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광기가 극우 DNA에 심어졌다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3.05.0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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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부터 아베까지, 일본 극우 총리 계보 이어져

“자민당은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

2009년 민주당에 패하면서 54년의 장기 집권을 끝낸 자민당은 일본 정치 무대의 주인공에서 물러나는 듯했다. 그러나 극우 보수가 다시 부활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과 3년 만인 2012년 오히려 더 강력하게 ‘우향우’해서 돌아왔다.

이가라시 진 일본 호세이 대학 교수는 “일본에서 본격적인 보수 정권이 탄생한 날은 2012년 9월26일”이라고 말한다. 이날은 현 일본 총리인 아베 신조가 결선 투표까지 거치며 지난 2007년에 이어 두 번째로 자민당 총재가 된 날이다. 아베의 승리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2위로 결선 투표에 오른 차점자가 결선 투표에서 역전을 한 것은 자민당 역사에서 56년 만에 일어난 대사건이었다. 파벌의 힘으로 갈리는 빤한 승부가 아닌, 역전극의 역동성을 보여준 것이다. 자민당 구성원이 직접 아베를 선택해 불리한 판세를 뒤집었고, 그만큼 강한 보수를 원한다는 뜻을 표명했다는 점이 과거 선거와 달랐다.

‘1955년 체제’ 구축한 하토야마가 보수 원조

아베 총리의 극우 행보 뿌리는 깊다. 이른바 일본 ‘극우 대본영(大本營)’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일본은 정치적 격동기를 거친다. ‘무산 정당’이라고 불리는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법화되고 동시에 보수 정당들도 난립한 혼돈의 시기였다. 서로 뭉쳐 덩치가 커질 필요성이 생겼고, 1955년 보수 정당의 양 축이던 자유당과 민주당은 보수 대통합으로 재탄생하는데 이것이 ‘자유민주당’, 즉 지금의 자민당이다. 대통합 이후 일본에서는 자민당 장기 집권 체제인 이른바 ‘1955년 체제’가 구축됐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일본 극우 대본영의 원조로 평가받는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다. 2009년 자민당 장기 집권을 종식시키며 민주당 대표로 총리에 오른 하토야마 유키오가 그의 손자다.

1955년 대통합 이전 소수파였던 민주당 출신인 하토야마 이치로는 자유당의 요시다 시게루를 밀어내고 보수 대통합을 주도했다. 그는 총리에 오른 후 “자위군 창설을 명확하게 하려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쳤다.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시기인데도 자위군을 강하게 요구한 배경에는 당시 일본 재무장을 주장한 미국 정부의 요구가 있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서독과 일본의 재무장을 검토했다. 당시 존 포스터 댈러스 미국 국무장관은 자위군 창설을 위해 헌법 개정에 소극적이던 요시다 시게루에 실망했고, 이후 하토야마를 만나 교감을 나눴다. 그런데 이 둘의 만남을 주선한 중개자가 히로히토 당시 일왕이었다. 하토야마는 일본 극우의 두 축인 ‘미국’과 ‘일왕’을 모두 주변에 둔 인물이었다.

하토야마의 강경 보수 노선은 만주국에서 ‘그림자 총리’로 활약했던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가 이어받는다. 기시는 1957년 총리가 되었는데 지금의 아베 총리가 그의 외손자다. 기시는 ‘평화헌법’ 개정을 넘어 ‘자주헌법’을 주창했던 인물이다. 1955년 체제 이후 일본 극우 세력의 목표 중 하나는 패전국 일본의 국제 사회 복귀 문제였다. 기시는 1960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신(新)안보 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한 뒤 같은 해 5월19일 국회에서 강행 처리했다. 국제 사회 복귀를 위한 거점을 미국으로 정한 셈이었다. 주일미군의 배치가 이 안보 조약을 통해 현실화됐는데 전쟁의 기억이 채 사라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민들과 야당의 반대가 격렬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 용의자이기 때문에 일본을 또 전쟁에 휘말리게 하려고 한다”며 여론은 급속히 악화됐고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기시는 1960년 7월 총리와 자민당 총재직에서 모두 물러났다.

