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내가 ‘살생부’에 오르진 않았겠지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3.09.1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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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장 인선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관치 인사’ 논란이 불거진 지 3개월여 만이다. 수장 자리가 공석이거나 전임이 계속 일하고 있는 기관이 우선순위에 올랐다. <시사저널>이 경영 공시 자료를 통해 확인한 결과 9월5일 현재 기관장이 공석인 공공기관은 모두 25곳으로 나타났다. 임기를 마친 기관장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공기관도 15곳인 것으로 파악됐다. 40곳이나 되는 공공기관이 현재 선장도 없이 배를 운항하고 있는 셈이다. <시사저널>은 지난 8월6일자를 통해 박근혜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장의 면면을 살피는 한편, 기관장이 공석이거나 임기가 만료된 공공기관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전한 바 있다.

‘김기춘 살생부’에 이름 들었을까 안절부절

지금 상황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공공기관에 대한 인사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권력 실세들의 인사 개입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알짜배기 공공기관 수장 자리를 놓고 권력 실세들이 힘겨루기를 펼치고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또 특정 인사의 내정설을 기정사실화하는가 하면, 이 인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기관 내부의 줄서기 행태도 여전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한편으로는 전 정권 인사를 내보내기 위한 압박의 강도가 더해지는 가운데, 자리를 지키기 위한 기관장의 로비 의혹에 여권 실세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인사위원장을 겸직하는 청와대 비서실장이 갑작스럽게 바뀌면서 공공기관행을 염두에 두고 발품을 팔아온 일부 인사들은 당혹감에 빠졌다. 허태열 전 실장이 청와대를 떠난 이유가 인사 관련 잡음 때문이라는 뒷말이 많았던 만큼 김기춘 실장이 어떤 식으로든 기존의 인사 방안을 손봤을 가능성이 크다. 일각에서는 이른바 ‘김기춘 살생부’가 존재한다는 얘기까지 떠돌고 있다. 이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올랐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원로 그룹 ‘7인회’ 멤버인 김 실장은 박 대통령의 국정 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만큼 통상적으로 대통령을 곁에서 보좌하는 비서실장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청와대 내부 사정에 밝은 여권의 한 인사는 “한 달 사이에 김 실장이 청와대는 물론 각 부처까지 대부분 장악했다고 봐야 한다. 여당에서도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공공기관 인사와 관련해서도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허 전 실장이 물러나기 전에 공공기관 인사 방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공공기관 인사에 대해 “이전 정권에 비해 많이 늦어졌다. 좀 서두를 필요가 있다”며 여름휴가철 이후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곧바로 청와대 인사가 이뤄지면서 시기를 놓쳤다. 김 실장은 8월 초 취임 직후 허 전 실장이 마련한 공공기관 인사 방안을 전면 재검토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인사 문제와 거리를 두고 있다. 국제 무대에서의 외교 활동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결국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공공기관 인사는 ‘군기 반장’으로 긴급 투입된 김 실장이 주도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수자원공사 사장 놓고 실세들 힘겨루기

한국수자원공사는 공공기관 295곳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관 중 하나로 꼽힌다. 조직 및 자금 규모가 이를 잘 말해준다. 임직원 수가 4100여 명에 이르고 자본 총계가 11조원이 넘는다. 이명박(MB) 정권의 상징이 된 4대강 사업을 주도하면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재정 면에서 최악의 상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2년 결산 기준 부채 총계가 13조7779억원에 이른다. 2008년 부채 총계 1조9623억원과 비교하면 불과 4년 만에 부채가 무려 7배나 늘어난 셈이다.

그런 만큼 수자원공사의 수장 인선은 다른 어떤 공공기관장 인선보다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임 사장 후보군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고위 관료 출신으로 ㅇ씨와 ㅅ씨 그리고 ㄴ씨, 대선 기여 그룹에서 ㅈ씨, 내부 출신으로 ㅇ씨와 ㄱ씨가 거론된다. 이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는 TK(대구·경북) 인사로 대선 승리에 기여한 ㅈ씨라는 평가가 많다. 수자원 관련 학회를 이끌기도 한 그는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의 공약을 총괄한 국민행복추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여당 내 최고 실세 중 한 명인 ㅊ씨와 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또 다른 ㅊ씨가 그를 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사실상 사장으로 내정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ㅈ씨의 경쟁자로는 호남 인사이면서 내부 출신인 ㅇ씨가 거론된다. 수자원공사에서 30여 년 동안 근무한 그는 퇴사한 후 경인아라뱃길 관련 회사의 사장으로 일했다. 청와대 내 최고 실세로 꼽히는 ㅇ씨가 그가 사장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얘기가 한동안 나돌았다. 하지만 사장 인사가 당·청을 대표하는 실세 간 힘겨루기 양상으로 비치자 일단 ㅇ씨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모습이다.

