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를 위한 톨레랑스<관용>는 없다
  • 최정민│파리 통신원 ()
  • 승인 2013.10.1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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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내무장관 ‘집시 추방’ 발언…“표 얻기 위한 술수” 비판도

“집시들은 루마니아나 불가리아로 돌아가는 것이 맞다.” 이 짧은 문장이 지금 프랑스 정가의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고 있다. 프랑스에서 ‘집시’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문제의 발언은 지난 9월24일 프랑스 라디오 엥테르에 출연한 마뉴엘 발스 내무부장관의 입에서 나왔다.

사실 발언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다. 지난 사르코지 정부에서 국토부장관을 지낸 크리스티앙 에스트로지 니스 시장과 전 환경부장관 나탈리 코쉬스코모리제도 똑같이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직전 정부는 우파 정부였다. 우파 정부와 차이 없는 좌파 사회당 정부 인사의 발언이란 점이 문제였다.

발언의 후폭풍은 야당이 아닌 여당 사회당 내부에서 거세게 몰아쳤다. 내각 각료들도 발스 장관에 대한 비판에 가세했다. 프랑스 국영방송 ‘프랑스5’는 “집시, 내각을 갈라놓다”라고 표현했다. 반대로 야당인 대중운동연합의 장 프랑수아 코페 총리는 ‘집시’ 발언에 대해 즉각적인 지지를 선언했고, 파리 시장 선거에서 후보로 나서고 있는 나탈리 전 장관은 “파리 시장 선거 캠페인을 함께하자”며 정파를 넘어선 ‘러브콜’을 보냈다. 급기야 사회당의 파리 시장 후보인 안 이달고 후보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파리 시를 거대한 빈민촌으로 만들 수는 없다”며 부랴부랴 내무부장관을 거들고 나섰다.

프랑스 외곽 지역에 자리 잡은 집시들의 집단 거주지. 파리 시장 선거를 앞두고 프랑스 정치권이 집시 문제로 시끄럽다. ⓒ AP연합
집시 발언의 파장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발스 장관이 우파 정권과 같은 입장을 취한 점에도 이유가 있지만 향후 프랑스의 정치 일정과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연임에 성공하며 파리 시의 열쇠를 쥐고 있던 사회당의 들라노에 시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시장을 선출하게 된다. 게다가 유럽연합의 현안과 맞물린 점도 집시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계기가 됐다. 2014년 1월1일 이후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인들은 유럽연합 내에서 ‘체류증’이 없어도 노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유럽 내 국경 개방 조약인 ‘솅겐 조약’이 새해부터 적용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르 피가로>의 이브 트레이르 편집장은 발스 장관의 발언이 있던 날,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집시 문제-프랑스가 화산 위에 있다”고 표현했다. 2012년 대선까지만 해도 집시들의 인권을 강조하던 발스 장관이 180도 돌변한 것을 비판했지만 “집시들이 몰려 사는 빈민촌 인근의 주민들은 살 수 없는 지경”이라고 강조했다. 발스 장관은 문제의 발언이 불거진 인터뷰에서 “지난 1년간 프랑스 전국 각지의 시장들로부터 집시 문제에 대한 조속한 해결을 지속적으로 요구받았다”고 토로했다.

이들 지역이 사회당, 공산당 또는 녹색당 출신 시장이 당선된 좌파 성향 지역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집시들의 빈민촌이 형성된 곳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극우 정당에 시장을 넘겨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다. 실제로 10월6일 열린 브리뇰 지역 시장 보궐선거에서 장 마리 르펜이 이끄는 극우 정당 ‘국민전선’ 후보 로랑 로페즈가 40.4%의 득표율을 얻어 1차 투표 1위로 올라서는 일이 벌어졌다. 우파의 대중운동연합(20.8%)과 여당인 사회당(14.6%) 후보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보수화의 신호탄이냐, 선거용 희생양이냐 

집시 문제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관심은 어느 정도일까. 9월25일 프랑스 민영 방송 까날플뤼스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가 그 답을 잘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리옹의 경우 42%의 시민이 “집시 문제가 가장 염려스럽다”고 답했다. 경제 위기(28%), 주거 문제(27%)보다 집시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얘기다. 발스 장관은 문제의 발언을 던진 다음 날 BMF TV에 출연한 자리에서 “우파 정부와 차이가 없는 좌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좌파의 의무는 빈곤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도 “집시의 생활 방식이 프랑스와 너무 다르다”며 법질서를 강조했다.

집시 빈민굴 출신으로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후 <나는 집시이며, 집시로 남을 것이다-난민촌에서 소르본까지>라는 책을 출간한 아니나 츄츄는 현재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시 논쟁을 “미디어화되고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 논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미 대다수 집시는 프랑스 사회에 동화돼 살아가고 있으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1만5000명 정도의 빈민촌에 주거하는 집시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스에 거주하는 집시의 숫자는 공식적인 통계로만 2만명인 것으로 추산된다.

파리 4대학 소르본의 지리학 교수이자 <인구와 미래>의 편집장인 제라르 프랑수아 뒤몽은 “프랑스에 있는 집시들은 피해자들”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피해자를 양산한 책임자로 ‘그들을 버린 국가(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유럽연합 그리고 프랑스 정부’를 지목했다. 불가리아나 루마니아는 집시들에 대해 뚜렷한 계획도 갖고 있지 않고 실천조차도 없다. 프랑스 국책 연구소 연구원이자 정치학자인 캬트린 위톨 드 웬덴은 “유럽연합에서 집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 지원한 130억 유로가 제대로 사용되지 않고 전용되었다는 의혹이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는 이민자 문제에 관해선 가슴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2005년 파리 소요 사태가 만들어낸 상처가 그것이다. 당시 파리 교외 지역을 비롯해 프랑스 전국으로 확산되었던 소요 사태는 단순히 20여 일 동안 9000대의 자동차가 불탔기 때문에 충격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동안 프랑스가 공들여왔던 공화주의와 동화주의의 꿈이 산산이 부서진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당시 세 명의 10대 소년이 경찰의 추격을 피해 변전소에 숨었다가 감전돼 두 명이 죽고 한 명이 중상을 입으면서 사태가 촉발되었는데, 감전 사고가 일어난 클리시 수 부아 지역은 실업률이 40%를 넘나드는 대표적인 소외 지역이었다.

8년 전 이민자에서 이제 집시로 주인공만 바뀌었을 뿐 프랑스는 지금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상태다. 오히려 상황은 더 복잡하다. 이민자 문제는 일정한 주거가 있고 교육이 보장된 상태에서 생긴 사회적 동화의 문제였다면, 집시 문제는 주거나 교육 어느 하나도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늘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언제나 관광객 속에 섞인 집시들을 볼 수 있다. ‘톨레랑스(관용)’의 나라 프랑스에서 집시는 점점 비관용의 대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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