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스님이 되고 피눈물 흘리며 홀로 애 키워”
  • 김진령 기자·안성찬 골프 전문기자 ()
  • 승인 2013.05.2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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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PGA 첫 우승한 배상문 선수 모자 단독 인터뷰

미국 텍사스 주 어빙의 골프장에 있던 아들(배상문·27)은 3라운드를 마치고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기도를 하는 엄마(시옥희·57)에게 카카오톡을 날렸다.

“내 잘 치제?”

“그래, 세계 최고다!”

아들은 엄마에게 큰소리를 쳤다. “우승은 딱 정해져 있다. 우주의 기운이 내한테 다 오고 있다. 바람 쥑이게 부네. 내 꺼다, 내 꺼. 바람불마 내 꺼지. 우승은 내 끼다.”

몰래 놀러 나가서 엄마 속을 뒤집어놓기도 했지만 절대 휴대전화는 꺼놓지 않는, 귀가를 독촉하는 엄마 전화를 피하지 않는, ‘속없는 아들’은 이렇게 엄마를 쥐락펴락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5월20일(한국 시각) 배상문은 미국 PGA 투어에서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골프장에서도 아들에게 큰소리로 야단을 치고 뺨을 때렸다는 시옥희씨는 얼핏 극성맞은 골프맘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연이 깊다. ‘배상문의 성공기’는 싱글맘으로 아들의 개화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엄마의 도전기’이기도 하다. “홀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피눈물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죽으려고 아파트 16층까지 올라갔다가 애 때문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시옥희)

HP 바이런 넬슨 클래식에서 우승한 배상문(캘러웨이)을 보면 ‘있는 집’ 자식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두 모자의 지난 세월은 순탄치 않았다.

시옥희씨는 아들의 성공과 관련해 힘들게 살았던 지난날의 일부를 털어놓았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실감난다.

한국에서 싱글맘으로 살기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고단한 일이다. 시씨는 대구에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배상문을 낳았다. 밤 12시에 병원을 찾았고 다음 날 아들을 순산했다. 음력으로 1986년 5월15일(양력 6월21일)이다. 이른바 아빠라는 그 남자는 아이 낳고 6개월이 지나서 말없이 집을 나갔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11개월이 지나서 아이의 할아버지가 당신네가 키우겠다고 소송을 걸어왔다. 재판에서 이겼다.

배상문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아버지 얼굴을 보았다. 시옥희씨가 우연히 길을 가다가 만난 것이다. 어린 상문에게는 남자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배상문은 엄마의 귀에 대고 “아빠지?”라고 물었다. 핏줄은 못 속이나 보다. 이전까지 시씨는 아들에게 줄곧 “아빠는 죽었다”고 말했던 것. 그 남자는 또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한참 뒤에 그가 스님이 됐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철부지 20대 중반 시절에 뭘 알겠나. 산 입에 거미줄 치랴 싶어 일단 친척의 도움을 받으며 아이를 키웠다.”

ⓒ 시사저널 전영기

여섯 살 때 귀인 만나 골프 입문

귀인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났다. 배상문이 여섯 살 때다. 일본 나고야에 있는 이모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곳에서 사찰을 운영하는 분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하소연을 넋두리처럼 늘어놓았다. 그때가 서른 살, 인생이 이렇게 박복할 수가 있을까 하는 한탄이었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선뜻 생활비를 지원하겠다는 분이 있었다. 당시 71세 노인이셨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셨다. 이름은 모르고 진주 하씨였다. 정말 그분 도움을 받지 못했으면 지금의 나나 상문이는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이후 시씨는 10년간 그분의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골프도 배웠다. 연습장에 상문이를 처음 데려간 것은 여섯 살 때. 배상문은 1년 뒤에 클럽을 처음 잡았다.

“사실은 야구를 하고 싶어 했다. 지금도 야구를 곧잘 한다. 산만한 성격상 골프보다는 야구를 하는 것이 맞았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선수 출신인 유백만 프로에게 배상문을 맡겼다. 대구의 골프장 문턱이 너무 높아 서울로 이사했다. 배상문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지인 소개로 얼굴도 보지 않고 재혼을 하게 됐다. 사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람이었다. 결혼식을 한 것은 처음이다. 1998년 일이다. 그러나 4개월도 안 돼 파경을 맞았다. 속아서 한 결혼이었다. 남자는 위자료를 내놓으라고 소송까지 걸어왔다. 법원은 시씨의 손을 들어줬고, 1000만원의 위자료를 받았다.

“사람에게 배신당하니 더 살아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시씨는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살았는데 아파트 16층으로 올라갔다. 죽으러. 그런데 실패했다. 사람 목숨보다 모진 것이 없다고 했던가. “그때 결심했다. 이제 내 인생은 없다고, 오로지 아들을 위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힘이 솟았다.”

