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시위를 하든, 반성문을 쓰든 지금 ‘50대 운동’을 해야”
  • 조철·이규대 기자 ()
  • 승인 2013.05.1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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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노래 <어느 날 귀로에서> 작사한 송호근 서울대 교수

5월6일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시각, 송호근 서울대 교수(57)가 <시사저널> 편집국에 들어섰다. 이날 낮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참에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를 찾은 것이다. 송 교수는 조용필 19집 <Hello>에 수록된 <어느 날 귀로에서>의 작사가로서 그를 몰랐던 일반인들에게도 슬슬 알려지고 있다.

그는 최근 한국의 50대 인생 보고서인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를 펴냈다. 이전의 <인민의 사회> <이분법 사회를 넘어서> 등 냉정하게 사회를 파헤쳤던 책들과 사뭇 다른 사회 비평서다. 서점가에서 에세이로 분류해 진열한 곳이 있을 정도로 서정적이다. ‘나’라는 화자가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을 투영시킨 사회 비평서, 즉 자신을 화자이자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의 머리말 제목은 ‘어느 날 귀로에서’다.

송 교수에게 전화하면 조용필 노래 <어느 날 귀로에서>를 들을 수 있다. 컬러링으로 그 곡을 올려놓은 것이다. 그 노래는 용산 재개발 현장의 어두운 포장마차촌에서도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 이 근처에서 살았다고도 했다. 송 교수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서 그 노래를 혼자 흥얼거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자주 자문을 구했을 만큼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갈파하고 있는 그는 “나는 중도 우파 성향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밝혔다. 누구는 좌파 지식인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어째서 그럴까.

그는 사안에 따라 좌도 될 수 있고 우도 될 수 있다며, 지식인이라고 어느 편에 고정 관념처럼 눌어붙어 있어서는 세상을 바람직하게 바꾸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요즘 귀로에서 서성대는 사람이 많다. 송 교수는 우리 사회의 이런 세태를 어떻게 볼까.

 

ⓒ 시사저널 최준필
요즘 청춘들도 힘들다. 50대는 누릴 것 다 누리지 않았느냐는 말도 들린다.

나는 (세대를 비교하며) 누가 더 아프냐를 얘기하고 싶지 않다. 취직도 안 되고 쓸데없는 것 배우고 있다고 주저앉아 있는 건 비겁하다. 젊음은 젊음 자체로 빛이 난다. 세상을 달리 보면 다른 세상이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50대에게는, 세상이 끝나가는 지점이다. 이미 다 끝나버렸는데, 희망을 점화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50대는 어렵다. 세상에 자신을 펼쳐보고 싶다? 어떻게 펼쳐보나. 그래도 20대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성공한 삶을 살았기에 후배 세대도 저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안이한 생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반성할 점이 많다. 환경에 밀려서 오다 보니 해야 될 일을 그 시점에서 못 했다. 쟁점을 제시하고 해결하지 못했다. 앞으로 후배 세대에게 어떻게 할지도 생각하지 못했다. 시대적 직무유기다. 그런데 그 직무유기를 따질 때가 아닐 정도로, 많은 이의 개인 사정이 너무 급하다. 50대를 다 합치면 800만명 정도가 된다. 상위 200만명은 잘산다. 하위 600만명은 불안하게 산다. 완전히 양극화된 50대를 만들어냈다. 정년을 앞둔 50대들에게 뭐 할 건가 물어보면 다들 대책이 없다. 지금 ‘50대 운동’이라도 해야 한다. 광화문에 모여서 국가적인 쟁점을 이야기하든, 촛불 시위를 하든, 반성문을 쓰든….

정년연장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지금 정년연장법에 문제가 많다. 그건 ‘고용연장법’이 아니라 후속 조치가 없으면 ‘고용파괴법’이 된다. 50대를 위해선 좋을 수 있다. 그러나 노동 시장 전체가 망가진다. 지금 50대 사이에서 “우리의 고용을 연장해줘 고맙다. 그러나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20대 노동 시장이 망가지고 40대 노동 시장도 망가진다.

1990년대 초반 사회학자로서 노동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나이가 서른다섯 무렵이었다. 30대의 기운으로 좌 쪽에 있었다. 대부분이 좌 쪽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노동 문제가 가장 중요한 시절이었다. 1990년대 문화의 시대로 전환하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다. 무엇보다 외환위기가 결정적이었다. 온 사회가 뒤집어졌으니까. 그러면서 우측으로 조금씩 오게 됐다.

생각이 변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나?

나이 탓을 할 수도 있지만,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가 단단히 구축되는 걸 보고 자본의 속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노동으로부터 멀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1999년부터 2002년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변했다. 성격이 독점적으로 변했다. 민주노동당을 만든 것은 잘한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 노조가 독점 위주로 전환하고, 10년 이상을 달리는 걸 보면서 너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래이버 아리스토크래츠(labor aristocrats, 노동 귀족)’가 된 것이다. 강성 노조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러니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만 해도 한진중공업 사태 등 노동 문제가 이슈로 등장했다.

나는 김진숙씨를 높이 평가한다. 타워크레인에 올라가서 농성하고 200여 일쯤 됐을 때, (그와 관련된) 칼럼을 썼다. 당시 보수 언론에서는 침묵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 이 사람을 주목하지 않느냐, 이 사람이 노동 문제의 상처를 다 드러내고 있는데…. 노동이 제대로 할 일을 했다면 내가 거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0여 년간 독점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이념적 성향을 딱 잘라 말해줄 수 있나?

