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거래’에 짓밟힌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3.10.02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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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여론 등에 업고 총기 규제법 관철하려다 실패

지난 5월5일 미국 중서부 오하이오 콜럼버스 주립대학 졸업식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미국 의회를 향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많은 유권자가 원하는 정책이 힘을 가진 특정 단체 로비스트들 손에 매장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대통령의 말에 졸업식장은 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이날 오바마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미국 의회 상원에서 부결된 총기 규제 강화 법안이다.

지난해 12월 코네티컷의 한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으로 26명의 학생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나면서 총기 규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바마는 2008년 대선에서도 공약으로 내걸었던 총기 규제 법안을 여론에 힘입어 다시 의회에 상정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야당인 공화당뿐 아니라 여당인 민주당 내에서조차 보수 성향 의원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고, 법안은 결국 부결됐다. 미국 국민들은 정치권 로비력이 막강한 ‘NRA(미국총기협회)’의 힘을 절감했다.

총기 소지를 헌법에서 인정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매년 규제 법안을 두고 찬반이 엇갈렸다. 모든 정치인이 풀기 어려운 과제로 꼽는다. 그래도 오바마는 ‘많은 유권자가 원하는 정책’이라는 점을 자신 있게 내세웠다. 오바마의 굳건한 입장을 뒷받침한 것은 ‘위더피플(We the People)’이었다. 백악관에 설치된 민원 사이트다.

ⓒ EPA연합
2만5000명 이상 요구하면 백악관은 답변해야

올해 1월 위더피플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우주 요새인 데스스타의 건설을 부정했다”는 외신 보도가 화제가 됐다. 한 미국인이 “정부는 고용 대책의 일환으로 2016년까지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제국군의 우주 요새인 데스스타의 건설에 착수해야 한다”고 위더피플에 민원을 제기했다. 청원 동의자가 2만5000명이 넘을 경우 백악관은 공식적으로 답변을 해야 하는데 이 민원이 그 숫자를 훌쩍 넘어버렸다.

답변에 나선 사람은 폴 쇼크로스 백악관 행정관리예산국 과학·우주분과장이었다. 그는 “미국 정부도 일자리 창출과 국방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지만 데스스타는 안 된다”며 청원을 거부했다. 데스스타 건설 비용은 85경 달러로 추산되는데 재정 적자를 줄이는 데 힘쓰고 있는 오바마 정부로서는 응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난센스 같은 질문에 논리적으로 응한 쇼크로스는 답변의 마지막을 <스타워즈>의 명대사로 마무리했다. “포스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기를.”

위더피플은 2011년 9월에 만들어졌다. 계정을 만들면 누구나 정부에 청원을 넣을 수 있고 그 내용이 즉시 사이트에 공개된다. 민원 내용에 찬성하는 사람이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누르듯 서명할 수 있는 전용 아이콘을 누르면 즉각 반영되는데, 찬성자가 2만5000명이 넘을 경우 정부는 민원 내용을 검토해 시민에게 답변할 의무가 있다. 이 사이트는 페이스북·트위터와 연동하고 있으며 등록자와 찬성자가 스스로 해당 민원을 SNS에서 확산시킬 수도 있다.

청원 사이트에 도달하는 소리는 다양하다. ‘오바마케어’라는 의료 개혁, 부유층을 타깃으로 한 세제 개혁 재검토 등 국내 문제부터 해외 파병 축소, 분쟁 지역에 무기 수출 중단을 요구하는 국제적인 청원까지 폭넓은 민의가 올라온다.

위더피플은 워싱턴의 정치인에게 보고(寶庫)나 다름없다. 미국인이 지금 어떤 사회 문제에 불신과 분노, 불안을 느끼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민의 욕망도 그대로 드러난다. 반대로 미국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머릿속 생각을 직접 위로 전달할 수 있는 ‘민주주의 2.0’의 통로다. 여기에 ‘개방성’도 뒷받침된다. 비밀 글이 아니다. 비록 청원 내용이 정부와 일부 기업에게 불편한 것이라 해도 모두가 접속할 수 있는 공간에 게시돼 찬성이 모이면 정부가 책임 있는 답변을 보여주는, 매우 민주적인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울면서 앞서 걷는 아이의 어깨에 양손을 걸고 줄을 서서 피난하는 모습의 총기 사건 사진은 AP통신을 통해 전 세계에 퍼졌다. 위더피플에는 총기 규제를 요구하는 청원이 급격히 늘어나 4일 만에 20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찬성했다. 사이트가 개설된 이후 가장 많은 숫자였다. 이처럼 뜨거운 여론에도 총기 규제 법안은 워싱턴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데 총기는 필요하다”는 NRA 측의 가당찮은 주장이 승리한 것이다.

“현실에서 변화 못 시키면 낙담만 준다”

정치 활동가 에드 슈워츠는 자신의 저서 <인터넷 행동주의-시민에 의한 인터넷 사용>에서 “인터넷을 집단행동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며 “그것은 최근 50년간 개발된 정치 도구 중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다. 지역 활동가들이 가장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정부 기관 및 특정 제도 그리고 정치 제도의 기능에 대한 확실한 정보인데 인터넷을 사용하면 이러한 정보를 무료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위더피플과 같은 온라인 민의가 대의민주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짐 데이토 하와이 주립대 석좌교수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우리의 수준은 직접민주주의의 창틀을 만드는 수준이다. 아직 직접민주주의가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참여 부분에서 (위더피플은) 사람들을 관여시키는 이유, 그 철학과 방법 등이 구체화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위더피플이 제기한 데스스타 건설과 총기 규제 법안은 온라인 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 데스스타의 경우 그 민의가 정말 진지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재미 삼아 던져본 것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줬다. <시사저널>은 베른트 슐로머 독일 해적당 대표와 데스스타 논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이렇게 평가했다. “정치에 과부하를 걸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에게 미소를 짓게 만드는 ‘양념’이다. 왜 정치를 항상 끝도 없이 심각하게만 해야 하나. 그런 진지함이 많은 사람을 질리게 한다.” 반면 데이토 교수는 이런 양념론에 회의적이다. 그는 “통상적으로 해적당의 문제는 너무 쉽게 그들의 정부를 비판한다는 데 있다. 이런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은 사람들을 굉장히 열광시키지만, 결과를 얻지 못하고 현실 정치에서 정책들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오히려 사람들을 낙담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실제 세계 각국 정부의 정책 결정에는 민의보다 정·재계의 밀접한 관계에 의한 영향, 다양한 로비스트의 행동 등이 더 큰 결정권을 가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바마를 난감하게 만든 총기 규제 법안 사례가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의회에 불만을 터뜨리던 오바마는 졸업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의 정치 참여가 진행될수록 사회는 변화할 것이다.” 위더피플이 보여주는 시각화된 민의는 과연 낙담으로 끝날까. 인터넷으로 저항하기는 쉬워졌지만 현실에 반영시키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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