수자원공사 사장 자리를 놓고 권력 실세들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업계 관계자는 “수자원공사 업무는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 외에 환경부나 각 지방자치단체와 연계된 일도 많아 상당히 복잡하다. 낙하산 인사가 내려오면 그만둘 때쯤 돼야 ‘이제 일을 알 만하다’고 말할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4대강 사업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사가 사장을 맡아야 혁신을 추진해나갈 수 있다. 과거처럼 토목직이 독식하는 일이 계속되면 위기를 극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선 캠프 행복위 출신들 대거 진출

한국농어촌공사는 사장 공모 절차를 진행하던 중에 관료 출신 특정 인사가 내정된 것으로 의심되는 문건이 언론을 통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뉴시스가 입수한 ‘CEO 취임에 따른 TIME-Schedule’ 문건에는 주무 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요 요직을 거친 ㅇ씨를 사장으로 특정해놓고 ‘취임 전 보고 및 조치 사항’ ‘취임 당일 차량 이동 경로’ ‘취임 이후 주요 일정’ 등이 상세히 작성돼 있다. ㅇ씨 측과 농어촌공사는 해당 문건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ㅇ씨 외에 4명의 후보가 더 있다는 점에서 최종 선정 결과에 따라 논란이 다시 불거질 수 있다.

공교롭게도 ㅇ씨는 수자원공사 사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ㅈ씨와 마찬가지로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선거 캠프인 국민행복추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위원회 내 행복한농어촌추진단장을 맡았던 그는 박 대통령의 농정 분야 공약을 진두지휘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박근혜정부 출범 당시 농림축산식품부장관 후보로도 거론됐다.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출신 인사의 경우 이미 여러 명이 공공기관 수장 자리에 올랐다. 3월에 취임한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5월에 취임한 유현석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곽병선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옥동석 한국조세연구원 원장, 6월에 취임한 정창수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정현욱 (재)명동·정동극장 극장장·박계배 (재)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 회장·손양훈 에너지경제연구원 원장 등이 이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권 일각에서는 ‘행복위 출신만 행복하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들려온다.

“철도공단 이사장, 실세 거론하며 유임 자신”

한국철도시설공단의 경우 현 수장의 진퇴 여부가 주목을 받고 있다. MB 정권 시절이던 2011년 8월에 취임한 김광재 이사장은 임기가 1년 남짓 남아 있다. 그런데 다른 공공기관과 달리 철도공단 내부에서 김 이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철도공안 노동조합은 8월13일 김 이사장의 비리 의혹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진정서를 대전지방검찰청에 제출했다.

청와대에도 김 이사장의 비리 의혹과 관련한 보고서가 올라간 것으로 알려졌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문건에 따르면, 매월 200만원씩 받는 업무비와 한국철도협회로부터 받는 추진비가 문제로 거론된다. 이에 대해 철도 공단 측은 “월 200만원의 이사장 업무추진비는 직원·협력 업체 등의 격려, 언론 등 유관 기관축·조의금 등에 사용하고 있으며 목적 외 사용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또 “한국철도협회 협회장의 직무 활동비는 협회 규정에 따라 집행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김 이사장 처남의 턴키 심의위원 선정 건도 올라와 있다. 턴키 공사는 설계부터 시공까지 책임지는 일괄 입찰 공사를 말한다. 철도공단은 연간 1조원대의 턴키 공사를 발주한다. 김 이사장의 처남 ㅈ씨는 4월18일 2기 심의위원으로 선정됐는데, 이후 문제가 불거지자 김 이사장은 “전혀 몰랐다”고 해명했다.

