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정리 잘해 빠르게 컸다
  • 김회권 기자 (judge003@sisapress.com)
  • 승인 2013.05.2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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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 탄 블로거 미디어 ‘허핑턴포스트’ 일본 진출

“현재 일본은 역사상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아베노믹스를 통해 일본을 재건하자는 이때, 일본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망라하고 싶다. 지금의 일본이 안고 있는 인구 감소와 여성의 역할, 자살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보도하고 목소리를 모으는 플랫폼 역할을 하는 ‘허핑턴포스트’가 되었으면 한다.”

오늘날 인터넷 미디어의 승자를 꼽으라면 첫손에 꼽힐 사람은 환갑이 넘은 백인 여성, 아리아나 허핑턴일 것이다. 그는 워싱턴포스트·USA투데이·뉴욕타임스 등 기성 언론 강자들을 인터넷에서 압도하는 허핑턴포스트의 창업자다. 그런 허핑턴 여사가 일본 도쿄에 등장했다. 5월7일 허핑턴포스트가 아사히신문과 손잡고 일본에서 서비스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허핑턴포스트 미디어그룹이 51%, 아사히신문사가 49%를 출자했다.

허핑턴포스트는 2011년 2월, 타임워너의 인터넷 사업 부문 자회사인 AOL에 3억1500만 달러에 매각된 뒤 글로벌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을 거점으로 캐나다·영국·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판을 서비스하고 있고, 아시아의 첫 출발지로 일본을 선택했다.

일본에서도 미국처럼 많은 독자를 모을 수 있을까. 성공 여부를 지금의 시점에서 판단하기는 어렵다. 일본에서는 포털 사이트인 ‘야후’의 뉴스 섹션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뒤를 주요 일간지 사이트가 따르고 있는 모양새다. 포털과 기성 언론의 공고한 벽을 허핑턴포스트가 허물지 않고서는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5월7일 허핑턴포스트 일본판 런칭 기자회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마츠우라 시게키 일본판 편집장(왼쪽)과 아리아나 허핑턴 ‘허핑턴포스트’ 창업자(가운데). ⓒ AFP연합
허핑턴 바이러스의 확산

게다가 일본만의 독특함이 하나 더 있다. 익명 커뮤니티 사이트인 ‘2ch’의 지지를 얻지 못한 사이트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그들만의 공식이다. 허핑턴포스트 일본판 편집장을 맡고 있는 마츠우라 시게키는 “일본은 지금까지 인터넷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허핑턴포스트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의견이 퇴출되는 구조에서 희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허핑턴포스트 미국판 사이트에는 ‘JuLiA’라고 부르는 인공 지능 분석 엔진과 사람의 모니터링이 악성 댓글을 걸러낸다. 게시된 의견에 비방이 심하거나 문제가 있을 경우 댓글을 달지 못하는 시스템이다. 마츠우라 편집장이 말하는 다수의 부정적 의견을 생산해내는 곳이 바로 2ch이다. 그동안 2ch과 대립각을 세운 사이트들은 악성 댓글로 포화를 맞으며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런 우려 속에 첫발을 뗀 허핑턴포스트가 일본 미디어업계에 던진 화두는 매섭다. ‘기사 생산’에 집착했던 미디어들이 ‘기사 정리’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정리 모델의 탄생지는 미국이다. 그리고 그 모태가 허핑턴포스트다. 2005년 초기 투자금 100만 달러로 시작한 진보 성향의 블로그 미디어(실제로는 뉴스 정리 사이트에 불과했다)는 여러 기사들을 잘 정리한 덕분에 원 기사를 게재한 사이트보다 방문자 수가 늘어났다. 뉴욕타임스 등 기라성 같은 언론 사이트보다 페이지뷰가 많아진 것은 2011년의 일이다.

허핑턴포스트의 성공 이후 ‘정리’에 나선 매체는 늘어났다. 소셜 사이트 버즈피드(buzzfeed)가 대표적이다. 사용자가 올리는 뉴스 그리고 버즈피드와 제휴한 매체의 기사가 주요 콘텐츠로 정리돼 노출된다. ‘미국을 가장 빨리 읽을 수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더 데일리 비스트’도 정리계의 강자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기사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시장이 뜨겁게 달궈졌다.

퓰리쳐상 수상으로 저널리즘 명성

허핑턴포스트 역시 기존 매체의 뉴스를 빠르게 정리하면서 성장했다. 허핑턴포스트의 성장에는 세 가지가 뒷받침됐다. 하나는 저비용 뉴스 구조다. 허핑턴포스트 편집부의 많은 에디터는 사무실 테이블에서 모니터를 응시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이들은 구글의 인기 검색어를 항상 체크하며 그에 어울리는 기사를 재가공하거나 퍼온다. 연예인의 노출 사진, 메이저리그에서 펼쳐지는 멋진 다이빙 캐치 동영상 등 다른 사이트에서 사람들이 구미를 당길 만한 재료를 모으거나 맛있게 배치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수많은 블로거가 무료로 제공하는 뉴스도 저비용 뉴스 구조를 굳건하게 뒷받침했다.

온갖 뉴스가 집합돼 있는 허핑턴포스트의 뉴스면을 두고 뉴욕타임스의 편집국장을 지낸 빌 켈러는 ‘집합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그는 “유명인의 가십, 귀여운 고양이 영상, 원고료 없는 블로그 기사와 다른 매체의 기사를 모았고 여기에 자유주의의 맛을 더하면서 웹사이트에 수백만 명을 끌어모았다”고 꼬집었다.

