘이스라엘’ 격으로 지목했다.

위험한 그 이름 ‘디지털 마오이즘’

전문가들은 소셜 미디어 환경이 발달하면서 ‘핵티비즘’의 힘이 더욱 강화됐다고 분석한다. 급기야 일부 세력이 정의를 내세우며 적을 설정하고, 직접 사이버 행동에 나서는 영웅주의적 면모까지 띠게 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남북 관계라는 민감한 현안을 들쑤시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컴퓨터과학자 재런 래니어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감정적 집단주의를 ‘디지털 마오이즘(Digital Maoism)’이라고 표현하며 경계한다. 익명 뒤에 숨은 집단의 판단은 종종 광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가면 뒤에 숨은 익명의 해커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충분히 책임질 자신이 있는 것일까.

당장 북한측은 어나니머스의 활동이 한국 정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규정하고 나섰다. ‘우리민족끼리’는 “어나니머스의 이번 해킹 범죄가 남조선 정보원을 비롯한 괴뢰 패당에 의해 조작되었다”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실제로 행동한 주체가 누구이든, 남한 전체가 북한의 사이버 도발에 응한 것으로 간주됐다.

당초 어나니머스는 오는 6월25일 북한의 내부 인터넷망을 해킹해 핵시설을 공격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북한 내부 인터넷망 ‘광명’에 외부망을 연결하는 일종의 전산상 통로인 ‘닌자 게이트웨이’를 구축하겠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기자의 취재 결과 현재 어나니머스는 한 발짝 물러선 모양새를 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어나니머스 회원인 박씨는 “닌자 게이트웨이에 대한 내용은 조심스럽지만 이야기를 꺼내보겠다. 기자들이 ‘핵시설 관련 해킹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과장해서 표현했다. 아직 사실무근이다”라고 밝혔다.

향후 이들은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가. 이에 대해 어나니머스측은 “오퍼레이션에 대한 언급은 자제하겠다. 이유는 잘 알다시피, 작전에 대한 내용은 언제든지 추가·수정·변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만 덧붙였다. 추가 행동이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발언이다. 실제로 4월11일에는 북한 정부 공식 사이트를 해킹하는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어나니머스의 최근 타깃은 이스라엘 


국제 해커 단체 어나니머스는 ‘지식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기치 아래 모인 핵티비스트들의 느슨한 연대다. 2003년 ‘4chan’이라는 미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처음으로 탄생했다. 단체라고는 하지만, 리더나 조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 각지에 지부 형태를 갖추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새롭게 어나니머스 활동을 하고 싶다고 해서 별도의 자격 인증을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어나니머스는 언론 자유 및 검열 반대의 가치를 중시한다.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를 ‘언론 자유 순교자’라 칭하며 지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0년에는 어산지를 기소한 스웨덴 검찰 웹사이트를 다운시키고, 위키리크스에 대한 금융 서비스를 중지한 마스터카드 사, 비자카드 사, 스위스은행 웹사이트를 공격했다.

정치적으로도 활발한 움직임을 펼쳐왔다. 2011년에는 튀니지와 이집트 정부 웹사이트를 공격하며 ‘아랍의 봄’을 지지했다. 지난해에는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정책에 반대해 이스라엘 은행 등 웹사이트 약 700곳을 다운시켰다고 주장했다. 아동 포르노 유포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관련 사이트를 공격했다. 작전명은 ‘오퍼레이션 다크넷’으로 이를 통해 약 190개의 IP 주소를 폭로하기도 했다. 최근 어나니머스의 주요 목표는 이스라엘이다. 4월8일에도 이스라엘 정부 및 주요 기관 홈페이지에 대규모 사이버 공격을 펼쳤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커 집단은 어나니머스 이외에도 많다. ‘핵티비즘’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컬트 오브 데드 카우’, 어나니머스로부터 갈라져 나와 유희적 목적의 해킹을 일삼는 ‘룰즈섹’이나 ‘핵티비스모’ ‘카오스 컴퓨터 클럽’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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