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한복판에서 ‘나’를 찾다
  • 조철 기자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3.07.1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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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 공통 전염병 소재 신작 소설 <28> 펴낸 정유정

신작 소설을 들고 나타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독자를 다 뺏기는 줄 알았는데, 한국 소설가도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는 작가가 있다. 신작 <28>(은행나무 펴냄)로 전작의 인기를 재현하고 있는 소설가 정유정씨(47)다. 정 작가는 간호대학 출신으로 간호사 경험을 살려 이번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소재는 ‘인수 공통 전염병’이다. 돼지를 살처분하는 동영상을 봤던 독자라면 이 소설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

정 작가는 상복도 많다. 2007년 3년에 걸쳐 구상하고 집필한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5000만원 고료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았다. 그 소설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또다시 2년여 치밀한 자료 조사와 취재를 바탕으로 쓴 <내 심장을 쏴라>로 2009년 1억원 고료 제5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2년 후인 2011년 <7년의 밤>이라는 화제작을 펴내 그해 ‘올해의 소설’로 뽑혔다.

ⓒ 은행나무 제공
재난 속 인간 본성 탐구한 흔적 역력

<28>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문학 분야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한국 문학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있음은 물론이다. 신종플루 등 바이러스와 관련한 뉴스가 해외에서 들려오고 재난 영화 또한 올해도 인기를 모으는 흐름을 정 작가는 놓치지 않았다. <28>은 도시를 뒤덮는 전염병과 재난의 한복판에서 고군분투하는 인물들을 그린 재난 소설이다.

<28>은 수도권 인근 가상 도시 화양시에서 발생한 인수 공통 전염병을 좇는다. 인구 29만의 이 도시에서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발생하는데, 최초의 발병자는 개 번식 사업을 하던 중년 남자다. 신종플루에 걸렸던 이 남자는 병에 걸린 개에 물린 이후 눈이 빨갛게 붓고 폐를 비롯한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증상을 보인다. 이 남자를 구하기 위해 출동한 119구조대원들을 중심으로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하고 삽시간에 응급실 의사와 간호사들까지 눈이 빨갛게 변하며 며칠 만에 돌연사한다.

정 작가는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가는 삶의 폐허를 자신만의 처절한 리얼리티의 시선으로 그려냈다. 또, 사회 문제로 떠오른 증오와 폭력을 정면에서 다룬 점도 눈길을 끈다. 이 소설에서 전염병보다 더 끔찍한 것은 인간들의 폭력과 증오로 인한 죽음이다. 그래서 소설은 인수 공통 전염병이라는 공포와 전염병처럼 번지는 폭력의 광기라는 두 가지 축으로 전개된다.

정 작가는 구제역으로 수백만 마리의 소와 돼지가 생매장당하던 어느 겨울, <동물의 역습>이라는 책을 읽다가 저자 마크 롤랜즈의 질문을 듣는다. “종의 다름이 인간과 동물의 취급 차이를 정당화할 수단이 되는가?”

오랜 세월 인간의 영혼에 깊이 스며든 동물에 대한 도구적 관점에 던지는 질문이었다. 정 작가는 산 채로 묻힌 돼지들의 울음소리가 이튿날 아침까지 지상으로 울려 퍼졌다는 뉴스를 듣고 참담한 심정을 누를 수 없었다.

“슬프고 부끄럽고 두려웠다. 돼지들의 비명과 울부짖음이 오래오래 귓가를 맴돌았다. 불편한 진실과 맞닥뜨릴 때마다 눈뜨고 깨어나는 양심이라는 파수꾼이 끊임없이 속삭여왔다. ‘우리는 천벌을 받을 거야.’ 나는 잠들기를 포기하고 책상에 앉아 노트를 폈다.”

그래도 저 반대편에는 인간을 넘어 ‘생명’을 지키고자 헌신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28>은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참혹하게 죽어간 동물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희망’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모든 살아남고자 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정여울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정유정은 낭만적 휴머니즘으로 재난의 공포를 얌전히 길들인다. 그는 전작들보다 한결 혹독하고 가차 없는 리얼리티로 ‘재난 속 구원’이 아닌 ‘재난 속 인간 본성의 탐구’라는 더욱 본질적인 테마로 육박해 들어가고 있다. 그녀의 붓끝에서 피어난 대재앙의 서사는 가상의 시뮬레이션이라기보다는 지금 바로 여기, 우리의 현실을 향한 뜨거운 알레고리로 읽히는 것이다.”

“독자를 내가 만든 세계에 데려다놓고 싶다”

정 작가는 전작들보다 스케일을 훨씬 키웠다. 도시를 횡행하는 끔찍한 전염병과 봉쇄된 도시에서 살아남으려는 주인공들을 세밀하고 공고하게 묘사한다. 리얼리티에 정교함을 더하려 대학병원 수의학과와 응급의학과, 도청 방역과, 수사관, 특전사, 119구조대 등 전문가들을 취재한 노력도 엿보인다. 허구의 세계라 할지라도 허투루 보이지 않겠다는 정 작가는 “독자를 내가 만든 세계에 데려다놓고 싶다”며 야심찬 의지를 드러냈다.

정 작가가 소설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당신의 목숨은 타자보다, 동물보다 더 소중한가. 당신은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 얻은 삶을 죄책감 없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는 이에 대한 답으로 호시노 미치오가 쓴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에 나오는 알래스카 인디언들의 고래 사냥 이야기를 ‘작가의 말’을 통해 들려준다.

“알래스카 인디언들은 고래를 잡으면 고기를 취한 후 ‘내년에도 또 오너라’라고 외치면서 턱뼈를 바다에 다시 돌려준다고 한다. 이런 의식은 세상의 온갖 생명체, 물과 바람까지도 영혼을 가지고 존재하며 인간을 지켜보고 있다는 세계관과 자신들을 먹여살려주는 자연에 대한 외경심에서 비롯된 풍습이란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자연이 빚어낸 우연의 산물들이다. 서로 빚을 지고 갚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스스로 다짐하건대 내게 남은 나날, 그 점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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