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떠올리면 불온한가
  • 허남웅│영화평론가 ()
  • 승인 2013.12.1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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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주인공 송강호…상식 지키려는 소시민 영웅담

최근 <변호인>에 출연한 송강호와 관련해 의도가 불분명한 기사, 아니 제목이 떠서 인터넷이 떠들썩하다. ‘송강호 <변호인> 후 작품 섭외 끊겨, 데뷔 후 처음’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요지는 이렇다.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년)로 스크린에 데뷔한 이래 송강호는 줄곧 자신이 출연한 영화가 개봉할 때면 차기작 2~3편 정도를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번만큼은 참여하고 있는 작품이 없어 오랜만에 재충전 시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제목만 봐서는 꼭 <변호인>이 원인이 돼 작품이 안 들어오는 것처럼 호도되고 있는 것이다.

<변호인>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돈만 밝히는 변호사에서 인권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변호사로 변해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부림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이 영화에서 송강호는 노무현을 모델로 한 인물인 송우석 변호사를 연기한다. 1980년대 초반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던 송우석은 고졸 출신이라는 이유로 동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받는다. 하지만 부동산 열풍을 타고 부동산 등기와 세금 자문을 전문으로 하면서 돈 잘 버는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셋방살이에서 아파트 입주자가 되고 취미로 요트를 몰 정도로 생활이 안정된 송우석은 7년 전 밥값 신세를 졌던 국밥집을 찾아가 뒤늦게 사과하고 단골이 된다. 하지만 국밥집 주인아주머니 아들이 불온서적을 읽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되면서 송우석은 자각의 순간을 맞게 된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불온서적으로 지정된 이유도 황당하지만 그걸 읽었다고 빨갱이로 몰려 고문당하는 현실에 개탄하고 상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는 것이다.

ⓒ NEW 제공
노무현 연상시키는 외모나 호칭은 없어

살펴본 일화들은 대개 노무현의 실제 삶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노무현의 잔상을 지우고 <변호인>을 보게 되면 상식을 지키기 위해 힘쓴 소시민의 영웅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노무현을 직접 연상시키는 외모나 호칭 등이 완전히 배제돼 있다. 이 때문에 항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것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며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 정부의 외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돌기도 했다. 이에 대한 <변호인> 제작사 측의 답변에 따르면, 영화를 만드는 동안 어떠한 외압도 없었다고 하니 그저 음모론적인 시각일 뿐이다.

다만 그런 추측이 나오는 배경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는 있겠다. 지금 우리 사회는 현 정부와 관련한 이념이나 사안에 반(反)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전반에 깔려 있을 정도로 경직된 상황에 처해 있다. <변호인>은 그와 같은 분위기를 우회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1980년대의 특정 사건을 끌고 온 것으로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부가 임의로 지정한 ‘불온서적’이라는 책을 읽었다고 체제 반역자로 낙인찍고, 그런 이들을 변호했다고 빨갱이로 매도하는 극 중 묘사는 한국의 작금 상황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영화는 그와 같은 비극적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요컨대 행동의 주체는 백 없고 돈 없고 가방끈 짧은 보통 사람(들)이 될 때 더 강력한 힘을 갖지 않겠느냐는 것이 <변호인>의 입장이다. 송우석 역에 그 어떤 잘나고 인기 많은 배우보다 송강호가 캐스팅된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이는 송강호가 못나고 인기가 없다는 의미에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송강호는 좌절은 하되 포기하지 않는 소시민의 이미지로 지금껏 롱런해온 배우다. <반칙왕>(2000년)의 대호는 회사에서는 무능하고 집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식이지만 스트레스를 레슬링으로 푸는 보통 사람이었고, <괴물>(2006년)의 강두는 한강에서 어렵게 매점을 운영하는 약자임에도 괴물에게 납치당한 딸을 구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먼저 행동에 나서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였다. <밀양>(2007년)의 종찬은 좋아하는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고백할 마음은 없지만 뒤에서 묵묵히 도움을 주는 카센터 직원이었다.

지금껏 송강호가 맡은 역할에는 어떤 이념이나 정파, 집단의 이익에 복무하기보다 그저 삶을 위해 노력하는 보통 사람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그래서 출연하는 영화가 SF든 판타지든 공포든 그가 가진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이미지가 장르의 허황됨(?)을 넘어서 사실성을 획득했다. 그래서 올해 그가 출연한 세 편의 영화는 각기 다른 시간대, 즉 과거(<관상>), 현재(<변호인>), 미래(<설국열차>)를 넘나들었음에도 하나같이 관객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런 점에서 <변호인>은 노무현이 아니라 송강호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송강호라는 소시민을 전면에 내세운 보통 사람들의 영화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인 것이다.

그런데 <변호인> 때문에 섭외가 끊겼다고? 해당 제목을 지은 이도 그 자신이 얼마나 창피했던지 특정 단어를 슬쩍 추가해 얼마 후 제목을 이렇게 바꿨다. “송강호 익살 <변호인> 후 작품 섭외 끊겨, 데뷔 후 처음” 올해만 3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쉼 없이 달려온 송강호가 충분한 휴식 후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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