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떼 부리지 마, 아베와 밀애 좀 나누게”
  • 김원식│미국 통신원 ()
  • 승인 2013.12.0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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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정가 친일파가 장악…한국 입지 급속 위축

“우리 양국은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강화하는 데 공헌하고 있는 일본의 안보·국방 정책에 대한 재정립(re-examine) 노력을 지지하기로 하는 데 동의합니다.”

11월20일 ‘미국·호주 안보 관계 장관회담’이 끝난 후 발표된 공동선언문은 이처럼 일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본의 안보·국방 정책에 대한 ‘재정립’은 쉽게 말해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집단적 자위권 보장을 통한 군사력 증강을 의미한다. 선언문은 “양국은 항해 자유와 지역 해상 안보뿐만 아니라 인도주의적인 재난 구조 등을 위해 일본이 지역 안보와 군사적 능력을 강화하는 데 함께 협력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미국과 호주 양국 간 회담에서 일본이 마치 주인공처럼 등장한 것은 아리송한 일이다. 이날의 회담은 일본의 군사력 강화라는 명분을 지지하는 대열에 미국뿐만 아니라 호주도 동참했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10월3일 열린 미·일 외교·국방장관 회담(2 2 회담)에서 미국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 EPA 연합
국제 문제 전문가들 “한국이 사라졌다”

미국이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중국 견제에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날 발표된 선언문에서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가 언급됐다. “양국은 동중국해에서 현상을 바꾸려는 강제적이고 일방적인 행위에 반대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고 분명히 밝혔는데, 최근 이 지역의 불안정한 상태를 두고 중국 견제, 일본 지지의 입장을 분명히 못 박았다.

미국은 이미 자국의 외교·군사 정책의 핵심을 아시아로 이동하겠다고 선언했다. 중동에서 미군은 철수 과정을 밟고 있고 때마침 부상한 중국의 군사대국화도 견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2010년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외교 전문 잡지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에 기고한 글에서 ‘아시아 중심(Pivot to Asia)’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가며 미국의 대외 정책이 변화될 것임을 알렸다. 공교롭게도 미국·호주 안보 관계 장관회담의 성명이 발표된 날인 11월20일, 미국의 외교 정책 사령탑인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워싱턴 조지타운 대학 강단에 섰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 미국의 정책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아시아·태평양 재균형(re-balancing) 전략은 오바마 외교 정책의 주춧돌(cornerstone)이다. 아무리 많은 분쟁 지대가 있더라도 아시아에 대한 책임과 역할을 다하겠다. 아시아의 우방들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가장 높은 수준의 관심을 받아야 한다”며 라이스는 아시아에서의 안보력 강화가 핵심 이행 과제라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라이스가 밝힌 계획은 이랬다. 일단 2020년까지 미국 해군력의 60%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를 위해 태평양으로 이동해 미국의 군사적 자원을 재배치할 것이며, 아시아 방위에 대한 책임을 동맹국 혹은 우방국들이 함께 나눠진다는 것이다. 특히 “15년 넘게 유지해온 미·일 상호방위조약 개정 협상을 내년 중에 마무리 짓겠다”고 밝혀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집단적 자위권을 조약 개정에 담을 생각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이 구상하는 아시아 중심 외교가 현실적으로는 ‘일본 중시 정책(Pivot to Japan)’이라는 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동북아 정세는 급변하지만 국제 문제 전문가들의 중심에 ‘한국’은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올 만큼 한국은 어느새 종속변수가 돼버렸다.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려면 한·미·일 삼각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지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반면 미국의 정책은 한국 정부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해외 언론들은 한국의 불만을 알면서도 일본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워싱턴의 분위기를 자주 전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군국주의로 회귀하는 일본에 대한 한국의 우려를 알지만, 미국 정부는 중국의 야심을 봉쇄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간다”고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도 “백악관은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동맹이자 파트너인 한일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커트 캠벨 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한일 관계 악화를 해결하는 일은 미국이 아시아의 이해관계를 담당하는 데 가장 큰 전략적 도전이다”라고 지적했다.

한일 관계에 대한 우려는 있지만 백악관은 플레이어로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는 분위기다. 백악관 고위 관리들의 입장은 이렇다. “미국은 한일 관계가 악화되는 것에 대해 우려한다. 하지만 그들 사이를 우리가 개선시킬 수는 없는 입장이다”라거나 “우리는 두 나라가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원한다”로 정리된다. 일본의 군사력 강화를 원하고, 그래서 일본을 중심에 놓아두고 있지만, 이를 반대하는 한국을 설득할 현실적인 논리도 없기 때문에 그저 바라만 보는 셈이다.

한국 설득 실패하자 곧바로 일본 자위권 인정

한국을 설득하기 위한 작업은 나름으로 했다. 9월에는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이 청와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에 와 아시아 중심 정책을 설명하고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와 협력을 요청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일본이 진실하지 못하다”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미국은 개의치 않았다. 바로 다음 달인 10월, 일본과 가진 외교·국방장관 회담(미·일 2+2회담)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추진하는 데 동의해버렸다. 군사적 야망에 관해서 일본과 미국이 나누고 있는 밀담에 비하면 한국의 반대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한미 동맹을 최고선으로 여기던 한국과 달리 미국은 애초부터 일본의 역할에 대한 긍정론을 펼쳤다. 평화헌법 9조의 개헌에 미국이 찬성하는 흐름을 보인 지가 벌써 10여 년이 흘렀다.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워싱턴의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여전히 일본과 워싱턴 간의 파이프 역할을 하고 있는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은 그런 흐름을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그는 “내가 아미티지 리포트를 통해 담고 싶은 것은 21세기 안전 보장이 확보된 일본의 모습이다. 이 리포트를 통해 언급하고 싶은 것은 미·일 동맹과 국제사회의 안정을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때 평화헌법 9조가 방해가 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지금도 아미티지의 조언과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바마 행정부 2기의 아시아 외교팀이 처음 구성됐을 때도 사실 이런 사태는 예견됐다. 올해 8월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에 오바마의 측근 중 한 명인 대니얼 러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담당 선임 보좌관이 임명됐다. 오바마가 새로운 외교로 천명한 아시아 중시 전략을 주도적으로 맡을 인물로 선정된 러셀을 두고 언론들은 “미·일 동맹을 중심축으로 하며 동시에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 미·중 관계에의 대응도 고려한 포석이다”라고 평가했다. 러셀은 대표적인 지일파로 오사카·고베 총영사 등을 역임한 직업 외교관이라 일본어에도 능통하다. “미·일 관계를 중심에 놓겠다”는 백악관의 의중은 이때부터 명확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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