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저’라고 얕보지 마 나에겐 희망의 사다리가 있어
  • 이규대 기자·조은혜 인턴기자 ()
  • 승인 2013.12.3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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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 4인의 이야기

청년을 ‘잉여’로 만드는 사회 구조는 실제로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그 누구도 ‘잉여’가 된다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세상에서 과연 청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20대 중·후반의 청년 4명을 만났다. 그들을 심층 인터뷰한 후, 그들의 말과 삶을 수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각 청년들은 서로 다른 삶의 조건들을 지녔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던 청년이 있는 반면, 뚜렷하게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한 청년이 있다. 명문대라는 학력 자본을 지닌 청년도, 그렇지 않은 청년도 있다. 가혹한 경쟁 구도 앞에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좌절했던 청년, 이런저런 인생 경로를 저울질하다 시간을 보낸 청년, ‘저품질’의 일자리를 전전하며 세상의 법칙을 몸으로 깨달은 청년 등 사례는 다양하다. 서로 같고 또 다른 삶의 조건들이 그물망처럼 얽히며 오늘날 청년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네 청년의 수기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잉여’다. 각기 처한 조건은 다르지만 취업을 못했다는 이유로, 한 사람의 직업인 몫을 해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들은 잉여의 속성을 공유한다. 하지만 잉여라고 해서 희망을 모르겠는가. 그들은 사회의 나머지가 되는 것을 거부하려 한다. 사회의 쓸모없는 존재로 남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희망을 이야기한다. 불안과 낙관이 반반씩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 시사저널 구윤성

광주광역시 조 아무개씨(25·여)

현실 없는 꿈은 ‘낭비’에 불과했다

ⓒ 일러스트 오상민
내 꿈은 라디오 PD였다. 고등학생 시절,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후 정겨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라디오 방송을 만드는 사람을 꿈꿨다. 그런데 난 이과생이었다. 라디오 PD 지망생을 위한 전공을 선택할 수 없었다. 수능 점수도 좋지 않았다. 일단 주변의 권유를 따랐다. 내가 사는 지역 인근 대학의 공대에 지원해 합격했다. 2009년의 일이다.

기대가 있었다. 대학에 가면 내가 살고 싶은 삶을 개척하고 싶었다. 전공 서적에 파묻혀 대학 생활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다시는 못 올 청춘이기에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학하자마자 대학 방송국에서 활동했다. 재미있었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해 내 시간을 투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전공 공부는 멀리했다. C로 도배된 성적표를 받아들기 일쑤였다.

라디오 PD라는 꿈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려 신문방송학과로 전과를 하려고 했다. 실패했다. 낮은 성적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도 최소한의 ‘스펙’은 필요했다. 좌절은 나를 학과 공부에서 더 멀어지게 했다. 2년 동안 방송국 생활에 몰두했다. 학점은 바닥을 쳤다. 학교 방송국의 활동 가능 기간은 2년으로 제한된다. 허무해졌다. 할 것이 없었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2년 동안 내 전부를 바쳤던 모든 게 한순간에 끝난 기분이었다. 휴학을 선택했다.

라디오 PD라는 직종의 살인적인 경쟁률이 늘 나를 짓눌렀다. 지방대의, 관련 전공생도 아닌, 가진 것이라곤 고작 학교 방송국 활동 경험밖에 없는 나를 방송국에서 뽑아줄 리가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하면 라디오 PD가 될 수 있을지 전혀 길이 보이지 않았다. 휴학하는 1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방법을 찾을 수 없어 방황했다. 온갖 ‘잉여짓’으로 하루를 보냈다. 집에 눈치가 보여 사설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 정도가 그나마 ‘덜 잉여적인’ 행동이었다.

1년 만에 돌아간 학교는 전쟁터 같았다. 동기들 대다수는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누가 취직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왔다. 나처럼 다른 데 신경을 쏟고 목적 없는 휴학을 하는 건 시간을 ‘낭비’하는 일과 같았다. 정신이 퍼뜩 드는 느낌이었다. ‘살아남으려면 사회에서 원하는 것에 맞춰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경영대 전공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느꼈다. 기업 인사 담당자가 나를 뽑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어느 것 하나 갖춘 게 없다. 학과 성적이 좋고 ‘스펙’을 많이 쌓은 친구조차도 “대기업의 기획·전략 쪽은 원서를 쓸 수도 없다. 학력 탓이다. 우리 같은 지방대는 영업 쪽밖에 쓸 수 없는 분위기”라고 말하곤 한다. 그에 비하면 지방대 출신에 학점도 바닥인, 공모전 수상 경력이나 좋은 영어 성적도 없는 나는 그야말로 ‘잉여 중의 잉여’라는 생각이 든다.

졸업은 유예됐다. 계절학기까지 수업을 빡빡하게 채워 듣는다. 재수강을 통해 학점을 세탁한다. 어떻게든 ‘스펙’을 쌓아보려 노력한다. 그래도 일반 기업 입사는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라디오 PD가 되겠다는 꿈은 접은 지 오래다. 학력도 스펙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시험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기업, 즉 공사나 공단이 도전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2014년의 내 꿈은 스펙 3개를 따는 것이다. 토익 고득점, 한국사 그리고 컴퓨터 자격증이다.

