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갖고 튀었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3.07.0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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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출귀몰 100억 위조수표 사기단

100억 위조수표 사기단은 진화된 신종 은행털이범들이다. 총이나 흉기를 들고 은행 창구에서 돈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진짜 수표를 위조해 금액을 부풀린 뒤 은행에서 돈을 빼내 유유히 사라졌다. 범행이 있은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경찰은 아직까지 잠적한 주범들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어떻게 은행에서 100억원을 빼냈고, 어디로 사라졌을까. 전대미문의 ‘100억 수표 사기 사건’ 전말을 추적했다.

진짜 수표로 액면가 100억원 위조

6월14일 대부업자 박 아무개씨(45)는 수원 정자동에 있는 KB국민은행을 찾아갔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액면가 100억원짜리 수표를 은행 창구에 내밀며 현금 지급을 요청했다. 은행측이 수표에 적힌 일련번호를 확인해보니 ‘이미 지급한 수표’라고 나왔다.

100억 위조수표 사기 사건이 발생한 KB국민은행 수원 정자점. ⓒ 시사저널 임준선
은행측은 박씨에게 “인출된 수표여서 지급이 안 된다”고 거절했다. 박씨는 펄쩍 뛰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진본인데, 벌써 지급했다니 무슨 말이냐”며 따졌다. ‘100억 가짜 수표’ 사건은 이렇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100억 위조수표 사기단 수배 전단.
박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경기경찰청은 즉시 수사에 들어갔고 전후 사정 파악에 나섰다. 그랬더니 6월12일 오전 11시쯤 최영길씨(60)가 KB국민은행 수원 정자점을 찾아 100억원짜리 자기앞수표를 제시한 뒤 서울 명동과 연지동 시중 은행 2개 계좌에 50억원씩 분산 입금한 것을 알아냈다. 경찰은 은행 CCTV를 통해 당일 창구에서 돈을 찾는 최씨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날 최씨는 위조한 가짜 100억원짜리 수표를 제출하고 전액 현금으로 찾아갔다. 국민은행 수원 정자점은 수표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수표에 적힌 일련번호를 통해 은행에서 발급한 수표가 맞는지를 확인했으나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시 수표감별기를 통과시켰더니 이번에도 이상 반응이 없었다. 지점장은 최씨가 내민 수표가 진짜라고 믿고 100억 수표에 대한 현금 지급을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최씨는 흉기 한 번 들지 않고 은행에서 100억원을 빼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최영길이 대부업자 박씨에게 접근한 것은 지난 1월 초순이다. 최씨는 브로커를 통해 박씨를 소개받았고, “회사를 인수하려 하는데 자금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100억원짜리 수표를 갖고 있다가 내가 연락하면 국내 5대 로펌 중 한 곳에 맡겨달라”며 일종의 예치 증명인 에스크로 방식을 제안했다. 그러면서 최씨는 그 대가로 7200만원을 지불했다. 박씨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후 최씨는 박씨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박씨가 은행을 찾아갔다가 자신의 수표를 도용한 가짜 수표를 현금으로 전액 찾아간 것을 확인한 것이다.

주범 최영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최소 7개월 이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했고, 나름대로 인출책과 환전책 등 조직책을 두고 활동했다. 그리고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돈을 입금받은 다음 날인 12일 단 하루 만에 서울 지역 은행 10여 곳을 돌며 100억원을 모두 인출했다. 이들은 인출된 자금에 대한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달러 67억원, 엔화 30억원, 원화 3억원 등으로 나눠 인출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최씨의 위조 수법은 첨단을 달렸다. 진짜 수표처럼 위장하기 위해 진짜 수표를 사용했다. 그는 1월11일 국민은행에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1억110만원권 수표를 발급받은 후 일련번호와 금액을 위조해 100억원짜리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1억원짜리 진짜 수표를 100억원짜리로 액면가를 부풀린 것이다.

그런데 대부업자 박씨는 최씨에게 수표를 건네주지도 보여주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최씨는 어떻게 해서 박씨가 가지고 있던 진본 수표의 일련번호 등을 알아냈을까. 아직까지 경찰도 이 부분을 정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경찰 출신 최영길 뒤에 숨은 나경술

경찰은 사건 발생 후 수사관 17명이 참여하는 전담수사팀을 꾸렸다. 그리고 공모자 2명과 환전책 4명, 인출책 3명 등 총 9명을 검거했다. 주범인 최영길 등 3명의 행방을 찾지 못하자 경찰은 최영길, 김영남(47), 김규범(47) 등을 전국에 공개 수배했다. 그런데 이 중 김영남이 심적 부담을 느껴 자수하면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당초에는 최영길을 주범으로 특정했으나 ‘나경술’이라는 이름이 새로 떠올랐다. 자수한 김영남은 “나는 나경술에게 이용됐다. 그가 모든 것을 지시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나경술을 이번 사건의 몸통으로 지목한 것이다.