기시의 퇴진 이후 자민당 내에서 벌어진 강경 보수와 온건 보수 간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승리한 쪽은 온건 보수파였다. 정치인들이 헌법 개정이나 자위군 문제에서 여론의 반발이 크다는 사실을 안보 조약 사건을 계기로 알게 됐기 때문이다. 하토야마의 노선은 폐기됐고, 대신 경제를 중시하는 전후 정치를 펼쳤던 요시다 시게루 노선이 부활했다. 이케다 하야토, 다나카 가쿠에이 등 자민당 온건 보수파는 요시다의 노선을 따랐고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했다. 이때부터 군국주의적 색채를 띤 일본의 극우는 비주류로 전락했다.

극우는 이후 20년이 지나서야 사회 전면에 다시 등장했다. ‘보수 재생’을 내건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총리에 오른 때가 1982년이다. 원래 나카소네는 온건 보수파인 다나카 가쿠에이 덕분에 총리가 될 수 있었다. 자민당 최대 파벌을 보유한 다나카가(家)의 도움으로 예비선거에서부터 압도적인 지역 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나카소네 내각을 두고 ‘다나카소네 내각’이라고 불렀다. 꼭두각시 취급을 받은 셈이다.

총리가 된 나카소네는 자신을 총리로 만든 다나카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다나카가 따르던 요시다 시게루의 정치를 비판하며 헌법 개정, 민족 자립을 호소하는 등 국수주의적 주장을 전면에 내걸었다. 나카소네 총리는 역대 일본 총리 중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가장 열성적인 인물이었다. 한국·중국 등 주변국들의 반대에 맞서 자문 기관을 설치해 대응을 꾀할 정도였다.

나카소네를 가장 닮은 후대 총리는 2001년 ‘괴짜’라는 별명을 얻으며 등장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다. 1990년대 냉전 체제가 종식되고 북한 문제가 동북아 현안으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등장한 고이즈미는 2006년까지 6년간 장기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고이즈미는 총재 시절 공약으로 내걸었던 신사 참배 약속을 지키며 ‘일본의 역사’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점에서 나카소네와 비슷한 인물이다. 일본의 민족주의를 건드리며 보수 세력을 결집했던 점도 닮았다.

나카소네는 총리 시절 ‘천도’를 시도했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수도는 400년 이내에 반드시 옮겼는데 도쿄도 수도가 된 뒤 400년이 지났다는 이유에서였다. 국회 결의까지 추진되었던 ‘천도론’은 나카소네 내각이 물러나면서 힘을 잃었다. 대신 고이즈미는 왕실을 건드렸다. 그는 ‘황실전범 개정’을 추진했다. 황실전범은 황실의 제도 등을 규정한 법률로, 고이즈미는 여자도 일왕이 될 수 있도록 왕위 계승 순위를 손대려 했다.

고이즈미의 유산, 아베가 물려받아

고이즈미 내각 6년 동안 극우 조직은 세력을 상당히 확장할 수 있었다. 확장된 극우 세력은 거꾸로 내각을 지지하며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고이즈미가 남긴 유산을 가장 요긴하게 받아들인 인물이 바로 아베다. 2006년 아베는 ‘포스트 고이즈미’를 묻는 각종 설문조사에서 차점자보다 두 배나 높은 지지율 선두를 기록하고 있었고, 결국 그해 9월, 순탄하게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의 첫 번째 총리직이었다.

총리가 되자마자 무리하게 개헌을 추진하려 했고 종군위안부를 부정하는 발언 등 실언을 거듭하면서 국제적인 파장을 일으킨 아베였다. 그 탓에 지지율 급락을 맛봤고, 1년 만인 2007년 9월 총리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두 번째로 총리에 취임하는 자리를 앞두고 그는 “6년 전 제1차 아베 내각에서 측근 의원들을 중용하면서 실패했고 혼란을 초래했다”며 “(이번은) 반드시 나와 의견이 일치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폭넓은 인사를 참여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2차 아베 내각 19명의 각료 중 대표적 우익 단체인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 소속 의원이 13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6년 전 1차 내각 당시 12명보다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게다가 나카소네 전 총리가 회장을 맡고 있는 개헌 모임인 ‘신헌법 제정 의원 동맹’과 관련 있는 인사도 8명이나 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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