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 상자’ 열렸지만 김 빠졌다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3.06.0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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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 피난처 명단 발표 ‘찻잔 속 태풍’…정치권 인사 포함 여부가 변수

예상 밖이다. 당초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 만큼 엄청난 파장이 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의외로 찻잔 속 태풍에 그치고 있다. 최소한 5월31일 현재까지는 그렇다. 인터넷 독립 언론 ‘뉴스타파’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조세 피난처 유령 회사 설립 리스트 공개 프로젝트’의 현재 성적표다.

당초 뉴스타파가 “조세 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와 쿡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이 245명이다. 아직 데이터의 일부만 확보했을 뿐, 245명이라는 것도 ‘빙산의 일각’이다”라고 밝힐 때만 해도 사태는 심상찮아 보였다. 뉴스타파는 이들 중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이 다수 포함돼 있다고 시사해왔다. 5월31일 현재까지 3차례 발표를 통해 실명이 공개된 이는 17명이다. 그러나 10대 재벌 총수 등 유력 대기업 일가나 정치인의 이름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당초 기대와 달리 우리 사회를 뒤흔들 만한 이른바 ‘거물’급이 눈에 띄지 않으면서 국민 관심도 서서히 식어가는 모양새다.

인터넷 독립 언론 ‘뉴스타파’가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이들의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 시사저널 a최준필
모든 정보를 뉴스타파가 독점하면서 명단 공개 속도가 더디고, 후속 취재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여기에 일부 보수 언론에서 뉴스타파에 대해 ‘좌파 성향’으로 색깔 칠하기에 나서며, 명단 내용 자체를 깎아내리고 있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명단에 포함된 기업들을 감싸주기에 급급한 기사까지 나올 정도다. 자연히 뉴스 비중 역시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의도적으로 비중을 축소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유력 언론사 사주도 명단에 포함돼 있다더라”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그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 사안을 외면하고 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조세 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고 해서 모두 범법 행위로 볼 수는 없다는 반박도 제기된다. 뉴스타파의 1, 2차 발표의 표적이 됐던 재계에서 특히 이 점을 적극 내세우고 있다. “기업들이 해외에서 자산을 취득하거나 지분을 취득할 경우 특수목적 법인 등이 필요한데, 이때 법인 설립 및 청산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해 조세 회피처를 이용하고 있으며, 이는 세금 탈루와 무관하다”는 것이 재계의 논리다.

재계가 나름의 논리로 반격을 준비하고 있는 반면 정치권은 초긴장 상태다. “해외 무역 등 기업 활동의 불가피한 측면”이라는 핑계가 가능한 기업인과 달리, 정치인의 경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최근 2년간 국세청의 해외 금융 계좌 신고에서 버진아일랜드는 접수되지 않았다. 비기업인이 이 지역에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 회사를 만들었다는 것은, 회사 계좌를 이용해 자금을 비밀스럽게 운영하겠다는 의도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비자금 등을 통해 조성된 자산을 은닉하기 위해 조세 피난처를 활용했을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다. 더구나 법인에 대한 비밀이 보장되는 조세 피난처의 특성상 일단 이곳으로 들어갔다 나온 돈은 ‘꼬리표 없는 돈’이 된다. ‘돈세탁’ 창구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창구 밝혀질까

이미 여의도에서는 몇몇 정치인의 이름이 돌고 있는 상황이다.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는 조세 피난처에 유령 회사를 세운 재벌 오너와 관련 인사들의 범법 행위 여부를 면밀히 따져 엄중히 처리해야 한다”면서 “관련자가 재벌 총수든 실세 정치인이든 아니면 전직 대통령이든 성역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들리는 얘기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실명을 거론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에둘러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실명이 거론되고 있는 정치인 중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먼저 눈에 띈다. 전 전 대통령의 추징금 공소시효가 올 10월 말로 다가오면서 국민적 공분이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뉴스타파측은 “(전 전 대통령의 해외 비자금은) 초미의 관심사다. 찾고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인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역시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다. 조세 피난처 명단에 노씨 성을 가진 인물이 포함돼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물론 확인되지 않는 사안이다.

검찰의 CJ그룹 해외 비자금 조성 의혹 수사와 맞물려 이명박(MB) 정부 실세들도 거론되고 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MB 측근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이 회장과 이 전 대통령이 나온 고려대 출신 공직자들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뉴스타파측은 “조세 피난처 명단에 CJ와 관련된 내용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정치권 인사 연루설이 나오고 있는 것은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7년 17대 대선 당시 버진아일랜드와 관련된 스캔들로 홍역을 치렀다. ‘BBK’ 사건이 그것이다. BBK투자자문의 모회사가 버진아일랜드에 등록돼 있었는데, 이 회사의 실소유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이 전 대통령이 설립한 온라인 금융회사 역시 버진아일랜드에 등록된 투자 회사에 거액을 투자한 바 있다. 때문에 이 전 대통령이 BBK 주가 조작 과정에 연루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 연합뉴스

전직 대통령과 아들도 연루된 전례 있어

야권도 이 문제에서 마냥 자유롭지만은 못하다. 2009년 박연차 게이트 당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남인 건호씨가 버진아일랜드에 창업투자회사를 설립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건은 이랬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은 자신의 홍콩 비자금 계좌에서 노 전 대통령 조카사위인 연철호씨가 대표로 있는 ‘타나도 인베스트먼트’에 500만 달러를 송금했다. 이 중 300만 달러가 건호씨가 설립한 ‘엘리쉬&파트너스’에 투자됐다. 두 회사 모두 버진아일랜드에 설립된 것이다. 당시 검찰은 “박연차 회장이 건넨 500만 달러 가운데 일부의 종착지가 건호씨”라면서 “노 전 대통령이 이를 몰랐을 리 없고, 이 돈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사건은 2009년 6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종결 처리됐다.

