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제 시계인데 얼마 쳐주나요”
  • 조유빈 인턴기자 ()
  • 승인 2013.07.2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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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전당포, 서울 압구정 등 400여 곳…연예인·운동선수 등도 찾아

7월17일 서울 성북구 삼선동1가. 후미진 골목 사이로 전당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간판은 있지만, 전화번호는 없었다. 주인은 혹여 손님인가 싶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기자 신분을 밝히자 이내 한숨을 내쉬며  “가게 세도 안 나온다. 손님이 한 명도 오지 않는 날이 부지기수다”라고 힘없이 말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죄와 벌>의 배경이었던 ‘옛날 전당포’는 휘황찬란해진 도시와 어색한 동거를 하다 셔터 문을 거의 다 내렸다. 그 공백을 10여 년 전부터 명품 전당포가 메워가고 있다. 명품 가방·시계, 다이아몬드를 취급하는 명품 전당포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에서 400여 곳이 성업 중이다.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한 명품 전당포 내부 모습. ⓒ 시사저널 임준선
3개월 안에 저당물 안 찾아가면 매각

같은 날, 서울의 청담동. 세련된 간판을 단 명품 전당포는 오전에 찾아간 ‘전통 전당포’와 사뭇 달랐다. 환한 조명, 깔끔한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었다. 마치 쇼핑을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진열장엔 명품들이 즐비했다. 샤넬·구찌·프라다를 비롯한 명품 가방부터 고가의 시계와 보석까지 매장 안에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직원들의 서비스도 친절했다. 때마침, 한 손님이 소파에 앉아 직원이 내온 커피를 마시며 자신이 가져온 명품의 가격 감정을 의뢰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명품 전당포에서는 전문 감정사의 감정이 끝난 다음, 저당 잡힌 물건에 따라 이용 가능한 금액을 대출받는다. 품목과 브랜드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000만원짜리 시계의 경우 300만원 정도를 대출받을 수 있다. 시간은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복잡한 대출 과정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이 명품 전당포를 찾는 이유다.

전당포가 180도 달라졌다. 장물을 팔아넘기는 범죄의 온상, 악덕 고리업자 등 부정적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다. 전당업을 시작하려면 정해진 교육을 이수하고 시험을 치러야 한다. 전당포별로 이율이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대부업 등의 등록 및 금융 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5조 2항에 따라 연이율은 39%를 넘을 수 없다.


장물로 의심되거나, 출처가 불분명한 경우는 매입하지 않는다. 시리얼 넘버를 통해 본인의 물건인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기도 한다. 신분증, 지장, 친필 사인이 있어야만 물건을 저당 잡힐 수 있다. 대출 금액은 계좌 이체를 통해 바로 지급하기 때문에 통장 계좌가 없는 사람은 거래가 불가능하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CCTV가 돌아간다.

단순히 대출 업무만 하는 것이 아니다. 저당을 잡힌 후 3개월이 지나도 물건을 찾아가지 않으면 담보 물품을 처분한다. 대출 기간 중이라도 고객이 담보 물품 판매를 위탁하면 원하는 가격에 팔아주기도 한다.

최근 여자친구 선물로 전당포에서 명품 가방을 구매했다는 최 아무개씨(31)는 “전당포에서 물건을 구경하다 보면 욕심나는 게 많다”며 “시중가보다 훨씬 싼값에 구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아무개씨(여·27)는 “급한 돈을 대출받으면서 명품 가방 위탁 판매를 부탁했다. 수수료를 제하고도 가격이 괜찮은 편”이라고 말했다.

명품 전당포가 등장하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에는 호황이었다. 한창 명품 바람이 불던 당시, 저당 잡히고 찾아가지 않은 물건들이 진열장에 올려놓자마자 팔려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서울 강남 지역 상가의 월세가 비싼 데다, 명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가입한 보안업체 서비스 유지비와 직원들의 월급 등도 만만치 않다.

직장인들은 신용카드 결제일에 많이 찾아

“손님들이 찾아가지 않은 저당 물품을 되팔아야 하는데 경기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아 매출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게 이곳 업주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그만큼 손님들의 발길이 예전보다 뜸해졌다는 얘기다.

저당물의 시세 하락도 골칫거리다. 전자제품이나 시계를 저당 잡힌 경우가 그렇다. “꼭 찾아가겠다”고 해서 대출 기간을 여러 차례 연장해주었다가 신제품이 나오는 바람에 저당물의 가치가 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금값 폭락도 전당포 주인을 울상 짓게 한다. 지난 6월 금값은 돈당 17만원대까지 내려갔다. 돈당 23만원의 시세에 맞춰 대출해간 사람들이 금을 찾으러 오지 않았다. 수십 돈을 한꺼번에 저당 잡히는 명품 전당포의 특성상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명품 전당포도 애쓰고 있다. ‘전통’ 전당업을 하다가 명품 전당포로 사업을 전환한 마리&루이스의 황준태 대표는 “명품 전당포는 물품을 감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치를 판단하는 눈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 중”이라고 말했다. 강남전당포의 박태훈 대표는 “전당포가 과거의 부정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의 현금자동인출기(ATM)이자 쇼핑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요즘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할까. 황준태 대표는 “보통 30세 전후의 젊은 층이 많이 온다. 연예인, 운동선수들도 간혹 온다. 다른 물품을 구매하려는데 돈이 부족한 경우 원래 가지고 있던 명품을 담보로 돈을 빌리러 오는 이가 많다”고 전했다. 예전 40~50대 중·장년층이 생활비 등 급전을 얻기 위해 전당포를 찾던 것과는 세태가 달라졌다.

경기 침체의 골은 이곳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다. 대출을 받기 어려워 아이의 돌 반지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도 간혹 있다. 자금난에 허덕이는 자영업자들이 애지중지했던 명품을 저당 잡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압구정의 한 명품 전당포에 종사하는 직원은 “고급 룸살롱 손님이 줄어들면서 그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의 호주머니도 가벼워졌다. 그들이 명품 가방을 들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요새는 일반 회사원들도 카드 결제일에 맞춰 예물 시계나 가방을 들고 명품 전당포를 찾는다. 박태훈 대표는 “신용등급과 관계없이 필요한 돈을 신속하게 빌릴 수 있어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당포에는 저마다 말 못 할 사연을 간직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한 전당포 진열장에 보관돼 있는 시계가 기자의 눈에 ‘눈부시게’ 들어왔다. 1억4000만원을 호가하는 피아제 시계였다. 이런 고가의 시계를 맡기는 손님은 보통 1000만원이 넘는 대출을 받는다. 전당포업자들에 따르면 고가의 물품일수록 상환을 빨리하는 편이라고 한다. 저당 잡히는 물품은 남녀를 통틀어 시계가 월등히 많다. 여성의 경우 귀금속이나 가방도 많이 맡긴다. 대출 금액은 100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에 이른다. 간혹 해프닝도 벌어진다. 선물로 받은 시계나 가방으로 대출을 받으려다 짝퉁이라는 감정 결과에 경악하는 손님들도 한 달에 서너 명은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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