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대통령 성에 안 차면 또 끌어내릴 건가”
  • 이집트 카이로=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07.23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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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인’ 후세인 씨, 이집트의 딜레마를 말하다

 ‘이집트인’답지 않았다. 열정적이며 다혈질인 다수 시민들과는 달랐다. 크지 않은 목소리로 신중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헬완 대학교 법학과 석사과정에 다니는 후세인 아흐마드 후세인 씨(39). 친무르시와 반무르시가 극렬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그는 ‘회색인’에 가깝다. 그는 ‘너는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답변을 거부한다.

엄밀히 말해 그는 반무르시 성향 시민이다. 무르시 정부의 국정 운영이 더할 나위 없이 무능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무르시 정권에 돌리는 것에는 회의적이다. 특히 군부가 시민의 힘을 등에 업고 합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린 것을 우려한다. 그가 거리로 나서지 않는 이유다.

후세인 씨는 약 2시간 남짓 이어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혁명 이후의 이집트 사회와 시민들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무엇보다 그는 무르시 축출 이후 이집트 사회가 맞닥뜨린 딜레마를 주시하고 있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1년 만에 시민의 힘으로 끌어내린 ‘민주적 쿠데타’의 모순에 대해서다.

 

ⓒ 시사저널 이규대
2년 전 재스민 혁명 당시 참여했나.

그때도 거리에 나서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무바라크 정권에 비판적이었는데도 그랬다. 다만 지금과는 이유가 달랐다. 시민운동의 성공 가능성을 비관했기 때문이다. 30여 년간 철권을 휘두른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시민들이 어떤 심정으로 거리에 나섰는지 궁금하다.

무바라크는 통치 기간이 정말 길었다. 무려 30년이다. 시민들은 질려 있었다. 무바라크 체제에서는 더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연로한 무바라크 대통령이 헌법 개정마저 감수하며 자기 아들로의 권력 승계를 기도하자 시민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경찰의 가혹한 탄압에 대한 분노가 더해지며 혁명의 도화선이 타올랐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거리로 나오는 시민들의 속내는 조금 다른 듯하다.

2년 전과 지금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은 군부의 주요 고위직 인사로 구성된 군 최고위원회 과도정부와 이후 선거로 선출된 무르시 대통령이 각각 1년씩 국정을 운영한 상황이다. 2011년엔 30여 년의 독재 정권에 질린 시민들이 변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었다면, 지금은 혁명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더 어렵고 혼란해진 것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는 상황이다.

지난 2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실제로 이집트 시민들이 무엇을 체감했는지 듣고 싶다.

혁명 이후 곧바로 무르시 정권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상당 기간 군 최고위원회의 임시 통치가 있었다. 이때 군부가 직접 통치에 나선 것은 큰 실수였다. 비록 독재 정부의 핵심 세력 기반이긴 했지만, 자체적으로 국가를 운영할 감각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수많은 실정이 있었다. 당시 국가 경제가 사실상 멈췄다고 보면 된다.

군부의 임시 통치는 무엇이 문제였나.

혁명 이후 시민들은 봉급을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집트는 빈부 격차가 매우 심한데, 대다수 일반 노동자의 평균 임금 수준이 매우 낮다. 그에 대한 불만이 임금 인상 요구로 표출된 것이다. 그런데 군부는 적자에 시달리는 정부 재정을 고려하지 않고서 무턱대고 요구를 수용했다. 중앙은행의 예비금까지 털어 대규모로 돈을 뿌렸다. 1인당 돌아가는 혜택은 미미한 데 반해 정부의 재정 지출 규모는 컸다. 이뿐이 아니다. 혁명을 계기로 경찰과 시민 사이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치안이 악화됐다. 치안이 악화되면 관광 국가인 이집트의 경제는 멈춘다. 이렇게 국가의 수입은 줄어드는 반면 비생산적인 지출이 막대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무르시가 취임한 이후에는 어땠나.

민주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악화됐다.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가 대립하면서 정치적 상황 및 치안이 불안해지자 외국 회사들의 투자가 끊겼다. 무슬림형제단이 집권하면서 아랍권 국가의 원조가 크게 줄었다는 점도 문제다.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 등 이웃 국가들의 지원이 대부분 끊겼다. 무슬림형제단의 이슬람 근본주의를 격려하는 카타르만이 이집트를 원조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무르시가 무슬림형제단 단원을 정부 고위직에 앉히는 모습이 큰 실망을 안겼다. 무르시는 이집트 경제를 회생시킬 장기적인 계획보다는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만 급급했다. 물론 혁명 이후 이집트의 어려움이 모두 무르시 탓만은 아니다. 무바라크 시절부터 과도정부를 거쳐 누적된 것이다. 하지만 무르시는 산재한 문제를 해결할 어떤 능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당신은 여러모로 반무르시 성향이 강한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이번에 거리로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내가 무르시를 지지하러 거리에 나선다면 그건 ‘멍청한 정부’를 응원하는 꼴이 된다. 하지만 내가 무르시에 반대하려 거리에 나서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행동이 향후 이집트의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지금 무르시가 군부와 시민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무력으로 축출됐는데, 이건 정말 위험하다. 같은 일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사람들의 생각은 계속 바뀌기 마련이다. 새로 대선을 치르고 1년이 지나, 마음에 안 들면 대통령을 또 쫓아낼 건가.

한 시민으로서 지금 이집트의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한 가지 목표만 있으면 된다. 모든 이집트 사람이 공감하며 함께할 수 있는 지향점이다. 이집트가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던 1960년대 당시 나세르 대통령은 시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나일강에 댐을 건설하면서 에너지원을 확충하고 농경을 일으켰다. 1970년대 사다트 대통령이 중동전쟁을 거치며 시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것도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정권은 시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계획이나 프로젝트를 마련해야 한다.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지도자라면, 아무리 상황이 힘들다 해도 국민은 기다릴 것이다.

후세인 씨는 일반적인 이집트 시민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깊은 편이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의 무력 축출이 향후 가져올 정치적 딜레마의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후세인 씨의 결론은 ‘이집트인’다웠다.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국가적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밀어붙이는 리더십을 그 또한 갈망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분열된 시민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한 가지 목표’에 합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가 지향하는 민주적 가치와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지도자’는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 후세인 씨의 눈이 다소 피로해 보였다.

 
※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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