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상 업계가 탈세의 온상?
  • 이혜숙 객원기자 ()
  • 승인 2013.04.3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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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스크랩 관련 법’ 국회 상임위 통과…연 2000억 세수 확대 기대

“국세청의 강도 높은 세무조사로 정상적인 영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변에 세금 폭탄을 맞아 도산한 기업이 한두 군데가 아니고 도저히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4월23일 동(銅) 스크랩 부가가치세를 매도인(동 스크랩 수집상) 납부 방식에서 매입자(동 가공 처리업체)가 직접 납부하도록 한다는 내용의 ‘동 스크랩 부가가치세 매입자 납부 법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다. 그러자 중고 비철금속 처리장이 몰려 있는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 일대가 크게 술렁였다. 동 스크랩은 폐전선 등 ‘쓰고 난 구리 조각’을 뜻하는 말로 고물상이 이를 모아 중간 상인에게 넘기면 이들이 품질별로 분류·가공해 제조업체에 납품한다. 그동안 부가세 납부자였던 일부 동 스크랩 수집상들은 부가세 명목으로 동 가공 처리업체로부터 판매 금액을 높여 받은 뒤 폐업하는 방식 등으로 탈세해왔다. 그런데 이번 법 개정으로 부가세 납부자가 매입자인 동 가공 처리업체로 바뀌게 된 것이다. 지하경제 양성화의 첫 타깃으로 동 스크랩 시장이 지목된 셈이다.

경기도 시흥시 은행동에 있는 동 스크랩 전문 회사 지성MS에 설치된 동 스크랩 압축기. ⓒ 시사저널 전영기
가짜 석유와 더불어 탈세의 온상

동 스크랩 시장은 ‘가짜 석유’와 더불어 세금 탈루의 주범으로 지목돼왔다. 실제로 지난 5년간 국고로 들어오지 않고 탈세범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간 돈이 9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세청은 2011년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실시해 70여 개 업체에 1조원가량의 세금을 추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세업체의 피해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법안 통과에 부정적이던 국회가 지하경제 양성화 제1호 입법으로 동 스크랩 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이번 제도 도입으로 연 2000억원의 세수 증대를 예상하고 있다.

한국동스크랩유통업협동조합 전민철 전무는 “부가세 매입자 납부 제도가 시행되면 그동안 만연했던 동 스크랩 시장의 세금 비리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 조합원의 숙원인 이 제도가 조속히 시행돼 지하경제 양성화에 도움이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 스크랩 시장은 개인이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고물을 모으는 영세 고물상부터 수백억 원의 자본으로 운영하는 기업형까지 다양하다. 현재 전선, 동 파이프, 동판 등 동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우리나라의 동 원료 소요량은 연간 45톤가량. 이 중 25만톤은 해외에서 원료를 수입하고 20만톤은 동 조각, 동 파편, 동 전선, 동 부스러기 등 동 스크랩으로 메우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충당분 20만 톤 중 절반 수준인 10만톤가량(9000억원 상당)이 동 스크랩 거래 과정에서 탈세가 이뤄지고 있다. 동 스크랩이 탈세의 온상이 된 것은 바로 세금 납부 방식의 허점 때문이었다. 철거상에서 소규모 수집상, 중대형 수집상(중상인), 납품업자(대상인), 제조업체 순으로 거래되는 과정에서 일명 폭탄업체(중간 상인)가 개입해 거액의 부가세를 착복하고 잠적해도 세무 당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세금 추징에 나선 세무 당국이 폭탄업체인지 모르고 실물 거래를 한 제조업체들까지 모두 불법 거래를 한 것으로 판단하고 세금을 부과해 선의의 사업자들이 줄도산하는 등 폐해가 심각했다.

경기도 용인에서 동 스크랩 납품업을 하고 있는 박 아무개씨는 “동네 고물상으로부터 매입 자료 없이 물건을 매입해 납품업자에게 부가세를 포함한 금액으로 매도한 뒤 폐업하고 잠적해버리는 ‘무자’(무자료상)들의 탈세가 상당하다”며 “지금은 ‘무자’가 기업형으로 바뀌어 바지사장을 내세워 자금 세탁을 한 후 물건을 파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어 관련 업체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회가 동 스크랩 시장의 고질적인 탈세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마련한 법안이 바로 동 스크랩 부가세 매입자 납부 제도다. 동 스크랩을 사고팔 때 매입한 쪽이 직접 국세청에 부가세를 납부하도록 해 폭탄업체나 무자들과 거래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세무조사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김광림 새누리당 의원은 “국내에서 수집되는 동 재생 원료 20만톤 가운데 절반가량이 탈세로 이어졌다”며 “동 스크랩 부가세 매입자 납부 제도로 영세 고물상의 부담이 해소되면서 연간 2000억원의 세수 확보가 예상된다”고 밝혔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한 조치들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국세청은 지하경제 양성화 대상이 대기업, 고소득 자영업자 등이라고 강조하지만 중소기업과 일반 자영업자들까지 공포에 떨고 있다.

마구 뒤지면 더 꽁꽁 숨는다

김덕중 국세청장은 “지하경제 양성화 대상은 대기업과 의사,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 직종과 대형 유흥업소, 고급 주택 임대업종 등 현금 거래 비율이 높은 대재산가로 탈세 혐의가 큰 분야”라며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 등 서민 경제에 피해가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국세청이 주요 타깃으로 삼은 탈세 혐의가 큰 분야는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비자금 조성 등 지위를 악용한 지능적 탈세 행위와 대재산가의 지분 차명 관리, 위장 계열사 설립, 특정·신종 채권 발행을 통한 편법적인 부의 대물림 등이다.

국세청의 지목을 받은 대상들은 벌써부터 좌불안석이다. 그나마 오랜 기간 세무 당국의 감시를 받아온 대기업에서는 상대적으로 동요의 폭이 크지 않지만, 고소득 전문직의 경우 정·관계를 상대로 전 방위 로비전이 치열하다.

문제는 지하경제 양성화가 자칫 북핵·엔저(低) 등의 악재로 가뜩이나 움츠려든 실물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강도 높은 세무조사는 기업의 투자 심리를 위축시키고,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과거에도 국세청의 탈세 조사가 강화되는 시점에는 어김없이 “기업 활동이 위축돼 실물경기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볼멘 목소리가 경제계 안팎에서 흘러나왔다. 지하경제 양성화 조치가 심화될수록 이런 불만은 거세질 전망이다.

5년에 한 번씩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지하경제 양성화’가 정권 초반 상징적인 구호로 그칠 것이란 심리도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되고 있다.

김덕중 청장의 불법 사채 시장 엄단 방침에도 사채의 ‘메카’로 불렸던 명동 사채 시장 분위기는 냉소적이다. 명동 일대에서 사채업을 했다는 60대의 이 아무개씨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하경제니, 검은돈이니 말들이 많다. 실제로 단속을 강화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 철퇴를 맞는 경우도 있다”며 “그러나 소나기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세상이 한창 시끄러울 때는 대부분 지하로 더욱 꽁꽁 숨는다”고 말했다.

국내 지하경제 규모에 대해서는 지금껏 정확한 통계가 없어 ‘고무줄 통계’라는 말이 나왔다. 박근혜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이 가시화되면서 현대경제연구원은 국내 지하경제 규모를 GDP(국내총생산) 대비 23%인 약 290조원으로 추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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