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가치 짓밟히는 모습에 분노”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4.01.0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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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9명의 <변호인> 감상평…관람 과정에서 ‘현실’ 의식

2013년 12월31일 오후, 신정 휴일을 앞둔 서울 삼성동의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인파로 붐볐다. 세밑 극장가의 ‘대세’는 단연 <변호인>이었다. 총 16개 상영관 중 4개를 점유하고 있었다. 평일 낮임에도 관객들이 좌석을 가득 메웠다. 관람층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막 영화를 보고 나온 시민 9명을 만났다.

고등학생부터 환갑을 맞는 중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령대의 시민과 접촉했다. 이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왜 <변호인>을 보기로 결심했는지’ ‘보고 난 후의 감상은 무엇인지’다. 시민들의 답변은 크게 세 갈래의 흐름을 보였다. 발언 속에 등장하는 핵심 개념을 꼽아보면 ‘민주주의’ ‘노무현’ ‘현 시국’이다. 상당수 시민은 <변호인>을 보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떠올렸다. 그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억했다. 현 시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영화 관람에 투영하기도 했다.

영화 속 ‘1980년대’에 반응했다

박무용씨(60·남)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휴일을 앞두고 모처럼 영화관을 찾은 그는 별 생각 없이 <변호인>을 선택했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감명받았다. 하루하루 살기에 바빠 잊고 있었던, 엄혹했던 과거 군사정부 시절이 영화에 담겨 있었다. 박씨의 눈시울을 흔든 건 ‘인권’이라는 가치였다. 공권력이 인권을 유린하는 모습이 특히 가슴 아팠다. 민주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인권 변호사 노무현’을 떠올리며 감동했다.

<변호인>의 시대적 배경은 1987년 민주화 전이다. 군사 독재 시절이다. 당시 공권력이 죄 없는 시민을 어떻게 ‘빨갱이’로 만드는지가 생생하게 재현된다. 관객들은 영화가 되살린 1980년대와 호흡했다. 박씨처럼 민주적 가치가 짓밟히는 모습에 분노하고 눈물 흘렸다는 반응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1980년대를 겪지 않았던 젊은이들도 영화가 재현한 시대상에 뭉클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대학생 정유진씨(24·여)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고문 피해자들의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고문의 고통을 참지 못해 죄를 거짓 자백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을 연민했다. 특히 그들이 법정에서 증언하다 흐느끼는 장면에서 슬픔을 느꼈다. 고등학생 정우근군(18)도 “영화를 통해 과거 198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변호인>의 주인공 송우석(송강호 분)은 재판정에서 민주적 가치를 힘주어 역설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권 변호사 시절을 모델로 삼았다. 이런 이유로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감상을 영화와 연결시키는 관객도 다수였다. 영화 관람을 결정하고 감상하는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을 의식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개인적 품성을 언급하거나, 민주적 가치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규정하는 식이다.

소식씨(44·남)는 “노무현이 그립다”는 말로 <변호인>에 대해 입을 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서민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지금은 세상에 없는 노 전 대통령을 추억했다. 소씨의 아내인 김정혜씨(43·여)는 영화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의 ‘진정성’을 떠올렸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노 전 대통령의 마음을 영화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금은영씨(49·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금씨는 노 전 대통령이 비극적인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영화를 통해 찾았다. 주인공 송우석의 모습을 통해, 양심을 지킬 줄 알았던 인물로 노 전 대통령을 추억했다. “잘못은 누구나 한다.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고 책임지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정말 많다.” <변호인>과 노 전 대통령에게서는 그와 다른 면모를 봤다는 뜻이다.

현 시국에 대한 불만이 영화 관람을 결정하거나 감상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관객도 상당수였다. 금종진씨(28·남)는 철도 민영화 이슈 등을 지켜보며 느낀 답답함이 <변호인>을 관람하도록 한 계기였다고 밝혔다. 특히 금씨는 영화 속의 죄 없는 인물들이 끝내 무죄 판결을 받지 못해 사회정의가 구현되지 못한 대목에서 안타까워했다.

윤명희씨(59·여)는 <변호인>이 현 시국에서 젊은이들이 분노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영화라고 느꼈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당연히 지켜져야 할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 모습이 영화 속 1980년대와 유사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윤씨는 “요즘 기성세대를 보면 정부를 비판하는 젊은 사람들 의견에 무조건 반대하려는 듯한 느낌이 든다. 기성세대부터 이 영화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떠올렸던 소식씨는 현 시국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옛날로 돌아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힘의 논리, 매카시즘이 사회를 휩쓴다. ‘안녕들 하십니까’ 현상이 말해주듯, 우린 지금 안녕하지 못한 사회에 살고 있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 만큼일 순 없겠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영화는 영화일 뿐” 반응도 나와

8명의 <변호인> 감상평을 종합해보면, 인터뷰에 응한 관객들이 영화가 환기하는 현실을 감상 과정에서 상당히 의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1980년대와 지금 시국을 함께 떠올리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새긴다. 당시의 폭력을 바라보며 인권의 중요성을 떠올린다. 특히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에 많은 사람이 공감을 표시했다. 이를 현실 세계에서 수호하려 나섰던 ‘인권 변호사 노무현’의 존재는 ‘진정성’ ‘양심’ 등의 가치를 표상하며 관객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했다.

반면 다소 결이 다른 의견도 있었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변호인>에는 ‘실제 인물과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허구’임을 알리는 자막이 등장한다.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가상으로 극화돼 창작된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이진규씨(32·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영화에 겹쳐 보지는 않았다. 작품 자체를 즐긴다는 생각으로 감상했다. 영화는 영화로만 보는 게 맞다. 영화의 배경이 된 구체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는 저마다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현실과 영화를 연결 짓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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