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발 여성’이라야 납치도 관심 끈다?
  • 김원식│뉴욕 통신원 ()
  • 승인 2013.05.2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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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세 여성 감금 사건 보도에서 드러난 미국의 인종 장벽

지금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공포 이야기는 10년 전 사라졌던 세 여성의 재등장 사건이다. 지나 디지저스(23), 어맨다 베리(27), 미셸 나이트(32)는 2003~04년 차례로 실종된 여성들이다. 특히 실종 당시 디지저스와 베리는 미성년자였다. 이들이 한 명씩 사라질 때마다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를 펼쳤다. 그러나 얻은 결과는 없었고, 매번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들이 다시 등장한 것은 지난 5월7일이다. 미국 오하이오 주 북부 클리블랜드의 한 마을 가옥에서 실종됐던 여성 3명이 발견됐다. 충격적인 것은 10년 동안 사라졌던 여성들이 발견된 장소가 바로 한 이웃의 집이라는 점이다. 부실 수사 의혹이 제기되었고 경찰이 난감해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페드로 카스트로(54)와 그의 동생인 아리엘(52), 오닐(50) 3형제는 여성들을 감금했고 성적 학대와 폭력을 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10년 전 실종되었다 발견된 지나 디지저스의 아버지와 고모가 언론의 물음에 답하고 있다.ⓒAP 연합왼쪽 사진은 실종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간 세 여성 피해자들. ⓒEPA 연합
 

18세 미만 여성 실종 한 해 26만여 건

미국은 ‘실종의 나라’다. 연방수사국(FBI)이 올해 1월1일 발표한 공식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2년 한 해 동안 미국 전역에서 실종 신고가 된 사람은 66만1593명에 달한다. 2011년 67만8860명보다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많다. 미국 전역에서 1분당 한 명 이상이 실종돼 경찰에 정식으로 접수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상당수는 집으로 돌아오거나 소재 확인이 되면서 실종자 명부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아직도 행방을 알 수 없어 실종으로 공식 처리된 사람만도 지난해 8만7217명에 달하는 것으로 FBI 통계에 나와 있다.

이들 가운데 21세 미만이 52만9828명인데 그중 미성년자에 해당하는 18세 미만은 47만6372명이다. 미국에서 실종되는 대다수의 사람이 미성년자인 셈이다. 특히 18세 미만 여성이 26만4859명으로 실종자 중 가장 많다. 미국 사회의 이면에 ‘미성년 여성의 실종 문제’라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전국 방송부터 지역 케이블까지, 미국에서 어린이나 젊은 여성이 실종된 사건을 둘러싼 보도 경쟁은 뜨겁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젊은 금발의 백인 여성’이 실종됐을 경우다. 때로는 수많은 언론사 제보가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대다수 사건의 경우, 경쟁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로 사건 해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특히 언론은 흑인이나 소수 인종의 실종보다 금발의 백인 여성이 실종됐을 경우 보도에 열을 올린다. ‘백인 여성 실종 신드롬(missing white woman syndrome)’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번에 발견된 실종자는 모두 백인이었고 그중 2명은 금발이다.

컬럼비아 대학 저널리즘 대학원의 크리스탈 주크 교수는 “대개의 사람들이 남성보다는 여성 피해자에 대해 동정심이 강하며 특히 순수하고 처녀인 백인 여성일 경우 관심을 더 갖는 세태를 언론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색 인종에 대한 편견을 지목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대개 기자들은 남성이나 소수 인종이 실종됐을 때 어떤 범죄와 연관됐을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어 크게 보도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한 케이블 방송에 근무하는 언론인은 “우리는 당연히 실종 기사를 선호한다. 특히 젊고 백인이며 매력적인 여성의 실종 사건 보도는 시청률을 상승시킨다는 사실이 여러 조사에서 확인된다. 광고주들의 돈을 긁어모을 수 있는 기회”라고 말했다.

빨리 끓었다 빨리 식는 선정적 보도

2005년 카리브 해 아루바에서 일어난 미국 앨라배마 출신의 여고생 나탈리 할로웨이의 실종 사건이나, 결혼을 앞두고 도망치기 위해 납치당한 것처럼 연극을 벌였던 예비신부 제니퍼 윌뱅크스 사례 등 전국적으로 관심을 모았던 실종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이 모두 백인 여성이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실종된 태미카 휴스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했다. 당시 24세인 그는 집에서 키우던 개만 남겨놓고 사라졌다. 휴스턴의 가까운 친척 중 한 명인 한 홍보 전문가는 3주 동안 방송과 신문 등에 계속 연락했지만, 전국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다. 휴스턴은 흑인이었다.

이번도 별반 다르지 않다. 클리블랜드에서 실종된 지 10여 년 만에 세 여성이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의 모든 언론이 벌 떼처럼 이 지역에 모여들었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우연히 한 여성의 비명을 듣고 집 대문을 발로 차서 이 여성을 구한 흑인 남성은 연일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미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언론이 앞다퉈 전하는 내용은 선정적이고 충격적이다. 해당 여성 피해자들이 쇠사슬과 테이프에 결박된 채 여섯 차례 이상이나 임신을 당했고, 영양실조 상태에서 온갖 폭력을 당했다고 전하며 감금된 동안 벌어졌던 끔찍한 내용도 여과 없이 전파를 타고 있다. 심지어 구출 당시 세 명의 여성 중 두 명은 지하에 있으면서 경찰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두고 이들이 인질범에게 동조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나타냈을 것이라는 추측 보도까지 나왔다.

빨리 끓으면 빨리 식는 법이라고 했다.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갖가지 아이템을 기획하던 언론들은 일주일이 지나자 클리블랜드 실종 사건을 잊기 시작했고 더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2009년 이들 세 여성과 비슷한 사례로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여성이 있다. 캘리포니아에서 11세 때 납치돼 18년간 감금당한 제이시 두가드(33)가 주인공이다. 필립과 낸시 가리도 부부에 의해 납치된 두가드는 필립에게 성폭행당해 두 딸을 낳은 바 있다. “14세 때 혼자서 첫 아이를 낳은 기억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했던 그가 이번 사건을 접하고 성명을 내놓았다. 그는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세상과 다시 소통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감금 생활에서 구출된 후 <도둑맞은 인생(A Stolen Life)>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감금 생활에 관한 책을 펴내기도 한 두가드는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을 향해 “인간의 정신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회복력이 강하다. 이번 사건은 우리가 절대로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다시금 알려준다”고 말했다. 과도한 관심도 문제이지만 무관심은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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