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독일 모델’ 잘 달릴 수 있나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3.12.1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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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철도 경쟁 로드맵’, 독일의 경쟁 방식과 달라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노사 분규가 점입가경이다. 12월9일 철도노조는 ‘수서발 KTX 분리를 위한 철도공사 임시 이사회 즉각 중단’을 내걸고 파업에 돌입했다. 사측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12월10일 임시 이사회를 열어 ‘수서발 KTX 운영회사 설립을 위한 출자’를 의결했다. 강경 대응도 이어졌다. 파업 나흘째인 12월13일 현재, 철도노조 조합원 191명을 업무방해로 고소·고발하고 7611명을 직위 해제했다.

코레일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민영화 진실 게임으로 흐르는 양상이다. 정부와 사측은 코레일이 41%, 공공기금이 59% 지분을 출자하는 수서발 KTX 회사를 두고 “절대 민영화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노조는 믿지 않는다. ‘알짜 노선’을 별도의 법인으로 분리하는 것이 철도 민영화의 전초라고 주장한다.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이라는 같은 상황을 두고 시각이 서로 완전히 엇갈린다. 갈등이 쉽사리 봉합되지 않는 이유다.

12월11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철도 민영화 저지 파업투쟁 야간문화제’에서 철도노조 조합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독일은 사업 부서별 자회사 설립

‘민영화 프레임’에서 한 발짝 비켜서보자. 정부가 공기업인 코레일에 경쟁 체제를 도입한다는 점이 현재 갈등의 근본 원인이다. 그 배경에는 코레일이 만성 적자에 시달린다는 사실이 있다. 2004년 철도청으로부터 철도시설공단이 분리돼 공사(公社)화한 이래, 코레일은 매년 수천억 원대의 영업적자를 누적해왔다. 정부가 도입하려는 경쟁 체제는 이런 상황을 해결할 바람직한 정책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지금 ‘민영화’라는 표면적인 갈등 전선이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차단하는 형국이다.

정부의 철도 경쟁 체제 도입 ‘로드맵’은 2013년 6월 발표됐다. 국토교통부의 ‘철도산업 발전 방안’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있다. 경영 투명성과 전문화를 위해 ‘독일식 지주회사제’를 응용하는 것을 코레일 개편의 기본 방향으로 제시한 점이다. 철도 운영 부문에 독일식 경쟁 모델을 적용하되 ‘우리 여건에 맞는 형태’로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독일은 어떤 방식으로 철도에 경쟁 체제를 도입했을까. 정부는 이것을 어떻게 국내 철도산업에 적용하려는 것일까. 국내 철도 전문가들의 독일 철도 개혁 연구 결과와 정부의 ‘철도산업 발전 방안’을 비교·분석해보면 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철도산업이 해마다 적자를 거듭하는 현상은 국내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을 비롯한 대다수 국가가 비슷한 양상을 겪었다. 자동차산업이 급부상하면서 도로 교통이 중심이 된 게 가장 큰 원인이다. 1970년대 이후 철도산업은 세계적으로 하향세를 면치 못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낙후된 동독 철도의 개혁이 필요했다. 서독 철도 역시 매년 늘어나는 적자(1990년 당시 470억 마르크)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독일 정부는 1989년부터 철도산업 구조 개혁을 시작한다. 방법은 ‘지주회사 제도’로의 전환이었다. 오윤식·김병관 한국철도공사 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1992년 7월부터 본격화된 개편으로 서독철도·동독철도·서베를린철도로 나뉘어 있던 독일의 철도공기업은 지주회사 ‘독일철도주식회사(DBAG)’ 아래 ‘장거리 여객 수송’ ‘근거리 여객 수송’ ‘화물 수송’ ‘선로 관리’ ‘역사 운영’ 등을 담당하는 5개 자회사로 분할된다. 특정 노선이 아니라 사업 부서별로 자회사가 설립된 것이다.

중요한 점은 각 사업 부문이 공정한 경쟁을 벌일 수 있도록 국가에서 지원책을 폈다는 것이다. 각 사업본부별 독립 회계를 통해 책임경영의 토대를 마련하면서도 ‘기울어진 경기장’이 되지 않도록 조치했다. 우선 근거리 여객 수송 부문에 대해서는 공공 서비스 의무(PSO)를 면제했다. 노약자·장애인 할인이나 지방 벽지 노선 운영 등 공공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근거리 운행에 PSO를 면제한 것이다.

특히 적자 노선에 대해서는 연방정부가 주정부에 ‘지방화기금’을 투입했다. 한동안 적자 노선은 보조금 60%, 여객 수입 40% 식으로 운영됐다. 2006년 관련 예산이 삭감된 뒤에도 보완책으로 주정부에 부가세 할당을 높이는 방향으로 지원이 이어진다. ‘적자 노선에 합리적인 제도 장치 마련을 통해 경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유도 장치’였다.

각 사업 부문의 ‘출발선’을 최대한 같게 조정해 경쟁 효과를 발생시켰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운영은 지주회사 DBAG가 관할해 유기적인 체계를 갖추는 식이다. 구춘권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독일 철도가 개편을 통해 “과거의 ‘관청 철도’에서 벗어나 운송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글로벌 플레이어의 하나로 변신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정부의 방안은 어떨까. 외형적으로는 독일식 지주회사제와 유사하다. 특히 화물, 차량 관리, 철도 시설, 부대사업 등으로 사업 부서별 자회사 설립을 계획한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여객 부문은 다르다. 독일이 장거리와 근거리 등 사업 부문별로 나눴던 데 반해, 정부는 특정 노선별로 독립 자회사 설립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

지주회사 코레일은 단거리 노선인 ‘간선 여객 운송’ 기능을 떠안는다. 코레일로서는 알짜 영업이 가능한 노선을 ‘수서발 KTX’ 자회사에 떼어준 후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실적 경쟁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특정 노선별로 자회사가 설립되는 경쟁 체제는 독일식보다는 영국식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뿐 아니다. 정부안에는 신규 및 적자 노선을 민간에 개방하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 코레일이 운영을 포기할 경우 민간 입찰을 통해 운영자를 선정하도록 했다. 알짜 신규 노선은 민간에 넘기고, 적자 노선은 ‘공공성’을 무시한 채 없애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소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은 “국토교통부는 철도 개편 방안이 독일식이라고 주장하지만 시설과 운영이 분리된 채 선별 입찰제를 통해 민간 사업자를 진출시키는 것은 이미 실패한 방식으로 평가받는 영국식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4년간 협상 끝에 철도 개혁 합의한 독일

구춘권 교수는 독일의 철도·우편·정보통신 영역의 경쟁 시스템 도입 과정을 검토한 후 “영미식 자본주의 모델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성격”이라고 결론 내렸다. 박흥수 연구위원은 “독일 정부가 1989년 철도 개혁을 추진하면서 가장 열심히 의견을 구했던 대상은 철도노조였다. 전문가·노조·정부·시민이 머리를 맞대고 4년간 지루한 논의와 협상을 거쳐 독일 철도의 개혁안에 대한 합의가 도출됐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수단들(경쟁의 도입 내지는 민영화)은 경영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이점도 있지만 반면에 많은 기회비용을 발생시키는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어 정책과 제도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최연혜 코레일 사장이 지난 1998년 발표한 논문 ‘유럽 주요국 철도 민영화와 시사점’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잘 설계된 정책과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학자 출신의 사장은 취임 후 두 달 만에 대대적인 노사 분규에 휩싸였다. 지금 최 사장은 자신이 15년 전 쓴 문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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