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시선으로 ‘이주 여성의 삶’ 품다
  • 허남웅│영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3.06.0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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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라띠마>로 ‘감독’ 꿈 이룬 유지태

유지태와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두어 번 만나본 적이 있다. 서울아트시네마라는 극장에서다. 주로 고전영화를 상영하는지라 정부 지원이나 관객 후원이 없으면 운영이 수월치 않은 곳이다.

그는 운영에 보태라며 적지 않은 돈을 꾸준히 기부했고, 내가 프로그래머로 근무하던 당시 행사와 관련해 섭외 요청을 할 때면 매번 흔쾌히 응했다. 상업영화의 최전선에서 스타의 지위를 누리면서도 자본의 논리를 좇지 않는 그의 모습이 아직까지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그런 유지태가 연출자로 데뷔했다. <마이 라띠마>라는 작품이다. 다소 생소해 보이는 제목은 극 중 이주 여성의 이름에서 가져왔다. 마이 라띠마(박지수)는 태국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아니 팔려(?) 온 처지다. 남편은 부인을 건사할 능력이 없고 도리어 시아주버니 되는 사람이 마이 라띠마에게 흑심을 품는다.

그녀는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갖은 수모를 이겨내지만 공장 사장이기도 한 시아주버니는 월급을 주지 않는다. 급기야 손찌검까지 이어지고 지나가던 수영(배수빈)이 이를 보다 못해 마이 라띠마를 구해보려 한다.

ⓒ 유무비 제공
2003년부터 단편영화 4편 연출

유지태가 <마이 라띠마>를 구상한 건 15년 전이다. 배우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연출에 대한 꿈을 키워온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이 라띠마> 이전 유지태 ‘감독’은 <자전거 소년>(2003년)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2005년) <나도 모르게>(2008년) <초대>(2009년)까지 모두 4편의 단편을 연출한 경력을 갖고 있다. 이 작품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성장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마이 라띠마>도 그렇다. 다만 처음 구상할 때는 이주 여성 대신 어촌 마을의 중학생이 주인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에 생각해뒀던 성장물의 성격이 변한 건 아니다. 유지태의 말을 들어보자. “소외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주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물론 잘 적응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만, 1년에 10명 안팎으로 이주민이 죽는 게 현실이다. 이를 알리고 싶었다.”

고백하자면, 내게는 ‘알린다’는 그의 표현이 ‘손 내밀겠다’와 동의어처럼 들렸다.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개인적인 경험과 중첩된 영향이 크다. 그래서 <마이 라띠마>를 보며 딱 유지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는 입버릇처럼 “자본의 논리에서 탈피한 의미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마이 라띠마>에는 한국 영화의 주변 풍경이었던 이주민, 그것도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주민 110만 시대라지만 <반두비> <로니를 찾아서>(이상 2009년, 두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이주 남성이다)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이주민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마이 라띠마>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기에 충분하다.

유지태가 맨 처음 이 영화 제목으로 ‘산세베리아’를 염두에 두고 있던 것도 한국 사회의 편견을 반영하기 위해서다. 천년란으로 불리는 산세베리아의 꽃말은 ‘관용’이다. 태국에 있는 가족을 위해 일한 데 대해 최소한의 대가도 허용되지 않은 마이 라띠마의 경우처럼 이주민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폐쇄적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고난을 받아들이면서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이 라띠마에게서 우리가 보게 되는 건 역설적으로 ‘관용’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마이 라띠마와 같이 소외받는 이들에게 건네야 하는 가장 필요한 덕목에 다름 아니다. 그걸 유지태는 영화로써 먼저 손을 내밀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유지태는 개인의 성격과 감독으로서 작품의 성향이 일치하는 드문 사례에 속한다. 다만 여기에는 어떤 전제가 필요하다. 감독의 진심과 영화의 만듦새가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마이 라띠마>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소외받는 이들의 현실을 강조하려다 보니 극 중 인물 구도는 극단적인 선과 악으로 분리돼 있고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장면이 필요 이상으로 많으며 그 결과, 영화가 전체적으로 들쑥날쑥한 인상을 준다.

감독 의지 충만하지만 극복할 점 많아

감독 생활을 병행할 유지태에게 이와 같은 쓴소리는 극복해야 할 성장통 같은 것이다. 그에게 <마이 라띠마>가 본격적인 감독의 길로 들어선 첫 번째 작품인 까닭에서다. 그래서일까. <마이 라띠마>는 딱 떨어지는 결말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만신창이가 된 마이 라띠마와 수영의 모습으로 막을 내리면서 어떻게 성장할지는 관객의 판단에 맡긴다. 이런 결말에 대해 유지태는 “성장영화는 열린 결말이 맞다고 본다”고 의도를 밝혔다.

그의 말에는 애정을 가지고 극 중 인물들을 바라보겠다는 의지가 줄임말처럼 들어 있다. 마이 라띠마와 수영이 바다를 마주보며 손을 잡은 모습을 응시하는 카메라에서는 이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감독의 진심이 여지없이 묻어난다.

아무리 이 사회가 험하고 거칠지라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지 않느냐며 메시지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장편 데뷔작을 발표한 감독 유지태에 대한 평가도 이와 비슷하게 내리고 싶다.

<마이 라띠마>는 감독으로서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 진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 성장할 유지태의 영화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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