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량 회사 망쳤다” vs “경영권 탐낸다”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3.06.1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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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엘리베이터-쉰들러, 현대상선 지원 놓고 법적 공방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총수에 오른 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2003년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현대호를 이끌어온 현 회장은 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출발부터 험난했다.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 그룹 경영권을 놓고 다툰 이른바 ‘시숙의 난’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2006년에는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이 대주주인 현대중공업그룹이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상선 지분을 매입하면서 ‘시동생의 난’까지 불거졌다. 2010년에는 시아주버니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충돌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현대그룹이 보유한 상장사 중 하나인 현대엘리베이터가 삐걱대는 모습이다. 현대엘리베이터는 6월10일 유상 증자로 970억원을 확보해 자금 사정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2대 주주인 쉰들러홀딩아게(Schindler Holding AG)가 신주 발행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하는 등 유상 증자에 적극 반대하고 나서면서 당초 계획이 몇 달 지연됐다. 1심에선 기각됐지만 쉰들러가 항고를 제기해 법적 공방이 진행 중이다.

2007년 10월26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알프레드 쉰들러 회장이 에스컬레이터 사업에 대한 전략적 제휴를 강화하겠다고 밝힌 후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 2대 주주로 등장한 것은 2006년 5월이다. 현대그룹과 범(汎)현대가의 경영권 분쟁이 한창이던 시점이다. 쉰들러는 KCC 등 범현대가 지분 25.5%를 확보해 결과적으로 현대그룹의 경영권 방어에 도움을 줬다. 이후 지분을 35%까지 늘렸다.

외부적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해오던 사이가 틀어진 것은 2011년 말 무렵이다.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를 상대로 회계장부 열람 등사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때부터 쉰들러는 5건에 이르는 소송을 진행하며 현대엘리베이터 경영에 불만을 제기했다.

쉰들러가 가장 크게 문제 삼는 부분은 현대상선 주식과 연계된 파생상품 계약이다. 현대엘리베이터는 2006년부터 케이프포춘·넥스젠캐피탈·NH농협증권 등 재무적 투자자들이 현대상선 주식을 우호 지분으로 매입하는 대신 주가 하락에 따른 손실은 현대엘리베이터가 전액 보상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자금에 여유가 없는 현대그룹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내놓은 고육지책이었다.

현재 현대그룹은 ‘현정은 회장→현대글로벌→현대로지스틱스→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현대로지스틱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갖고 있다. 이 중 현대엘리베이터에서 현대상선으로 넘어가는 연결 고리가 약하다.

현대엘리베이터가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은 24.1%다. 현 회장 등 특수관계인 소유 주식까지 포함해도 27.6%에 불과하다. 현대중공업(15.2%)과 계열사인 현대삼호중공업(6.8%) 지분을 합하면 22%다. 여기에 현대차그룹의 현대건설 지분도 7.2% 된다. 현대그룹으로서는 어떤 방식이든 우호 지분을 확보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적대적 M&A 통해 한국 시장 안착 의도”

문제는 해운업이 침체에 빠지고 현대상선 실적이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불거져 나왔다. 현대상선은 지난해 9886억원에 이르는 순손실을 봤다. 덩달아 현대엘리베이터의 연결 당기순손실 규모도 2710억원에 이른다. 올해 1분기 현대상선의 주가가 급락하면서 현대엘리베이터가 책임져야 할 파생상품 평가 손실도 1912억원이나 된다. 부채 비율은 458.4%로 지난해 말 219.3%에서 두 배 넘게 뛰었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업계 내 수위라는 시장 지위와 주력 사업의 우수한 경쟁력에 기반을 둬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낼 수 있는 회사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회사가 지난해 말에 이어 올해도 유상 증자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결국 현대상선에 대한 지원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쉰들러측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현대엘리베이터 자금으로 현대상선을 지원하고 있다. 계열사에 부당 지원을 하면서 주주의 의견은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덩치 큰 현대상선이 실속 있는 현대엘리베이터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은 신용 평가에서도 일부 드러난다. NICE신용평가는 6월12일 현대엘리베이터의 신용등급을 ‘A’로 유지한 반면 등급 전망은 기존의 ‘안정적(Stable)’에서 ‘부정적(Negative)’으로 조정했다. NICE신용평가는 “2009년 이후 지속된 해운업 시황 침체에 따른 현대상선의 대규모 순손실의 영향으로 재무 구조가 저하된 가운데 이를 반영한 현대상선의 주가 급락으로 경영권 강화를 위해 다수의 재무적 투자자들과 체결한 파생 계약 관련 차액 정산 부담이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대그룹측은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 인수를 위해 의도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세계 엘리베이터 2위 업체인 쉰들러가 적대적 M&A(인수·합병)를 통해 한국 시장에 안착하려는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상선 지원과 관련해 “자회사를 지원하는 것은 정상적인 경영 활동의 일부다. 해운업계가 좋지 않아서 그렇지, 계속 손해만 본 것은 아니다. 우량 자회사니까 투자한 것”이라고 밝혔다. 쉰들러가 ‘적대적 M&A는 안 한다. 선량한 주주로서의 권리다’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승강기 사업 부문에 욕심을 보였다. 30년 동안 독자 기술을 개발해 올라온 회사를 헐값에 한입에 털어넣겠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지난해 국내 엘리베이터 시장 점유율은 현대엘리베이터가 42.1%로 부동의 1위를 차지했다. 오티스엘리베이터(16.6%), 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코리아(15.7%)가 뒤를 잇고 있다. 

 

남북 회담에 희비 엇갈린 현대그룹 


2013년 6월 현대그룹은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6월6일 북한이 남북 회담을 깜짝 제의하자 다음 날부터 현대상선 주가가 3거래일째 상승했다. 현대상선은 금강산 관광 사업 개발권자인 현대아산의 지분 66.2%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 주주다. 현대상선의 최대 주주인 현대엘리베이터 주가도 급등했다. 하지만 6월11일 남북 당국이 회담 수석대표 명단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해 대화가 무산됐다는 소식에 주가가 폭락했다. 현대상선 주가는 6월12일 2300원(14.74%) 내린 데 이어 6월13일에도 600원(4.51%) 떨어졌다.

남북 회담 분위기가 조성되자 현대그룹은 금강산 관광 사업을 재개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현정은 회장이 직접 현대아산 등 관련 계열사의 임직원들을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그룹은 범현대가에서 다른 그룹에 비해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대북 사업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시아버지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남편 고 정몽헌 회장은 대북 사업의 물꼬를 트고 사업을 현실화한 주역이다. 현 회장도 2008년 금강산 관광 사업이 중단되자 직접 북한을 방문해 생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하는 등 남북 간 민간 대화 창구로서 활약했다. 2011년에는 김 위원장의 장례식에 초대받아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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