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현실에 발 내린 이야기를 하려 한다”
  • 조철 기자 (2001jch@sisapress.com)
  • 승인 2013.10.3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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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에 소설집 <여름의 맛> 낸 하성란

10월22일 하성란 작가는 서울시 용산의 한 건물 앞에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각 5분 전에 도착해 기자를 만나기까지 5분이 흘렀는데 그동안 그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누가 알아보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그 역시 ‘일하고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들 키우는’ 한국의 일반적인 중년 여성으로 서 있더라는 얘기다.

보통 소설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할 때 소설가로서 이야기한다. 상대가 지인이 아닌 이상 소설가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세상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말할 뿐 소설가가 아닌 한 가정의 누구로서 민낯을 드러내는 일은 않는다.

하지만 하 작가는 소설가로서 말하는 것이 싫은 모양이다. 소설을 쓸 때만 소설가라고 생각하는 그는, 소설을 쓸 때와 소설을 쓰지 않을 때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고 했다. “소설을 쓸 때는 현실의 나를 잊어버린다. 소설 쓰는 일은 특이한 경험이다. 현실적인 문제나 아이들의 엄마인 나를 잠시 잊게 되니까. 기획이라는 걸 해놓고도 막상 소설을 쓰다 보면 내가 의도하지 않은 쪽으로 움직이기도 하니까.”

1999년 하 작가는 <곰팡이 꽃>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는데, 그 소설은 삶의 이면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 남자의 이야기다. 곰팡이와 꽃을 연결시킨 점도 독특했지만 ‘정밀 묘사의 여왕’이라는 별칭을 단 것도 그즈음이 아니었을까?

10여 년이 지난 지금 작가는 많이 달라졌다. 그는 “예전에는 공들여 만드는, 빚거나 깎아내는 소설 쓰기를 했는데, 지금은 현실에 발을 내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창작은 계속해왔는데 소설집은 7년 만에 냈다. 이번에 펴낸 소설집 <여름의 맛>은 이전 소설집과 비교해 주제나 소재가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7년이라는 기간 동안 나 자신의 변화도 있었고, 아무래도 작가의 변화를 소설이 담아내게 되니까 예전 소설집과 느낌이 다를 것이다.”

ⓒ 시사저널 이종현
“가지 않은 길조차도 우리의 삶 아닐까”

<여름의 맛>이 나오기 전인 올여름 그는 한 지방 대학 캠퍼스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느낀 점을 이번 소설집을 내는 소감으로 띄웠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넜다. 목재 난간 곳곳에 ‘추락 주의’라고 쓰인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다리를 다 건넜을 때쯤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만났다. 수문 아래로 흘러가는 물, 단순한 시멘트 구조물과 물의 낙차가 교묘히 만들어낸 무늬를 한참 들여다봤다. 오길 정말 잘했다. 오래전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아직 설렐 일이 많을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설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도 될 거라는, 지금까지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생각을 했다.”

하 작가는 가지 않은 길조차도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그리움을 갖거나 반성하며 사는 것도 삶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들을 이번 소설에 담았다”고 말했다. 이번 소설집의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 ‘두 여자 이야기’부터 그렇다. 그는 또 하나의 자신을 만나는 일종의 심령 현상을 뜻하는 ‘도플갱어’에 관심이 많았다. 소설에서는 ‘이처소재(二處所在;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한다)’로 설정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주인공이 유사한 외모로 분열돼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설정한 것이다. ‘두 여자 이야기’는 일 때문에 방문한 지방의 한 도시에서 자신과 닮은 여자 오은영 때문에 생면부지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폭언과 손찌검을 당하는 이야기다.

하 작가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나의 반쪽’을 설정해 현재의 자신을 반추하면서 개연성이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데, 그 인물들은 어떤 사고를 당한 사람 혹은 그런 사고를 겪을 뻔한 이들이다. 작가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이번 소설집에서 많이 느낄 수 있다. 하 작가는 이전에도 관찰자의 예리한 시선이 돋보이는 소설을 써왔지만, 좀 더 ‘바라보는 데’ 초점을 맞춘 독특한 시선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알파의 시간’이라는 작품은 국도 변에 세워진 간판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내고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엄마의 생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당시에는 몰랐던 엄마의 빛나는 한 시절과 문득 만나게 되는데, 그 순간 ‘나 자신이 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을 경험한다.

인간만의 행복을 맛이라는 감각으로 일깨워

표제로 올린 ‘여름의 맛’은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카레 온 더 보더>로 2013년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하 작가는 한 문학평론가로부터 “신체에 달라붙은 어떤 느낌은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남긴다”는 평을 받았다. 작가가 펼쳐놓은 감각의 세계는 언어가 담고 있는 어떤 의미나 상징을 훌쩍 넘어 인간의 감각기관이 식별하는 느낌 그대로라는 것이다.

‘여름의 맛’에서 하 작가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맛이라는 감각으로 일깨운다. 다음은 이 소설의 한 대목이다.

‘김은 추억의 음식으로 백 명이 자장면을 꼽는다 해도 그 이유가 백 가지로 다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자장면에 관한 추억은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기쁨일 테니까. 맛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맛은 맛이기 이전에 한 개인의 추억이라는 사실이었다. 김은 끝내 공개할 수 없다는 요릿집 주방장의 비법을 캐묻지 않았다. 알고 보니 비밀은 바로 조미료였습니다, 식의 조롱이 아니었다. 레시피보다 음식에 깃든 한 개인의 추억을 재현하는 데 공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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