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는 군중 모으는 ‘도구’일 뿐이다
  • 이집트 카이로=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07.31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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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서명운동 ‘타마로드’, ‘2011년 SNS’ 역할 대체해

와엘 고님 전 구글 중동·북아프리카 지역 마케팅 담당 이사는 이집트 혁명의 주역으로 꼽힌다. 그는 무고한 시민이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한 사건에 분노하며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했다. 이곳에서 계획된 시위가 2011년 1월 민주화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다. 그는 혁명 당시의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5월 첫 방한 당시 참가한 한 포럼에서다. “과거의 혁명을 유선전화 혁명, 팩스 혁명이라고 불러야 하나? 기술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언론이 페이스북과 유튜브에 애착을 갖고 그 역할을 과대 해석한다.”

2년 전 ‘아랍의 봄’ 당시 SNS의 역할이 크게 이목을 끈 바 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던 민주화 바람이 도미노처럼 퍼져 나가는 데 SNS가 기폭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아랍권의 시민혁명이 SNS라는 새로운 의사소통 기술 덕분에 가능했다는 분석까지 내놓았다. 그런데 와엘 고님은 이것이 무리한 평가라고 본 것이다. 이런 반응은 이집트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사저널>이 만난 다수의 시민은 ‘이집트 민주화는 SNS 혁명이었나’라는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피플 파워’의 진정한 동력은 변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다. ① 2011년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킨 페이스북 페이지 ‘우리는 모두 팔레드사이드’ ② 무르시 축출 운동의 기폭제가 된 ‘타마로드’ 서명 용지.ⓒ 시사저널 이규대
시민들은 2011년 SNS의 역할에 대해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먼저 정부의 언론 통제 탓에 차단된 뉴스와 정보가 오가는 창구 역할이다. 경찰의 폭력과 이로 인한 시민의 피해,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대통령의 권력 세습 시도 등 정부에 불리한 내용이 공유됐다고 한다.

군중 결집에 ‘올드 미디어’ 힘 여전

두 번째는 혁명 초기 반정부 여론의 결집이다. 2011년 1월25일 ‘경찰의 날’을 계기로 공권력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시위를 가진 것이 시작이었다. SNS를 사용하는 젊은 식자층을 중심으로 시위의 규모가 커졌다. 그 성격도 무바라크 정권 퇴진 요구로 확대됐다. 오래 누적된 시민들의 불만이 거리로 쏟아질 수 있었던 계기를 SNS가 제공한 셈이다.

하지만 군중의 힘이 정권을 무너뜨릴 만큼 커지는 과정은 SNS의 파급력 밖에 있었다. 당초 젊은 청년들이 중심이 된 시위가 외연을 넓히는 과정에는 기존 ‘올드 미디어’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당시 시위에 참가했다고 밝힌 한 40대 남성은 “당시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은 SNS를 보고 나온 게 아니었다.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방송 보도, 이웃끼리의 입소문 역할이 컸다. 정부와 경찰의 폭력에 피 흘리는 사람들을 보며 분노한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고 말했다.

이번에 반무르시 시민들이 결집해 무르시를 축출하기까지의 양상도 2011년의 시민혁명 과정과 거의 비슷하게 전개됐다. 눈덩이를 뭉쳐 굴리면 그 크기가 점점 커지듯, 여론이 결집되는 계기가 있은 후 이것이 점차 확산되며 정권을 퇴진시키는 결과로까지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이 분열을 겪었다는 점을 빼면 2년 전과 매우 흡사한 과정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중심에 SNS가 없었다. 무르시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SNS의 힘은 미미했다는 것이 시민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SNS의 역할을 대신한 것은 오프라인 서명 운동이다. 그 이름은 ‘저항’을 뜻하는 아랍어 ‘타마로드’다. 4월 말부터 시작된 타마로드 운동은 매우 단순한 형태였다. 무르시의 퇴진을 요구하는 내용이 적힌 종이에 이름·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를 적는 식이었다. 이에 대해 한 시민은 “2011년 당시 정부에 의해 통신망이 차단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그래서 오프라인 서명으로 반정부 여론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며 반무르시 여론에 불을 붙였다. 무르시 취임 1주년이었던 6월30일, 타마로드 운동본부측은 모두 2200만명의 시민이 무르시 퇴진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타마로드 운동은 2011년의 SNS와 같이 시민들의 행동을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이집트 민주화의 상징인 타흐리르 광장에 다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무슬림형제단이 중심이 된 친무르시 성향의 시민들을 제외한 대다수 정치 세력이 ‘타마로드’ 깃발 아래 뭉쳤다. 각종 미디어와 입소문을 타고 거리의 군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한 군부가 시민의 여론을 등에 업고 무르시를 끌어내리면서, 타마로드 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혁명의 목표 실현되지 않았다”

혁명 후 2년 만에 이집트에서 반복된 시민운동은 결국 ‘아랍의 봄’과 SNS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드러냈다. SNS의 결정적인 역할 없이도 오프라인을 통해 시민들이 결집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와엘 고님의 말마따나 기술은 도구일 뿐이었다. 변화를 갈망하는 각 개인들의 분노야말로 ‘피플 파워’가 출현하도록 만든 결정적 요소였던 것이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타마로드 서명 용지에는 시민들의 육성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여기에는 ‘시민들은 무르시가 정권을 잡은 이래로, (2011년) 혁명의 목표였던 삶, 자유, 사회정의, 국가 안정 중 어떤 것도 실현되지 못했다고 느낀다’고 적혀 있다. 시민들은 무르시 축출이 2011년 혁명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 것이다. 무르시를 향해 ‘우리는 널 원하지 않아’라며 반복적으로 외쳤던 이유다.

이집트의 피플 파워는 또 한 번 정권을 무너뜨리며 자신의 힘을 표출했다. 하지만 상황은 여러모로 암울하다. 세속주의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 간 갈등의 골이 깊다. 첫 민선 대통령을 쿠데타로 끌어내린 것은 향후 이집트 민주주의 역사에 암초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시민들의 삶의 질을 열악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는 그대로인 상태다.

물론 급진적인 사회 변화는 대개 혼란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지금 이 과정이 민주화 이후의 이집트가 좀 더 발전된 국가로 나아가는 성장통인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의 시작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피플 파워가 열망하는 변화를 가로막는 요소가 여전히 이집트 사회에, 어쩌면 시민들 내부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것이 이집트 시민들만의 문제일까.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다음 호에는 ‘태국 ’ 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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