 

 

서울 관악구 문 아무개씨(27·남)

19전 4승15패, 승률 2할1푼

ⓒ 일러스트 오상민
나는 명문대에 다닌다. 대학 서열 구조의 최상층에 있다. 맞다. 일반적인 청년들에 비해 취업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취업 목표도 국내 유수의 대기업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내가 쥔 학력 자본이 취업의 보증수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2013년은 그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19전 4승15패. 승률 2할1푼. 2013년 내가 거둔 서류 전형 성적이다. 상반기까지는 취업 준비만 했고, 하반기에만 19개의 이력서를 집중적으로 썼다. 그중 ‘승리’한 경험은 불과 4번뿐이었다. 그나마 학벌을 우대한다는 평판이 나도는 기업들이었다. 그중 2곳에선 필기 전형에서 떨어졌다. 나머지 2곳에선 최종 면접에서 물을 먹었다.

내가 그렇게 실력이 떨어지는지 고민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스펙’과 실력을 갖춘 듯 보이는 친구들 중 상경계열 전공을 가진 친구들은 확실히 취업이 잘된다. 나는 어문계열이다. 기업이 선호하는 전공이 아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내가 택한 전공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즐겁게 공부했다. 하지만 취업 시장에서는 결격 사유가 된다.

이를 미리 간파한 친구들은 경영학이나 경제학을 복수전공·부전공으로 택해 들었다. 그마저도 워낙 수요가 많다 보니 4점 이상의 경이로운 학점을 보유한 친구들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애초 그런 마음을 먹지도 않았지만, 3점대 중반을 겨우 넘는 내 학점으로는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서야 ‘경영 동아리’ 활동을 1년 반가량 했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자립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동아리다. 지금 학교 안에는 ‘경영’을 주제로 한 동아리가 많다. 관련 활동을 내 이력서에 추가할 수 있었지만, 2013년 취업문을 뚫기에는 역시 부족했나 보다. 유럽권에 어학연수를 다녀온 경험도 부족한 스펙이긴 마찬가지였다.

경영대에 다니는 한 친구는 영어와 중국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한다. 학점도 좋고 유수의 기업에서 인턴 생활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번번이 취업 문턱을 넘는 데 실패한다. 친구는 자신의 스펙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우울해했다. 모든 문제가 부족한 자신 탓인 듯이 생각했다. 나보다도 훨씬 뛰어난 조건을 갖춘 친구에게 “취업이라는 것엔 운도 많이 작용한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위로였는지는 사실 확신하지 못하겠다.

학생들 사이에서 분위기가 점점 바뀌는 것을 체감한다. 로스쿨·의학전문대학원 등으로의 진학, 인기 학과 복수전공, 해외 대학 교환학생 등을 둘러싼 경쟁이 점점 심해진다. 높은 학점을 얻기 위해 학생들은 치열하게 공부한다. 또 저학년 때부터 충실하게 자기 관리를 해야 한다는 의식이 과거에 비해 훨씬 강해진 느낌이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할 때마다 조금 씁쓸해진다.

더욱 씁쓸한 게 있다. 내가 정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절박하게 취업문을 두드리곤 있지만,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위한 것인지 확신이 없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사치라는 걸 이미 잘 안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 앞에 열린 가능성도 하나둘 닫혀갈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 취업에 실패하다 정말 내가 원하지 않는 기업에서 일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

요즘 난 기업의 공모전 응모와 한자 자격증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주변 시선에 개의치 않고, 마음을 굳게 먹고, 긍정적인 자세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2014년 하반기 전까지는 꼭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다.

 

전남 순천시 홍 아무개씨(28·남)

임용고시, 공무원시험, 다시 로스쿨 입시

ⓒ 일러스트 오상민
벌써 스물여덟이다. 아직 변변한 직장이 없다. 생계를 위해 학교 학과사무실에서 임시 조교를 하고 있다. 당초 6개월에서 1년 정도 조교로 일하며 준비해 취직하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1년이 훌쩍 넘었다. 당장은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 최소 6개월은 더 할 것 같다. 새로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생 때는 공부만 하느라 한가할 시간이 없었다. 대입 준비로 바빴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채 살았다. 수능이 끝났다. 부모님은 나에게 사범대에 가서 교사가 되라고 했다. 딱히 가고 싶은 학과가 없었기에 그 말을 받아들였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스스로가 ‘잉여’처럼 느껴졌다. 마음에 다가오는 게 없었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 그냥 학교만 다녔다. 군 복무를 마치고 졸업할 때까지 인생의 좌표를 설정하지 못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몰랐기 때문이다. 졸업까지 하고 나니 무엇인가 정해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다. 이젠 하고 싶은 것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수능을 다시 보는 것까지도 생각했다.