여기에 힘을 더해주는 것이 그들만의 ‘검색엔진 최적화(SEO)’다. 구글 검색 결과의 상위에 자신들의 콘텐츠가 표시될 수 있도록 웹사이트 내용을 편집하거나 알고리즘에 맞게끔 재가공했다. 저비용 뉴스 구조와 SEO를 통해 허핑턴포스트는 인터넷에서 급부상하는 사이트가 됐다.

링크와 동영상 이미지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등 기사를 좀 더 맛깔나게 전달하고 독자들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콘텐츠 관리 시스템(CMS)’은 허핑턴포스트의 강력한 무기였다. 허핑턴포스트의 CMS는 다른 어떤 매체의 것보다 앞섰다. 허핑턴포스트가 주목받기 시작했던 2010년 당시 이미 미국뿐만 아니라 인도, 필리핀, 우크라이나, 칠레, 베트남 등에 퍼져 있는 프로그래머 30여 명이 하루 24시간, 주 7일 동안 쉬지 않고 교대로 개발을 진행했다.

매번 진화하는 CMS는 편집자들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늘어나면서 ‘어떻게 해야 뉴스를 더 재미있게 내보낼까’에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멀티미디어를 이용해 콘텐츠를 가공하고 편집국 기자들이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해준 결과물들이 나간 후 실시간으로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인기 있는 콘텐츠와 그렇지 못한 콘텐츠를 가려낼 수 있는 내공이 편집국에 쌓였다.

물론 아리아나 허핑턴은 허핑턴포스트를 ‘정리 매체’로 비하하는 시각에 대해 매번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기자로서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언론관은 2011년 타임워너 자회사인 미국 포털 사이트 AOL이 허핑턴포스트를 3억1500만 달러에 인수한 뒤부터 현실로 조금씩 증명됐다. 허핑턴포스트는 합병 이후 새로운 기자를 채용하면서 편집국 인원을 400명 선으로 확충했다. 자체 인원이 늘어나면서 블로거의 글이나 다른 매체의 기사를 정리하는 콘텐츠 외에 편집국 기자가 작성한 기사, 즉 독자적인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동안 고수했던 저비용 뉴스 구조가 고비용 뉴스 구조로 탈바꿈했다.

그 후 어떤 결과물을 얻었을까. 2012년 4월17일 언론의 노벨상 격인 퓰리처상을 주관하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 언론대학원은 허핑턴포스트의 데이비드 우드 기자를 국내 보도 부문 수상자로 선정했다. 허핑턴포스트가 창간 7년 만에 저널리즘 분야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을 수상한 것이다. 수상작은 10부작 연재 기획인 ‘전장을 넘어(Beyond the Battlefield)’. 우드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장애인이 된 상이용사와 가족들이 겪는 부적응 문제에 관해 생생한 에피소드를 전했다. 스피드 우선의 속보성 기사가 아닌, 8개월에 걸쳐 진행된 장기 연재였다.

AOL은 2011년 2월7일 허핑턴포스트를 3억1500만 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에 사들였다. ⓒ AP연합
살아남기 위해 파트너 된 아사히신문

우드는 1977년 아프리카 게릴라 전쟁 취재를 위해 <타임>의 나이로비 지국장으로 취임한 이후 세계 각지의 분쟁을 취재했던 군사 전문 기자다. 블로거도 아니고 신문에 기고하는 프리랜서도 아니었다. 허핑턴포스트 소속의 정규직 기자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 볼티모어 선, 폴리틱스 데일리(AOL의 정치 뉴스 사이트)를 거쳐 2011년 상반기에 입사했다. 퓰리처상은 고비용 뉴스 구조로 전환한 허핑턴포스트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인터넷에 흐르는 뉴스는 공짜’라는 인식이 상식이 된 지금, 인터넷 미디어가 수익을 얻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동시에 탐사보도와 같은 질 높은 기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오랜 투자와 시간, 우수한 기자가 필요하다. 수익은 적은데 비용만 많이 드는 형태로 인터넷 미디어가 운영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허핑턴포스트는 보란 듯이 성공해냈다.

일본의 마츠우라 시게키 편집장이 이끄는 허핑턴포스트 일본판도 미국판의 행적을 따르고자 한다. 그는 “일본에서도 기본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 이야기가 중심이 되겠지만 엔터테인먼트도 중요하게 취급할 것이다. 지금은 취재기자가 1명이지만 늘리고 싶다”고 말했다. 초기 필진에는 미국처럼 유명 블로거가 가세했다. 라이브 도어의 전 사장인 호리에 타카후미 등 80여 명의 유명 블로거를 섭외했고 아베 신조 총리도 글을 싣겠다고 했다. 인용이나 링크를 사용할 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이미 유력 언론들에게 인사까지 다녀왔다.

일본에서 새로운 주목거리로 떠오른 허핑턴포스트도 그렇지만, 유력 매체인 아사히신문이 왜 파트너로 나섰는지도 상당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지근거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터넷 미디어를 지켜볼 요량이다. 허핑턴포스트 재팬 사장을 동시에 맡고 있는 니시무라 요이치 아사히신문 디지털사업본부장은 “아사히신문에서 허핑턴포스트 기사에 간섭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건 신뢰도 상승을 돕는 것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동안 유료화 정책을 이끌며 아사히신문의 디지털 사업을 이끈 오니시 히로미 이사는 회사 요구로 올여름부터 1년간 MIT 미디어랩에서 연구 활동을 하기 위해 떠난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오니시 이사가 미국으로 떠날 때쯤인 6월, 아사히신문 내부에 별도의 ‘미디어랩’을 설치할 계획인데, 이곳에서는 미래에 펼쳐질 디지털 멀티미디어에 관해 연구한다. 허핑턴포스트와 손잡은 뒤 보이는 행보로 미루어보면 아사히신문은 인터넷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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