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가 정치인 살리고 죽인다
  • 최정민│파리 통신원 ()
  • 승인 2013.11.05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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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테인먼트’ 원조는 프랑스…‘웃음’보다는 전문성·소통 능력 중시

정치인과 연예인. 근본적으로 다른 영역의 직업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대중의 사랑과 관심으로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최근 국내에서는 정치인들의 미디어 외출이 잦아지고 있다. 종합편성 채널이 생기면서 프로그램이 양적으로 증가한 탓이다. 특히 예능이 확장되면서 인포테인먼트(뉴스+엔터테인먼트가 결합된 보도)가 유행함에 따라 정치인과 대중의 만남이 방송을 통해 자주 이뤄지고 있다. 가깝게는 지난 대선에서 TV 프로그램 <힐링 캠프>에 등장한 주요 후보들의 행보가 대표적인 정치인의 예능 나들이 사례다. 지금은 종편을 통해 정치인들이 정파를 넘어 방송에 나와 풍선을 터뜨리는 재롱을 부리고, <썰전>이나 <돌직구쇼>처럼 뉴스와 예능이 결합된 프로그램에서 쉽고 재밌는 정치 이야기를 한다.

위기 처한 대통령, 방송 출연으로 반전

정치인들의 방송 나들이가 가장 먼저 정착된 곳은 프랑스다. 프랑스에서는 정치인들이 대중을 만나는 방법을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경우다. 유난히 말하기를 좋아하고 지적인 것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프랑스인들의 기질 때문인데, 특히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는 토론 프로그램에서 얼마나 말을 잘하는가가 선거전의 승패를 가르기도 한다.

프랑스 정치인들의 방송 출연은 말솜씨를 검증받는 시험대다. 2010년, 프랑수아 필론 전 프랑스 총리가 TF1 채널의 대담 프로 출연을 준비하고 있다. ⓒ EPA 연합
두 번째 경로는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인데, 예능이 아닌 자선 행사나 음악회처럼 점잖은 형식에 참여하는 것이 기본이다. 예를 들어 매년 열리는 음식 나누기 행사인 ‘마음의 식당’에는 전·현직 대통령은 물론, 전 영부인인 베르나데트 시라크 여사도 등장한다. 2011년 작고한 다니엘 미테랑 전 영부인 역시 사회운동가 출신답게 자선 행사에 자주 얼굴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정치인들이 대중과 만나는 경로는 라디오 인터뷰다. 프랑스에서는 여전히 라디오의 신뢰도가 높다. 프랑스의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TNS sofres’가 올해 조사해 발표한 바에 따르면, 프랑스인들은 텔레비전(69%), 라디오(33%), 인터넷(27%), 신문(24%) 순으로 정보를 얻는다고 답했다. 신뢰도 조사에서도 라디오는 54%를 얻어 텔레비전을 제치고 가장 높은 신뢰도를 보였다. 매일 아침 7~9시 출근 시간대 각 라디오 채널은 모두 간판 앵커와 가장 입담이 좋은 비평가들로 채워진다. 라디오 채널의 경쟁은 텔레비전의 황금 시간대만큼 치열하다. 출근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서도 라디오를 청취할 수 있기 때문인데 6시30분 이른 새벽부터 초대되는 인사는 대부분 여야의 대표급 의원이거나 정부 각료다. 이들은 그날의 최고 이슈에 관해 주장과 반박을 펼치고 이들의 발언은 뉴스에 그대로 인용된다. 녹화 방송인 텔레비전보다 생방송 라디오 인터뷰에서의 순발력과 입담은 프랑스 정치인들에게 무시무시한 시험대와 같다. 최근 프랑스 정가의 이슈를 모두 빨아들인 발스 장관의 ‘집시 추방 발언’도 라디오에서 시작됐다.