대구로 내려갔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배상문은 다시 클럽을 잡았다. 이때 은인이던 분이 시씨에게 잘 살아보라며 3억원을 대줬고, 미용실을 차려줬다. 그러나 1년 만에 미용실이 망했고, 수중에 있던 2억원이 날아갔다.

배상문은 중2 때 우승을 3번이나 했는데 전국체전 대구 대표로 뽑아주지 않자 시씨는 경기도 용인 프라자골프장 인근으로 집을 옮겼다. ‘맹모삼천지교’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반지 등 귀금속을 모두 팔아버린 것은 배상문이 미국 프로골프 2부 투어(정규 프로 자격 획득에 실패한 선수들이 참가하는 대회)를 뛸 때다. “돈이 딱 떨어졌다. 어떻게든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데 수중에 무일푼이니 별 수 있나. 갖고 있던 것을 모두 내다 팔았다.”

프로가 되면 뭔가 변화가 올 줄 알았다. 하지만 2부 투어는 상금도 적은 데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회에 출전해야 하기 때문에 경비가 많이 들었다. 지금처럼 캘러웨이 스폰서가 있었던 때도 아니었다. 둘이서 함께 움직이면서 먹고 자고, 차량 유지에다가 클럽 등을 모두 사서 써야 하고, 그린피도 장난이 아니었다.

“뒤돌아보면 무슨 깡으로 아이에게 골프를 시켰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야구를 시켰더라면 더 힘들어 중도에 포기했을지 모르지만….”

배상문은 운동 신경이 남다르다. 일곱 살 때 자전거를 배웠다. 한 번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낭떠러지를 만났다. 순간적으로 뛰어내려 자전거만 절벽으로 떨어진 사건이 있었다. 장타를 내려면 순발력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아마도 배상문의 장타력은 이런 순발력에서 나오지 않나 싶다. 배상문은 엄마의 기원을 저버리지 않았다. 2부 투어에서 톱10에 6회 들었고, 정규 투어 시드전에서 6위에 올랐다. 배상문은 2006년 에머슨퍼시픽오픈에서 첫 승리를 따냈다. 1년 뒤 엄마가 캐디로 나선 SK텔레콤오픈에서 정상에 올랐다. 이때부터 메이저급 대회에서만 우승하는 신통한 아들로 바뀌었다. 2008년, 2009년 국내 상금왕에 오른 데 이어 일본에 진출해 2011년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상금왕을 차지했다. 이어 미국으로 무대를 옮겼다. 그리고 자력으로 시드권을 획득해 지난해부터 미국 무대에서 뛰고 있다. 캘러웨이가 스폰서로 나섰다. 43개 대회 출전 만에 극적으로 우승했다.

ⓒ 연합뉴스
도로에 골프채 내팽개치기도

이런 날이 오기까지 사연이 많다. 시씨는 배상문이 국내 투어를 돌 때까지는 직접 캐디백을 매고 나섰다. ‘산만하고 기분파인’ 아들을 다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상문이가) 와일드하고 하늘이 무너져도 지가 하고 싶은 대로 샷을 날린다. 생전 해보지도 않은 상상도 못 할 샷이 나오기도 하지만 상상도 못 한 실수도 나온다. 그래서 더 가슴을 졸인다. 얘가 기분파다. 상문이 문자를 보면 기가 차다. 그럴 때마다 ‘상문아, 타이거 우즈는 운이 좋아 하는 거 아니다. 그 하나하나에 몰두해서 정말 정말 열심히 하는 것이다. 멘탈이 좋은 것이지, 운이 좋은 게 아니다’라고 말해준다. 얘가 장거리 타는 좋은데 그린 위에만 올라가면…. 그래서 내가 ‘너는 그린에서만 침착하면 된다’고 항상 당부한다.”

배상문이 스물한 살 때 잠깐 한눈을 판 적이 있다. 성적이 신통치 않고 비거리가 확 줄었다. 엄마는 직감했고, 문제의 근원을 찾아냈다. 이 과정에서 대회 현장인 골프장에서 야단치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의 일이 아직도 골프팬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지만 그 사정을 사람들은 모른다. 시씨는 “그때 잡지 못했으면 크게 잘못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자가 차를 타고 가다가 ‘골프 때려치우라’고 도로에다가 클럽을 내팽개쳤을 정도다. 시씨는 “하지만 상문이는 내 앞에서 화를 내본 적이 없다. 착하고 여리다. 그래서 내가 더 억척을 부렸다. 잔소리도 많이 하고. 강하게 키우려고 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내가 뭐라고 안 해도 알아서 한다. 더는 걱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알아서 관리하고 잘한다. 이제 내가 뭐라고 잔소리할 단계도 아니고….”

시씨는 자기 대신 아들을 다잡아줄 수 있는 캐디를 옆에다 붙여주었다. 매트 미니스터가 올 시즌부터 배상문과 함께 투어를 돌고 있다. 시씨는 “5월에 들어왔을 때 상문이가 올해 성적이 안 좋은데 바꾸면 안 되느냐고 하기에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시씨가 보기에 매트는 판단력도 좋고, ‘기분파’ 배상문을 끌어주는 데 최상의 조합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우승으로 시씨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됐다.