야권에서는 뉴스타파의 명단을 통해 건호씨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뉴스타파가 확보한 자료는 지난 1995년부터 2009년에 걸쳐 있기 때문에 건호씨의 이름이 나올 가능성도 일각에서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고위 관계자는 “뉴스타파의 1차 발표가 지난 5월22일에 있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추모식 바로 전날이었다. 이 때문에 뉴스타파의 명단에 건호씨의 이름이 포함됐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대선 패배로 친노가 또다시 ‘폐족’으로 전락한 마당에 건호씨 사건이 회자되는 것은 (친노에게) 치명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뉴스타파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페이퍼컴퍼니 설립자의 명단 정도인 듯한데, 이 때문에 더더욱 보수 진영이 활용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보수 언론이 마구잡이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조세 피난처 명단을 놓고 정치권에서 각종 의혹과 심지어 흑색선전까지 나오고 있는 이유는 그만큼 ‘찔리는’ 것이 많다는 얘기다. 현재까지는 찻잔 속의 태풍이지만, 일단 모든 키는 ‘뉴스타파’가 쥐고 있다.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그럴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키 어려운 실정이다.  

 

조세 피난처 명단 오른 사람 사법 처리는? 


인터넷 독립 언론 뉴스타파가 공개한 조세 피난처 페이퍼컴퍼니 설립자 245명이 세금 추징 및 사법 처리를 당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작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뉴스타파 자료에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이들의 명단만 있을 뿐, 구체적인 자금 운용과 규모·계좌 내역 등이 포함돼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현행 국제조세조정법에 따르면 차명 금융 계좌를 포함한 10억원 이상의 해외 금융 계좌는 의무적으로 신고해야 한다. 미신고 재산이 50억원을 초과하는 경우 2년 이하의 징역형 등 형사 처분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뉴스타파의 자료만으로는 이를 확인할 수 없다. 이유영 조세정의네트워크 동아시아챕터 대표는 “버진아일랜드 등 조세 피난처에서 법인을 설립할 때 필요한 문서는 종이 한두 장뿐이고, 자본금도 5만 달러면 된다. 이름도 공개할 필요가 없다. 변경된 내용을 업데이트해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뉴스타파가 공개한 자료에) 설립 자금의 출처나 주주 변경 등 핵심 정보가 없기 때문에 조직적 탈세 정황을 밝히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명단 속 인물들 대다수는 조세 피난처에 설립된 페이퍼컴퍼니의 지분을 소유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현행법상 주식 보유 실태는 의무 신고 대상 재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페이퍼컴퍼니 지분을 통해 배당금을 받는 방식을 사용했다면, 사실상 처벌할 수단이 없다. 이를 막기 위해 국회에서는 5월27일 ‘역외 탈세 방지를 위한 해외 재산 신고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해외 금융 계좌의 신고(국제조세조정법 제34조) 조항을 ‘해외 재산의 신고’로 바꿔 금융 계좌뿐만 아니라 회사 지분·부동산·선박·미술품 등의 고가 재산을 신고하도록 한 법안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세정 당국 


언론을 통해 조세 피난처를 활용한 역외 탈세 혐의가 불거지자 국세청을 비롯한 관세청, 금융감독원(금감원)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 세정·금융 당국이 이번 조사에 과연 얼마만큼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일고 있다. “여론에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조사에 착수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국세청은 5월29일 “법인 15곳, 개인 8명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구체적인 혐의까지 포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대기업에 대해 지속적으로 역외 탈세 조사를 하고 있다”며 뉴스타파가 발표한 명단과 별개로 역외 탈세를 추적해왔음을 강조했다.

국세청은 지난해 국정감사 때 “2012년 6월 현재 한국인이 쿡아일랜드에 설립한 기업은 한 곳도 없고, 버진아일랜드에 82개가 존재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뉴스타파가 발표한 “쿡아일랜드와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이 모두 245명”이라는 내용과 큰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해 홍헌호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은 “국세청이 국회에 제출한 기업 82개는 기업들이 해외 법인 설립 시 은행에 신고한 것을 취합한 수출입은행 자료다. 이것은 국세청이 자체 노력으로 자료를 확보한 건 거의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충격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국제적인 금융 정보 공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홍 소장은 “독일·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페인 등 유럽 주요 5개국은 지난 4월 탈세 방지를 위해 은행 계좌 정보를 상호 교환하기로 합의했다. 우리나라 역시 다른 나라 정부와 과세 공조를 강화하고, 조세 피난처와 조세 정보 교환 협정을 서둘러 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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