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서점엔 책의 향기가 있다
  • 조현주 기자·문정빈 인턴기자 ()
  • 승인 2013.06.12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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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명물’ 책방들의 변신…부산에선 서점협동조합 만들어

2000년 일본에서 출간된 <천국의 책방>은 1년간 1000부도 팔리지 않아 절판 위기에 놓였다. 이때 일본 혼슈 이와테 현 모리오카 시에 위치한 ‘사와야 서점’의 직원 이토 기요히코가 이 책을 팔기 시작했는데, 입소문이 퍼져 베스트셀러가 됐다. 공저자들이 “이것은 우리 책이 아니라 이토 씨 책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른바 ‘서점발 베스트셀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86년에 발행된 도야마 시게히코가 쓴 <사고의 정리학>이 밀리언셀러에 오르고 최근까지 주목받고 있는 것 또한 ‘사와야 서점’ 덕분이다. 서점 직원인 마쓰모토 다이스케가 이 책을 읽고 받은 감동을 판매대 추천사로 올렸는데, 그 문구를 출판사인 ‘치쿠마쇼보’가 판촉물로 이용했다. 이내 <사고의 정리학>은 전국적인 붐을 일으켰다.

일본의 중소 서점과 그 서점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담은 책 <서점은 죽지 않는다>에 소개된 일화 가운데 일부다. 사와야 서점은 개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책방에 불과하지만 직원들이 추천 도서를 기획하기 위해 쏟는 열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 달에 90여 권을 읽는 이도 있다.

일본 서점인들의 열정은 개인적인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2004년 일본에는 서점 직원들이 직접 읽고 추천한 신간 도서 가운데 우수한 작품을 뽑아 발표하는 ‘서점 대상’ 제도가 도입됐다. 수상작을 발표할 때마다 수십만 부의 판매량을 기록할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하다. 최근 ‘사재기 베스트셀러’로 홍역을 치른 한국의 모습과는 대조되는 풍경이다.

“‘잘 팔리는 책’보다 ‘재미있는 책’ 팔자”

한국에도 ‘사와야 서점’에 뒤지지 않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서점이 있다. 바로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에 위치한 ‘홍익문고’다. 홍익문고의 신간·문학·수필·베스트셀러 등 모든 코너에 놓인 추천 도서는 서점에서 17년 동안 근무한 베테랑 직원의 눈과 손을 거친 것이다. 잘 팔리는 책보다 ‘진짜 재미있는 책’을 팔자는 것이 홍익문고 사람들의 신조다.

홍익문고 박세진 대표(45)의 얘기다. “워낙 역사가 깊다 보니 직원들의 근속 연수가 꽤 긴 편이다. 25년 동안 근무한 직원도 있다. 평균 근속 연수는 8년 정도 된다. 그렇다 보니 책을 보는 직원들의 안목도 남다르다. 이런 게 가장 차별화된 우리 서점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책만 파는 순수 서점. 홍익문고의 ‘단순’한 영업 방침도 눈길을 끈다. 이는 1960년 홍익문고가 서울 신촌에 처음 둥지를 튼 이후 한결같다. 박 대표는 “요즘 서점에서 책이 있어야 할 공간이 밀리고 문구·음반·먹을거리 등 다른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며 “홍익문고는 책을 보고 싶어서 오는 곳이어야 한다. 계속 순수하게 책만 파는 서점으로 운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54년 동안 ‘순수 서점’으로서의 명맥을 이어오면서 숱한 위기를 견뎌야 했다. 1960년대 말에는 신촌 일대에 지하철 공사를 하면서 매출이 크게 떨어져 폐점 위기에 몰렸다. 1970년대 말에는 건물주로부터 ‘서점 문을 닫으라’는 통보를 갑작스레 받기도 했다. 이 시기 박 대표의 부친 고 박인철씨는 신촌역 부근 부지(현재의 홍익문고가 있는 곳)를 매입해 다시 서점을 열었다.

위기는 이어졌다. 지난해 홍익문고는 재개발 구역에 포함돼 퇴출 직전에 놓였지만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결국 서울 서대문구청이 존치 결정을 내렸다. 지역 주민과 서점 사람들 모두가 놀라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이었다.


50년 넘게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켜온 홍익문고도 최근 조금씩 변하고 있다. ‘직원 외 출입 금지’ 구역이었던 홍익문고 건물의 5층은 현재 클래식 기타 연주회나 인디밴드 공연, 교양 강좌 등이 열리는 무대가 되거나 지역 주민들의 간담회, 독서 토론 모임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박 대표는 “지역민이 살린 서점인 만큼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는 향기 마케팅과 무료 선물 포장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고, 구매 금액에 따라 연극 티켓을 주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3대를 이어가는 100년 서점. 박 대표가 그리고 있는 홍익문고의 미래다. 그는 “홍익문고가 100년 서점으로 남게 해달라는 게 선친의 유지다. 하지만 내가 지금 서점을 지키고 있는 것은 사실 내 아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홍익문고는 중고 서점을 제외하고는 서울에서 가장 역사가 깊다. 우리나라에서 꼭 필요한 서점의 주인이라면 아이에게도 괜찮은 미래일 것 같다”고 밝혔다.

지역 ‘문화사랑방’ 구실

20년 전 홍익문고 같은 순수 서점은 전국에 5000여 개나 있었다. 그 수가 10년마다 반 토막 나 이제 1700여 개밖에 남지 않았다. 동네 서점 자체가 고사 상태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위기 타령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일까. 전국의 골목 구석구석을 지켜왔던 지역의 ‘명물 서점’들이 저마다 변신에 나섰다.