요즘 배상문은 로스앤젤레스(LA)의 백옥자씨 집에서 살고 있다. ‘한국 투포환의 전설’이자 요즘 세대에는 농구선수 김계령의 엄마로 통하는 바로 그 백옥자씨다. 백옥자씨의 아들이 LA에서 골프 티칭프로를 하고 있는 김호연씨로, 배상문과는 형제처럼 친하다. 배상문은 지난해 LA에 집을 마련했었지만 투어가 비는 도중 LA까지 5~6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게 더 비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 집을 처분하고 호텔에서 호텔로 이어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 는 배상문의 겨ㄹ정이기도 하다. 시씨는 “이제 사생활은 상문이가 알아서 잘하고 있다”라며 만족해했다. 덧붙여 그는 “그 집 아들이 엄마 앞에서 꼼짝 못 할 정도의 호랑이 엄마”라며 웃었다.

몸이 아파 아들 투어에 따라가지 않는 시씨는 불공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 이번에 우승할 때도 해인사 말사에서 100일 기도를 하던 중이었다. 5월22일 경기도 성남 판교 집에 올라와 인터뷰에 응한 시씨를 축하하기 위해 골프맘이 몰려와 축하를 해줬다. 배구의 전설 조혜정씨도 있었다. 시씨는 다음 날 다시 해인사로 내려갔다. 아들을 위해 다시 기도가 시작된 것이다.

배상문 선수의 어린 시절 사진. ⓒ 시사저널 전영기

 


배상문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무엇보다 엄마와 한 우승 약속을 지켜서 기쁘다. 집에서 중계방송을 볼 줄 알았는데 절에서 불공을 드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찡했다.”

5월20일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 HP 바이런 넬슨 챔피언십(총 상금 670만 달러)에서 첫 승을 올린 배상문은 경기 후 “꿈꿔오던 일이 현실로 다가와 날아갈 것만 같고, 지금 이 순간 정말 행복하다”고 기쁨을 전했다.

그는 전반에 키건 브래들리(미국)에 4타 앞서가다가 후반 들어 더블 보기와 보기로 스코어를 잃으며 다 잡은 대어를 놓치는 듯했다. 하지만 17번 홀에서 결정적인 샷으로 미국에서 43개 대회 만에 우승컵을 안았다.

“내 플레이에만 집중했다. 후반에 잠깐 흔들리기도 했지만 아이언샷 감이 좋아 어느 정도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한 것보다 좋은 결과가 나왔다.”

‘아메리칸 드림’에 이제 한 발짝을 내디딘 배상문은 “지난 5월6일 대회 출전 차 미국으로 떠날 때 엄마에게 약속했다. ‘반드시 미국에서 성공하겠다, 우승하고 돌아가겠다’고. 홀로 나를 키우신 엄마에게 보답하는 길이 그것뿐이다”라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경기 내용에 대해 그는 “강풍으로 인해 제 성적만 유지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드라이버 거리를 조금 줄였는데 운 좋게도 바람 덕을 많이 봤다”고 말했다.

이번 우승으로 120만6000달러(약 13억5000만원)를 손에 쥔 배상문은 “솔직히 말해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며 “지난해 말부터 멘탈 트레이닝 교수와 마인드컨트롤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찾았다”고 두둑해진 배짱 비결을 공개했다.

배상문은 언제든지 우승할 수 있는 기본기를 지녔다. 한국에서도 메이저급 대회만 골라서 7회 우승하며 2008년, 2009년 상금왕에 올랐고, 2011년 일본에 진출해 일본 프로골프(JGTO) 투어에서 3회 우승하며 상금왕을 차지했을 정도로 탄탄한 기량을 갖추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통할 수 있는 장타력을 갖고 있는 것이 강점이다.

“새로 만난 스윙 코치 덕분에 페이드샷이나 드로샷을 만족스럽게 날릴 수 있을 만큼 기술 샷을 구사할 수 있다. 이것이 이번 우승의 밑거름이 됐다. 내 기량이 몇 단계는 업그레이드된 것을 느낀다.”

배상문은 우승 상금 120만6000달러를 보태 시즌 상금 162만8794달러(약 18억2700만원)로 상금 랭킹 17위, 우승자에게 보너스 상금 1000만 달러가 주어지는 플레이오픈 출전권 진출을 위한 페덱스컵 포인트 500점을 챙겨 도합 769점으로 18위다. 세계 골프 랭킹도 106위에서 64위로 껑충 뛰었다.

“이제 그린에서 이기는 법을 배웠으니 더욱 노력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다.” 미국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멋진 문의 출현(Good Moon Rising)’이라고 그의 우승을 알렸다. 한 외신은 “배상문은 매력적인 스윙, 감탄할 만한 드라이버 거리, 좋은 스윙 템포를 겸비한 ‘물건’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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