나는 중도 우파 성향으로 봐야 할 것이다. 노동 문제나 분배 등에서는 선택적으로 좌측으로 가지만, 근거는 중도 우파다. 그렇다고 완전히 우측으로 갈 수도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에 도와달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도와줄 수가 없었던 이유다.

도와달라는 것은 장관직 제의였나?

선대본부장 제의였다. 지난해 9월 말이었다. 내가 ‘할 수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정치권이 부른다고 해서, 학계에서 자존심을 다 버리고 달려갈 수 없었다. 내가 잘나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서울대 교수가, 대통령이 될 사람이 부른다고 해서 ‘영광입니다’ 하는 게 보기 좋을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가서 벼슬을 하겠나. 한국의 지성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 한 것이다.

좌 쪽에 있었던 것이 부담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가?

이데올로기의 일관성은 중요하지 않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신념의 일관성은 꼭 지켜야 한다. 그걸 지킨 것이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교수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교수다. 당신이 부른다고 해서 쪼르르 가지 않고, 지금 내 자리에서 당신을 향해 뭐든 계속 말하는 게 내 역할이다. 이게 내 신념의 일관성이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와 자주 만났나?

10월 중순까지 지속적으로 만났다. 그 전에도 2006년부터 1년에 한두 번씩은 만났다.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주로 복지 문제와 사회 정의 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경제 민주화에 대해서도 조언했나?

경제 민주화, 복지가 시대의 화두가 됐다. 이 둘이 따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선진 국가라고 하는 것은 경제 민주화라는 프로그램과 복지라는 프로그램이 같이 돌아가야 한다. 결국 목적은 고용 창출이다. 고용 창출이 가장 중요하다. 경제 민주화 다 좋은데, 이렇게 해서 일자리 만들어지냐를 물어야 한다. 복지 다 좋은데, 이렇게 해서 일자리 만들어지냐를 물어야 한다.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구체적인 방법이 있나?

(경제 민주화와 복지) 두 바퀴를 돌리려면 고용노동부와 보건복지부 그리고 이를 섞어줄 경제 부처 등 총 세 개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또 노조를 거기에 집어넣어야 잘 돌아갈 수 있다. 이를테면 민주노총 위원장을 만나 “정부의 프로그램에 들어와 달라. 원하는 바를 최대한 반영하겠다. 그 대신 비정규직을 받아라. 그러면 복지를 최대한 확충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유럽 역사에 다 그런 상호 양보의 과정이 있었다. 민주노총을 만나서 담판을 지으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안 하지 않나?

ⓒ 시사저널 최준필
혹시 내각에서 불러주면 참여할 의향이 있나?

나는 아침에 늦잠을 자서 일찍 못 일어난다. 누구 얘길 들으며 눈치 봐가며, 그러질 못한다. 그러면 재미가 없다. 그래서 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쓰고 싶은 것을 쓰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

조용필 노래 <어느 날 귀로에서>의 가사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

조용필씨는 외로운 사람이다. 밤이면 혼자 스튜디오에 있다. 밤 9시 넘어서 전화가 오면 틀림없이 조용필이다. 지난해 12월15일로 기억한다.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연구실에 혼자 있는데 “지금 뭐 해?” 하며 전화를 걸어왔다. “나 공부하는데”라고 하니 “알았어”라고 했다. 술 한잔하자는 말이다. 스튜디오가 서초동에 있다. 같이 술을 마시는데 낯선 멜로디 하나를 들려주더라. 그러면서 작사를 해달라고 했다. 내가 음악을 어떻게 알겠나. ‘작사는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었다. 대답이 없길래 ‘내가 뭘 알아야 쓸 것 아니냐’고 했더니 악보를 그려줬다. 악보를 봐도 알 수가 있나.

최근 펴낸 책과 관련이 있다고 들었다.

당시 원고를 막 끝낸 상태였다. 집에서 원고를 마지막으로 손질하며 조용필씨가 준 멜로디를 반복해 들었지만 감당이 안 됐다. 19집 앨범 녹음하러 출국한 조씨가 이 노래도 넣어야 한다며 재촉했다. 계속 들어보니까, 멜로디가 비장하다고 느껴졌고 현대적인 느낌도 있었다. 옛 노래에 익숙한 내게 좀 버거웠지만 어느 순간 번쩍 느낌이 왔다. 50대 인생 보고서를 정리하던 내 정서와 비장한 멜로디가 통한 순간이었다. 조씨가 준 악보에 맞춰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30분 만에 끝났다. 사실상 열흘 동안 머릿속에서 구상했던 것 같다. 바로 이메일을 보냈다. 그래 놓고는 잊고 있었다.

감정 이입이 쉽게 된다는 등 반응이 좋다.

내 가사를 안 써도 그만일 텐데, 조씨에게 아마추어의 가사를 받아줘 고맙다고 했다. 가사를 써보니 재밌었다. 다른 사람 것은 못 하겠고, 조씨랑은 많은 얘기를 했으니 그가 곡을 준다면 다시 써볼 수 있을 것 같다.

1991년 노래 <꿈>의 주인공이 2013년에 부르는 노래로 설정한 것 같다.

작사를 하려니 구체적으로 상황이 설정돼야 할 것 같았다. 멜로디가 <추억 속의 재회>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꿈>에 나오는 화자와 재회하는 설정을 했다. 그런데 그게 63세 조용필의 목소리로 터져나오니까 몹시 감동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책 몇 권 쓰는 것보다도 더 감동적이었다. 그 감동이 이 시대 중년들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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