김 이사장의 행보와 관련해 또 다른 논란을 불러올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그가 ‘유임’을 자신하면서 현 정권 실세들과의 친분을 내세우고 있다는 주장이다. 중도 사퇴를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쳐온 김 이사장이 5월 중순 철도공단 간부들이 참석한 경영전략회의에서 “2014년 7월까지 유임한다”고 밝히면서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와의 친분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최 원내대표와 김 이사장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행정고시는 최 원내대표가 22회로 김 이사장(24회)보다 앞선다. 정보에 정통한 한 여권 인사는 “김 이사장이 선거 때 최 원내대표에게 도움을 줬다고 큰소리치고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철도공단 내부 인사는 “김 이사장이 최 원내대표 지역구를 신경 써서 챙기려고 했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현 정권의 ‘숨은 실세’로 불리는 최외출 영남대 부총장과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이사장과 최 부총장은 영남대 경제학과 동문이다. 김 이사장이 75학번, 최 부총장이 77학번이다.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닌 점도 닮은꼴이라고 한다. 최 부총장이 새마을장학생 1기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철도공단 노조 관계자는 “김 이사장은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김 이사장과 달리 공공기관에 진출한 MB맨들은 대부분 자리에서 물러나는 분위기다. 이에 따라 새 수장을 뽑기 위해 공식 절차에 들어간 공공기관도 하나 둘씩 늘어나고 있다. 우선 금융기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5년 동안 수장을 맡았던 안택수 이사장이 임기 후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신용보증기금은 임원추천위원회를 구성해 두 달 넘게 중단됐던 기관장 인선 작업에 돌입했다. 공식 절차에 돌입하기 전에 서근우 한국금융연구원 기획협력실장이 차기 이사장으로 유력하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한때 금융권이 술렁였다. 신용보증기금 노동조합은 9월3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특정인 내정설에 대해 “보증 상담도 하기 전에 보증서 발급부터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수장 공백이 장기화하면서 업무 차질이 우려되던 한국거래소도 임원추천위원회를 재구성해 이사장 공모 절차에 나섰다. 6월에 실시된 공모에는 우영호 울산과학기술대 석좌교수, 유정준 전 한양증권 사장, 이철환 전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 임기영 전 대우증권 사장, 장범식 숭실대 교수, 정의동 전 예탁결제원 사장, 최경수 전 현대증권 사장, 황건호 전 금융투자협회장 등 11명이 지원서를 냈다. 이들 중에서 경북 성주 출신의 최 전 사장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에너지 관련 공공기관의 수장 인선도 속도를 내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한국수력원자력은 사장직 공모에 지원서를 낸 19명을 대상으로 서류·면접 심사를 거쳐 압축한 후보 4명의 명단을 기획재정부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 제출했다. 최종 후보군에는 관료 출신과 학계, 전력업계 출신이 두루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에서 에너지 분야에 정통한 관료 출신인 조석 전 지식경제부 2차관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다만 원전 비리로 개혁 대상에 올라 있는 한수원의 혁신을 이끌어내기 위해 의외의 인물이 발탁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제기된다.

용산 역세권 사업 중단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코레일(한국철도공사) 사장으로는 여권의 중진 정치인들이 거론된다. 16대 국회 때부터 내리 3선을 한 세 명의 전직 의원 이름이 후보군으로 올라 있다. 김학송(경남 진해)·이인기(경북 고령·성주·칠곡)·김성조(경북 구미갑) 의원으로 모두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관료 출신 기관장 속속 입성 


8월 여름휴가가 막바지일 무렵부터 9월5일 현재까지 다섯 명의 기관장이 새롭게 임명된 것으로 확인됐다.

장광수 한국정보화진흥원장(8월14일), 김성귀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8월16일), 허영 축산물품질평가원장(8월29일), 임광수 한국해양과학기술진흥원장(8월30일), 원대연 (재)우체국시설관리단 이사장(9월2일)이 3년 임기로 취임했다. 공공기관에 대한 인사가 사실상 중단된 상황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대부분 관료 출신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대구 출생인 장광수 원장은 경북고와 경북대를 나왔다. 행정고시 24회로 국세청·체신부·정보통신부·행정안전부에서 근무했다. 김성귀 원장은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 경영학 석사와 연세대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마리나와 해양 레저 등 해양 관광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경남 진주 출신인 허영 원장은 진주 대아고와 경상대 수의학과를 나왔다. 대한수의사회 부회장, 경남동물병원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한 허 원장은 2011년부터 축산물품질평가원 감사로 재직하다 원장을 맡게 됐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부대변인을 지낸 그는 2012년 4·11 총선을 앞두고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지역에 공천을 신청하기도 했다.

임광수 원장은 해양수산부에 몇 남지 않은 PK(부산·경남) 인맥으로 꼽힌다. 경남 의령 출생으로 경남고와 서울대를 나왔다. 행정고시 26회로 해양수산부장관 비서관, 수산정책과장, 국립수산과학원장, 농수산식품부 수산정책실장 등을 지냈다. 해양과 관련한 전 부문에 다양한 경험과 전문성을 지닌 정통 행정 관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대연 이사장은 우정사업본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다. 보험사업단 보험기획과장, 감사 담당관, 예금사업단 예금사업팀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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