어쨌든 사범대를 나왔으니 임용고시 준비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임용고시 경쟁률이 만만치 않았다. 학과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도 아니다. 적게는 7 대 1, 많게는 20 대 1을 뛰어넘는 시험을 준비해 잘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무엇보다 교원이 된다 해도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조금 준비를 해보다가 마음을 접었다.

다음으로 눈길이 간 것은 공무원시험이었다. 변변한 스펙이 없던 내게 공부로만 승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아 보였다. 낮에는 조교 일로 돈을 벌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하지만 몰입해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 역시 금방 포기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취업을 준비해온 친구들을 따라 이 기업 저 기업에 원서를 넣어봤다. 역시나 안 됐다. 당연한 결과였다. 내겐 스펙도 준비도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었다. 1차 서류 전형에서 나를 붙인 곳도 대개 2차 전형에서 쳐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노력했을 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고민해본 적이 없다. 그 결과 20대에는 마음을 붙일 곳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대학 전공 지식이 하나도 없다는 자책이 들었다. 인생을 뭔가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그런 내게 로스쿨이 눈에 들어왔다. 로스쿨을 졸업한 후 변호사 자격증을 따면 내가 잉여를 탈피해 사회에 쓸모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대학의 로스쿨이라도 나를 받아주기만 한다면 가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불안하다. 스물여덟나이에 뒤늦게 시작한 준비다. 로스쿨에 합격할 수 있을지, 설령 합격한다 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내 2014년 목표는 ‘로스쿨 합격’이다. 합격하고 나면 스스로나 주변에 대해 조금 더 당당해질 것 같다. 그 이후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려 한다.

 

 

 

인천광역시 오 아무개씨(26·남)

오늘도 ‘마이크’를 꿈꾼다

ⓒ 일러스트 오상민
공부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 공부는 항상 재미가 없었다. 성적도 좋지 않았다. 어차피 잘하지도 못할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업계 고등학교 식품가공과에 들어갔다. 요리에 관심이 있어서다. 내가 한 요리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면 보람이 있을 것 같았다. 특히 고등학교 3학년 때 배운 제빵이 재밌었다. 충청권의 한 전문대 제과제빵과에 입학한 계기였다. 그런데 대학은 기대 이하였다. 실습 기구들은 고등학교 때보다 열악했다. 그런데도 학기당 320만원의 등록금이 필요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부담이 되는 액수였다.

제과·제빵 경력도 쌓고 등록금도 벌 겸 서울의 한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빵집 인근 판잣집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점이 메리트였다. 마침 12월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케이크 수요가 폭발하는 시기다. 빵을 반죽하거나, 달걀을 깨서 풀고 밀가루를 준비하는 일을 주로 했다.

아침 여섯 시에 출근해 밤 열한 시까지 일했다. 급여는 80만원이었다. 임시직이기 때문이다. 단순 작업의 반복이기에 일은 재미가 없었다. 정말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한 것인지 회의가 들 정도였다. 돈도 실력도 부족한 나는 대학을 졸업해도 이런 일자리를 전전해야 할 터였다. 제빵사를 향한 의욕이 사그라졌다.

군 복무를 마치고는 인천의 한 호텔에 일자리를 구했다. 주방 보조 일과 테이블 세팅을 주로 했다. 역시 비정규직이었다. 시급은 5000원, 한 달 일하면 130만원이 손에 들어왔다. 8개월 정도 근무하자 호텔 인사과 쪽에서 그만두길 바란다는 얘기가 들렸다. 1년 동안 ‘알바’로 일하면 정직원으로 채용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잡음을 일으키는 대신 깨끗이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레크리에이션 MC였다. 행사를 능숙하게 진행하며 청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워낙 ‘떠드는’ 걸 좋아하는 터라 나도 저런 일을 하면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레크리에이션 MC와 친분을 쌓게 돼 한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행사 진행 요원부터 차량 운전까지 궂은일을 몇 달간 도맡아 해도 전혀 돈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하다간 인생 도태된다”는 다른 업계 관계자의 말을 들었다.

어렵게 다른 행사 전문 업체에 ‘고정 알바생’으로 들어갔다. 행사가 잡혔다는 연락이 오면 거기로 달려가 진행 요원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형’들의 진행 솜씨를 곁눈질로 배우는 것이다. 한 주에 2~3건 정도의 행사를 소화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 내 월수입은 50만원 안팎이다.

물론 내 미래가 불안하다고 느낀다. 내가 바라는 대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유명 레크리에이션 MC가 될 수 있을까. 이렇게 알바만 전전하다 마이크 한번 못 잡아보는 건 아닐까. 월수입 50만원에 마이크도 못 잡는 나는 지금은 업계의 ‘잉여’에 불과하다. 가끔씩 불안해진다. 서울에만 레크리에이션 MC가 4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들과 경쟁하며 업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열정적으로 배우고 준비하겠다는 다짐밖에 할 수 없다. 일단 능력만 인정받으면 어떠한 배경도 필요 없이 성공할 수 있는 곳이 이 업계다. 그러니 2014년에는 일단 마이크를 한번 잡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게 새해를 맞는 내 희망이자 각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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