전북 김제시의 ‘삼화서점’은 1975년 문을 열었다. 4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책방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김제 지역에는 10곳 가까운 서점이 있었지만 거의 문을 닫고 지금은 동네 서점이라고는 딱 두 곳만 남아 있다. 삼화서점이 위기를 딛고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무료 독서실을 만들어서 운영하거나 경찰서 유치장 내 수감자들을 위한 교화문고를 설치하는 등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심리 상담 해주는 곳도

삼화서점은 올해 초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지역 서점 문화 활동 운영 지원 대상’으로 뽑힌 것을 계기로 지역의 ‘문화사랑방’이 됐다. 삼화서점은 그 일환으로 지난 5월25일 김제시립도서관과 함께 ‘<탁류>와 함께하는 채만식 문학기행’ 행사를 가졌다. 지난 2월에는 김용택 시인을 초청해 서점에서 시를 주제로 강연을 열기도 했다. 서점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한 것도 작은 변화 가운데 하나다.

삼화서점 정봉남 대표(67)는 “최근 문학기행을 떠났을 때는 참석자들 모두 동네 서점에서 이런 행사를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냈느냐며 높은 관심을 보여줬다”며 “요즘은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책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앞으로 누구나 책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이벤트를 마련할 예정”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이어서일까. 서점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 강원도 원주 우산동에 위치한 북소리서점도 재미있는 이벤트가 넘치는 서점으로 알려져 있다. 북소리서점은 5년 전부터 서점 내 일부 공간을 개조해 ‘북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2월부터는 이 공간을 장애인을 위한 바리스타 교육 활동 장소로 제공하고 있다.

서점 안에 설치한 ‘느리게 가는 우체통’도 책방을 찾는 이들의 관심을 끈다. 북소리를 찾는 손님들이 ‘느리게 가는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면 12월에 일괄 배송된다. 엽서는 북소리에 준비돼 있으며 배송비 또한 무료다.

북소리서점이 특별한 이유는 서점 대표가 자신의 독특한 경력을 살린 프로그램들을 지역민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송자 대표(50)는 “심리상담가 20년 경력을 살려 군부대를 찾아가 직접 상담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서점에서 어르신을 모시고 전문의와 함께 의료 상담을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황 대표는 “이런 아이디어를 내게 된 것은 북소리서점이 지역 주민을 위한 동네 서점으로 오래 남아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부산에 위치한 다사랑문고 또한 지역을 대표하는 명물이다. 1998년에 문을 연 다사랑문고는 서점을 찾는 손님들에게 서점 주인이 1년에 한 번씩 감사의 마음을 담은 손 편지를 전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사실 부산의 ‘문학도’라면 한 번쯤 다녀갔을 곳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다사랑문고는 서점 회원을 모아 문학관 투어에 나서는가 하면, 주민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서점에 모여 시·문학 동아리 활동을 하기도 한다. 회원 가운데 실제 문인으로 등단한 사람도 있다 보니 자연스레 문학 지망생들이 모이는 공간이 됐다.

다사랑문고 김일권 대표(48)는 “이런 활동들을 경제적 의미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겸연쩍어했다. 그는 “서점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런 쪽으로 물들게 되었다”며 “이런 활동들은 온라인 서점은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점협동조합, 지역 서점 네트워크 구축 발판

좀 더 조직적인 변화의 흐름도 포착되고 있다. 최근 동네 서점들이 뭉쳐 협동조합을 결성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부산에서는 32개 동네 서점이 뭉쳐 협동조합 결성에 나섰다. 지난해 12월 인가 신청을 한 이후 2월 초 법인 등기 신청을 마치고 출범했다. 부산서점협동조합은 서점협동조합으로서는 전국 1호다. 현재 대구, 울산, 대전에서도 서점협동조합이 출범 준비를 하고 있다.

서점협동조합 출범으로 전국 지역 서점들 간 네트워크가 구축될 예정이다. 다사랑문고 대표이기도 한 부산서점협동조합의 김일권 이사는 “지금은 협동조합을 꼭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며 “앞으로 각 지역 서점협동조합끼리 연합 조직을 꾸리게 되면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그는 “온라인 서점에 대항하려고 해도 동네 서점 혼자 힘으로는 자금력이나 데이터베이스(DB)에서 뒤처진다. 협동조합을 통해 어느 정도 맞설 힘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출판연구소의 ‘2012 전국 249개 시·군·구별 서점 전수조사’에 따르면 경북 울릉군·영양군 등 4개 군에는 서점이 한 곳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북 문경시와 전북 무주군, 충남 태안군 등 30곳은 서점이 단 한 곳뿐이다. 당장 책을 보고 싶어도 서점이 없어서 볼 수가 없는 ‘서점 멸종 지역’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분투하는 동네 서점’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들의 노력은 베스트셀러나 학습 참고서에 매달리는 대다수 서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책을 고른다는 것은 워낙 예민한 일이라 자기에게 맞는 책을 골라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럴 때 가장 가까이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점이다.”

‘왜 동네 서점이 필요할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홍익문고 박세진 대표의 답이다. 그의 말처럼 서점이란 그저 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좋은 책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서점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인터뷰 내내 입을 모아 강조한 말이 있다.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한 동네 서점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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