프랑스 정치인들의 방송 사랑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죽어가던 대통령이 TV 문학평론으로 살아난 적도 있다. 과거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난관에 처했을 때 당시 프랑스인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던 문학 토론 프로그램 <아포스트로프>에 출연해 ‘모파상’에 대해 해박한 평론을 펼침으로써 정치적 위기를 극복했다. 데스탱 전 대통령의 방송 출연 후 서점에서는 모파상의 책이 동났다고 한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도 비슷한 경우였다. 프랑스의 독보적인 문학 토론 프로그램 진행자인 베르나르 피보는 미테랑에 대해 “1975년 2월7일 자신의 책이 출간된 것을 계기로 출연한 미테랑은 녹화장을 침묵으로 몰아넣을 만큼 탁월한 문학 비평을 보여주었었다”고 회고하며 “아마도 1974년 선거 전에 방송이 나갔다면 지스카르 데스탱에게 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4년 프랑스 대선 1차 예선에서 미테랑은 데스탱을 누르고 1위에 올랐지만, 결선 투표에서는 30만표의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한국 정치인들이 예능에 출연해 웃겨야 하는 임무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는 순발력을 검증받는다면, 프랑스 미디어는 정치인의 ‘박식함’을 바탕으로 한 ‘말’을 검증한다. ‘말’을 얼마나 조리 있게 잘하는가가 정치 생명을 좌우한다. 2002년 프랑스 사회당 역사상 처음으로 대선 결선에 올라가지 못한 리오넬 조스팽 전 총리의 문제는 정치철학이나 행정 능력이 아니었다. 1차 투표에서 극우파 후보인 르펜에게도 뒤진 것을 두고 그의 선거 참모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리오넬, 당신은 말을 너무 어렵게 해.” 조스팽은 해박했지만 소통에는 실패했던 셈이다. 조스팽 전 총리의 부인은 프랑스 현대 철학의 거장 자크 데리다의 연인이었던 철학자 실비안 아가진스키다.

미디어에 등장하면서 이득을 얻은 쪽은 극우 정당이었다. 선동적인 말과 실천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쏟아내는 공약은 미디어 환경에서 효과적이었다. 프랑스 정가에는 “극우와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 우파인 시라크 대통령이 극좌인 아를레트 라기에와는 말을 해도 극우인 장 마리 르펜과는 대면하지 않았던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2002년 대선에서 우파와 극우 후보가 결선에 올랐을 때도 전례였던 일대일 토론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극우 정당이 20%대의 꾸준한 지지율을 얻자 미디어도 극우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됐다. 무엇보다 자극적인 극우의 미디어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능력 있어 발탁되었다고 보나” 돌직구 예사

한국보다는 덜하지만 프랑스의 이런 환경 속에서 정치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연예인처럼 다뤄진다. 현재 올랑드 내각의 여성 정치인인 나자 발로드 베카셈 대변인, 오렐리 필리페티 문화부장관, 플뢰르 펠르랑 디지털경제부장관의 외모는 연예인 못지않다. 이들이 여름휴가를 즐기며 입은 비키니 사진은 <브와시>

(voici)나 <갈라>(Gala)와 같은 연예 주간지의 표지를 장식한다. 독일 메르켈 총리의 의상을 혹평했던 샤넬의 수장 카를 라거필드조차도 “필리페티 장관의 의상은 탁월하다”며 칭찬했을 정도다.

미디어가 정치인을 연예인처럼 취급한다고 해서 외모가 만사형통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 한국계 첫 장관이자 뛰어난 외모로 화제가 되었던 펠르랑 디지털경제부장관은 올랑드 내각에 발탁된 다음 날인 2012년 7월23일 프랑스 라디오인 ‘유럽2’에 출연해 대담을 했다. 진행자인 다니엘 쉬크는 첫 질문부터 “당신이 능력이 있어서 발탁되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돌직구’를 날렸다. 진행자의 독설은 계속 이어졌다. “당신이 비주류라서, 혹은 입양아 출신으로 성공한 사례를 만들기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아시아 시장 공략용으로 발탁된 것 아니냐” 등등.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괴팍할지도 모를 이런 질문 행태는 프랑스의 라디오 대담에서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출연자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는지를 검증하는 절차다. 펠르랑은 독설에 동요하지 않고 웃으며 “당신의 출발이 아주아주 좋지 않다”고 앉은 자리에서 받아치고는 자신이 발탁된 이유를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대며 진행자의 독설에 반박했다. 프랑스 미디어에 출연하는 정치인으로서 첫 번째 통과의례를 치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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