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살기 정말 힘들다
  • 이규대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05.21 14:3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 ‘착한가격업소’ 18곳 조사…물가 안정 효과 없어

감색 바탕에 흰 글씨. ‘착한 가격’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오른편 노란 오각형 속에는 ‘모범’이라는 파란 글자가 있다. 주변 시세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서비스를 제공해 서민 경기 안정에 기여한다는 의미다.

전국 7000여 개의 가게 앞에는 이런 표찰이 붙어 있다. 지난해 6월부터 안전행정부(당시 행정안전부)가 ‘착한가격업소’ 정책을 시행한 결과다. ‘어려운 경제 여건에서도 저렴한 가격으로 영업하며 어려운 이웃과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업소’임을 정부가 인증한 것이다.

과거부터 시행해오던 물가 안정 모범업소 정책을 리모델링했다. 기존 2497개 업소 중 재심사를 통해 2301개를 재지정하는 한편 4831개 업소를 새로 선정했다. 그 결과 총 7132개로 늘어났다.

지정 업소의 수만 3배 이상 증가했다. 물가 안정을 통해 어려워진 서민 경제를 진정시키려는 정부의 뜻이 반영됐다. 그런데 1년여가 지난 지금, 착한가격업소 정책은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5월17일,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에 있는 한 착한가격업소 분식점. ⓒ 시사저널 이상민
18개 업소 중 5곳 가격 인상

서울 4개 자치구에서 착한가격업소 18개를 무작위로 선정해 취재해본 결과 시행 과정에서의 세부 설계와 사후 관리 면에서 취약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15년째 장사를 하는데 자영업 경기가 좋다는 말은 해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취재 과정에서 한 자영업자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만성적인 불경기 시대에 가격 인상 압력은 착한가격업소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18개 업소 중 5개 업소가 서비스 요금을 올렸다. 적게는 500원, 많게는 1000원씩이다. 전체 취재 대상 업소 중 약 28%에 해당한다.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의 한 식당업자는 “착한가격업소로 선정된 것 때문에 많이 고민했지만, 식재료비가 워낙 올라 가격을 인상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당초 정부가 착한가격업소를 선정한 배경에는 서민 물가 안정에 기여하는 업소를 널리 알려 이들의 ‘박리다매’식 매출 신장을 유도하려는 구상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업주들은 효과를 거의 체감할 수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광진구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이상건씨(44)는 “표찰을 보고 호기심에 가게를 찾는 손님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미한 수준이다. 착한가격업소로 선정된 이후에도 매상은 별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착한가격업소의 가격 변동에 대해서는 ‘주부 물가 모니터단’(각 자치구별 3명) 등을 통해 각 자치구에서 수시 점검한다. 안전행정부에서도 1년에 두 번 종합 점검을 한다. 가격 인상이 있으면 일단 가격 인하 지도를 하고, 이후에도 변동이 없으면 지정을 취소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난해 상반기에 15개소, 하반기에 70개소가 취소됐다”고 밝혔다.

가격을 올리지 않은 업주들 중에도 표정이 밝지 않은 이가 많았다. 날이 갈수록 장사가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서울 종로에 있는 음식점 ㅇ찌개의 업주는 “아직 가격을 올리지는 않고 있지만, 가게 운영이 정말 힘들다”고 말했다. 수년째 4500원으로 이용료를 동결한 광진구 ㅅ목욕탕 주인도 “착한가격업소로 선정된 것을 감안하다 보니 값을 올리는 데 신중해진다. 하지만 갈수록 목욕탕 운영이 빠듯하다”고 말했다.

당초 안전행정부는 소비자들이 착한가격업소를 많이 이용하도록 홍보를 강화하는 한편, 이용 활성화 운동을 적극 전개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다수의 업주가 가격 인상 압력에 시달리는 데서 알 수 있듯, 현장에서 체감하는 혜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상황이 괜찮다는 식당을 찾아가봤다. 서대문구의 한 재래시장 안에 있는 ㄷ수산이다. 그런데 ‘착한 가격’ 메뉴인 된장찌개와 냉면은 이곳의 주 메뉴가 아니었다. 수만 원대의 해산물 요리가 ㄷ수산의 주 수입원이다.

착한 가격 메뉴는 시장의 이웃들에게 봉사하는 차원에서 싸게 제공하는 것이다. 사장 송동호씨(53)는 “도시 번화가에 음식값이 시세보다 훨씬 싼 식당이 있다면 물가 안정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원래 물가가 낮은 수준인 전통시장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시장 내 다른 식당들도 찌개류 백반을 5000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서울 번화가 착한가격업소의 물가 안정 효과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땅값 높고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강남구 역삼동 일대로 향했다. 그런데 이곳의 착한가격업소들은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대형 빌딩이나 오피스텔에 소규모 점포 형태로 입점해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건물 내에서 ‘구내식당’ 역할을 하면서 고정 수요를 확보한 덕에 싼 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주상복합 오피스텔 지하의 한 식당업자는 “평일에는 회사원들이, 주말에는 오피스텔 주민들이 주 고객이라 박리다매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특수한 형태를 두고 시장의 물가 안정에 앞장서는 ‘모범’적인 모델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가격이 저렴한 일부 업소를 행정 당국이 관리하는 방식의 물가 안정책은 1990년대 초반에 등장했다. 상수도 요금 감면, 쓰레기봉투 제공 등의 혜택을 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정부는 1990년대 초의 정책 발상을 확대 적용해 2010년대의 서민 경제난을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와 지금은 근본적으로 상황이 다르다는 지적이 나온다. 1990년대 초는 한국 경제가 고속 성장을 구가하던 때다. 성장에 뒤따르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것이 중요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저성장 기조에 돌입한 현재는 구매력이 떨어진 가계의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물가 안정이 필요하다.

‘1990년대식 발상’의 한계

한국은행 경제통계국이 1월 발표한 ‘가계 소득 현황 및 시사점’에 따르면, 최근 20년간 자영업 영업이익 증가율은 10.2%에서 1.5%로 급락했다. 반면 법인기업의 영업이익 증가율은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10% 수준을 유지했다. IMF 체제 이후 자영업과 법인기업의 영업이익 증가율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은 ‘도소매·음식·숙박업 등 전통 서비스업에서의 경쟁이 심화되고, 대형화·전문화가 진행되면서 자영업자 1인당 영업이익 증가세가 크게 둔화됐다’고 분석했다.

해당 보고서를 작성한 한국은행 경제통계국 김영태 팀장과 박진호 조사역은 ‘가계 소득 둔화를 막을 대책 마련’을 강조했다. 한국 경제가 ‘소득 확대-소비 증가-고용 창출-인적 자본 축적-성장 지속-소득 확대’의 선순환에 의한 내수·수출 균형 성장 모형으로 전환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체 취업자 중에서 자영업자와 무급 가족 종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28.2%(2011년 기준)에 달한다. 결국 자영업자를 쥐어짜기보다는 이들의 실질 소득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지금 정부의 정책은 시대의 흐름을 역주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