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늙은이 스무 살, 뭘 해도 예쁘다
  • 허남웅│영화평론가 ()
  • 승인 2014.01.28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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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그녀>의 심은경

심은경은 갓 20대인 여배우치고는 너무나 어른스럽다. 주인공으로 출연한 <수상한 그녀>가 개봉한 지금 각종 인터뷰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우선 그 말투부터가 20대답지 않다. 대개 또래의 여배우라면 “~예요”라고 문장을 둥글게 종결하며 말꼬리를 흐리기 일쑤인데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입니다”라고 자기주장이 확실한 말투를 구사한다. 여전히 젖살이 가라앉지 않은 앳된 얼굴을 하고 쏟아내는 그의 특징적인 말투를 음미하다 보면 이율배반적인 매력이 넘쳐난다.

<수상한 그녀>에서 심은경이 연기하는 배역이 일종의 애늙은이다. 70대 할머니가 어느 순간 20대의 몸과 외모를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주도하기 때문이다. 70대의 오말순 할머니(나문희)에게 유일한 자랑거리는 대학교수인 아들 반현철(성동일)이다. 하지만 말순이 너무 아들만 싸고도니 며느리는 그게 아주 스트레스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병원에 입원까지 할 정도인데 그 때문에 현철은 아들과 딸을 불러 가족회의를 소집한다. 그 결과, 말순을 요양원에 보내자는 의견으로 수렴되는데, 우연히 이를 엿들은 말순은 그 충격에 집을 나오고 만다.

ⓒ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내가 자식새끼를 위해 희생해온 세월이 얼마인데 이런 대접을 받아.’ 서러움에 무작정 길을 걷던 중 말순은 청춘사진관을 발견한다. 이참에 영정 사진이나 찍어볼 겸 들어간 청춘사진관에서 말순은 사진을 찍다가 20대로 돌아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정신은 70대인데 몸은 20대로 바뀌어 있는 것. 세상에 이런 일이! 당황스러움도 잠시 20대의 육체를 갖게 되고 그동안 앓았던 관절염의 고통도 거짓말처럼 사라지면서 말순은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청춘사진관 입구에 걸려 있는 젊은 시절의 오드리 헵번 사진을 보고 오두리(심은경)로 이름을 바꾼 말순은 남자들의 대시를 받는 등 전에 없던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 맡은 성인 역할

심은경의 지금 위치를 생각하면 <수상한 그녀>의 오말순, 아니 오두리를 선택한 건 참으로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수상한 그녀>는 처음으로 맡은 성인 역할이다. 심은경이 성인이라고?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크게 각인시킨 <써니>(2011년)의 여고생 나미,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년)의 어린 궁녀 사월이를 생각하면 좀 생소한 어감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1994년생인 심은경은 올해 갓 스무 살이 된 성인이다. 말하자면 <수상한 그녀>의 오두리 역 연기는 그에게 성인 신고식인 셈이다.

아역 이미지가 강한 배우들이 성인 연기자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주로 찾는 방법은 ‘파격’이다. 파격이라고 하면 옷을 벗거나 베드신에 도전하는 등의 과감한 연기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수상한 그녀>에서 심은경의 연기는 또 다른 의미에서 파격에 가깝다. 오두리 캐릭터가 재미있는 건 몸은 파릇파릇하지만 하는 행동은 영 구닥다리(?)라는 점이다.

그 어린 외모에 브로콜리를 연상시키는 아줌마 파마를 하고 연신 사투리를 쏟아내는 그 부조화라니. 아이에게 젖을 물리느라 애쓰는 지하철 옆 좌석 엄마를 향해 모유 잘 나오는 방법에 대해 충고하는 오두리를 보고 있으면 황당하면서도 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그런 심은경의 연기를 두고 <수상한 그녀>를 연출한 황동혁 감독은 “감정이 풍부한 배우는 많지만 그 어린 나이에 감정을 정확히 조절할 줄 아는 배우는 드물다”고 극찬한다. 하긴 <수상한 그녀>는 심은경이 캐스팅되지 않았으면 쉽게 만들어지기도, 또 많은 관객의 관심을 모으기도 힘들었을 영화다. 애초 기획 당시에 오두리는 ‘쭉쭉빵빵’의 미녀로 설정돼 있었는데 할머니라는 일반의 이미지가 통통하고 품이 넓은 걸 감안하면 심은경의 캐스팅은 신의 한 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나 이전까지 그가 연기했던 캐릭터를 살펴봐도 오두리 역에 제격인 배우는 심은경밖에 없다.

예컨대, <광해>의 사월이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자신의 입을 줄이면 부모님이 생활고를 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어린 나이에 궁으로 들어온 속이 깊은 궁녀다. <광해>를 연출한 추창민 감독은 그리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사월이 역에는 심은경밖에 없다며 <써니> 이후 연기 생활을 중단하고 미국 유학을 가 있던 그를 설득해 영화에 참여시켰다.

실제로 심은경은 어린 나이에 유학을 생각했을 정도로 연기자로서 정신없이 활동해왔다. 열한 살부터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해 <단팥빵>(MBC, 2004년) <황진이>(KBS2, 2006년) <태왕사신기>(MBC, 2007년) <헨젤과 그레텔>(2007년) <불신지옥>(2009년) <퀴즈왕>(2010년) 등에 연달아 출연하며 정중동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써니> 촬영 후 심은경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3년간의 유학 생활을 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수상한 그녀>를 통해 성인 연기자로서 출발점에 섰다. 나이에 비해 속이 깊은 배우인 만큼 목표도 남다르다.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는 연기자보다 오랫동안 기억될 만한 연기파 배우를 꿈꾼단다.

우리가 언제 스무 살 나이의 여배우에게서 이런 당찬 목표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게다가 황동혁 감독이 확인시켜준 바, 그는 이미 상당 수준의 연기력까지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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