김영남은 경찰에서, 2010년 4월께 나씨와 같은 구치소에 수감됐던 인연으로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나씨에게 모두 6800만원을 빌려줬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김씨가 돈을 빌려준 시기로 미뤄볼 때 이 돈이 100억원짜리 수표를 위조하는 데 사용된 1억110만원짜리 수표를 발급하는 데 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씨는 나씨에게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과정에서 범행 당일인 6월12일 서울에서 이자를 포함해 1억원을 건네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찰은 김씨가 올 초부터 나씨와 수차례 만난 점, 범행 과정에 대해 모두 알고 있던 점 등으로 볼 때 주범 격인 인물로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또 다른 인물이 용의 선상에 올랐다. 100억 수표의 주인인 대부업자 박씨는 최영길에게 수표를 보여준 적이 없고, 일련번호 등을 알려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최씨 등 수표 사기단은 어떻게 이런 정보를 알 수 있었을까. 경찰이 이런 의문을 가지고 추적한 결과 KB국민은행 서울 용산 한강로 지점에 근무하는 김 아무개 차장(42)이 용의 선상에 떠올랐다. 그리고 김 차장이 나경술에게 1억110만원짜리 수표를 부정 발급해 범행에 공모한 혐의(특경법상 사기)를 적용해 긴급 체포했다.

나경술의 추가 범행도 드러났다. 나씨는 지난해 8월 위조한 어음을 담보로 47억원을 대출받은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돼 경찰의 추적을 받아온 인물이다. 지난 1년 동안 경찰의 추적을 따돌려왔다. 경찰은 나씨가 이번 100억원 사기 사건 당일 서울 명동 커피숍에서 공범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CCTV 화면에서 찾아내 관련 진술을 확보했다. 수법도 비슷했다.

경찰은 또 당초 주범으로 알려졌던 최영길이 전직 경찰 출신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최씨는 1982년 경찰에 특채된 후 1990년 서울경찰청 기동단에서 해임됐다. 그는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 근무 시절 친구에게 서울 강서구 소재 국유지를 불하받게 해주겠다며 3140만원을 챙겨 해임됐다. 최씨는 경찰에 있을 당시 김포공항에서 2년 동안 출입국 관련 업무를 담당한 사실도 드러났다.

현재 검거되지 않은 핵심 인물은 세 명이다. 주범 격인 나경술과 최영길, 김규범이다. 경찰에서 출입국 기록을 조회해본 결과 아직 국내를 빠져나가지 못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해외로 달아났을 가능성이 크다.

100억 수표 위조 범인 최영길의 CCTV 화면.
“나경술·최영길 국내 없는 듯”

치밀한 범행 수법 등으로 볼 때 위조 여권을 이용하거나 밀항 등을 통해 이미 중국 등 해외로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경찰 출신인 최영길의 경우 김포공항에서 출입국 관련 업무를 봤던 것으로 미뤄볼 때 밀입국 등에 대한 지식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얼마든지 해외로 빠져나갔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공항에서 밀입국 수사 업무를 오래 전담했던 전직 경찰관은 “내가 봐도 최소한 나경술이나 최영길은 국내에 없는 것 같다. 100억원을 빼낸 후 97억원을 달러나 엔화로 환전했다는 것은 이미 범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해외로 빠져나갈 계산을 끝마쳤다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출입국 기록’만 보고 ‘국내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주범 격인 나경술과 최영길이 검거되지 않는 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경찰도 두 사람을 검거하기 위해 수사망을 좁히고 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장벽에 막혀 있다.

만약 주범들이 해외로 빠져나갔을 경우에는 수사가 답보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위조 여권을 사용하는 등 밀입국하는 방법으로 해외로 나갔다면 인터폴에 공조 수사를 요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나경술과 최영길이 한국을 빠져나갔다고 하더라도 국내로 송환해서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2011년 4월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북 김제 ‘마늘밭 110억원 사건’의 주범인 이 아무개씨도 아직까지 잡히지 않고 있다. 그는 서해를 통해 중국으로 밀항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이 이씨의 출입국 기록을 샅샅이 뒤졌지만 해외로 출국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씨가 중국 현지에서 국내 가족들과 수시로 국제전화를 한 정황이 포착됐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이씨는 중국으로 도피한 것이 유력시된다. 마늘밭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누나·매형 등과 수시로 중국에서 국제전화를 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의 주범들도 마늘밭 사건 주범과 같은 방식으로 국내를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크다. 주범이 잡히지 않는 한 이 사건도 미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100억 수표 위조가 완전범죄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남는다. 당초 100억원의 주인인 대부업자 박씨의 돈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박씨는 용의자들에게 수표 일련번호 등 핵심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은행은 수표감별기 등을 통해 수표의 진위 여부를 확인했으나 가짜가 아니라는 결과가 나온 만큼 은행이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한 시중 은행 간부는 “은행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범인이 잡혀 사건의 실상이 드러나지 않으면 소송이 지루하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최후에 웃는 것은 사기범들”이라고 설명했다. 자칫 이번 사건이 미궁으로 빠지거나 미제로 남을 경우 제2·제3의 유사 범죄나 더 진화된 범죄 수법이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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