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샅바도 못 잡아보고 추락하는가
  • 김원식│미국통신원 ()
  • 승인 2014.02.12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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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지게이트’로 위기 맞은 미국 공화당 유력 대권 주자 크리스티 주지사

시사주간지 타임(TIME)의 지난해 11월18일자 커버 이미지가 미국 코미디쇼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코끼리’를 이용한 코미디가 한 주간 안방극장을 점령했다. 타임은 무언가를 말하는 듯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두운 옆모습의 남자 사진에 이런 제목을 붙였다. ‘The elephant in the room’, 즉 ‘방 안에 갇힌 코끼리’였다. 코끼리로 이름 붙여져 타임을 장식한 이 남자는 바로 그 전주에 치러진 미국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또다시 주지사가 된 이 남자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 강력한 공화당 후보로 부각될 수도 있다고 타임은 보도했다. 공교롭게도 이 남자의 별명은 거대한 몸집 때문에 ‘코끼리’로 불렸다. 공화당의 상징 동물 역시 코끼리다.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52)의 얘기다. 공화당과 크리스티 지지자들은 타임이 크리스티를 띄워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둡고 희화화된 사진을 못내 아쉽게 생각하며 찜찜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는 정치 보복을 위해 조지워싱턴 브리지(사진 오른쪽)의 일부를 고의로 폐쇄해 교통 체증을 일으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 AP 연합
그 찜찜함과 달리 크리스티는 공화당의 유력 대권 후보로 떠오르며 거칠 게 없다. 한국에서는 오바마를 이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만을 주목하고 있지만, 실제 미국 내 여론은 달랐다. 부퀴니피액 대학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력한 민주당 후보인 클린턴 전 장관과의 가상 대결에서 크리스티는 호각세를 보이거나 오히려 앞섰다. 특히 2013년 12월 조사에서 크리스티는 42%의 지지를 얻어 41%를 얻은 클린턴을 살짝 앞섰다.

“크리스티는 다리 폐쇄 사실 알고 있었다”

클린턴을 가상 대결에서 앞섰다는 기분 좋은 보도가 나간 직후인 1월8일, 크리스티는 이른바 ‘브리지게이트(bridgegate)’에 휘말렸다. 이날 언론에 폭로된 스캔들의 내용은 이랬다. 지난해 9월 크리스티가 재선 기간에 자신을 지지하지 않고 비협조적으로 나온 포트 리의 시장을 응징하려고 정치 보복 차원에서 뉴욕과 뉴저지 포트 리를 연결하는 조지워싱턴 다리 일부를 폐쇄해 교통 체증을 유발했다는 의혹이다. 당시 크리스티의 참모가 교통국 관계자와 주고받은 이메일이 폭로되면서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크리스티는 다음 날인 9일, 2시간에 걸쳐 기자회견을 했다. 자신은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며 사과하고, 사건과 관계된 참모 두 명을 즉시 해임했다. 이런 해명에도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1월31일에는 브리지게이트의 핵심 관계자가 직접 등장했다. 해임된 참모 중 한 사람인 데이비드 와일드스타인은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당시 크리스티가 다리 폐쇄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만약 크리스티가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 그가 기자회견에서 했던 해명은 거짓말이 된다.

연이은 의혹에도 크리스티는 부인으로 일관 중이다. 자신은 전혀 몰랐던 일이며 자신의 고등학교 동기인 와일드스타인의 주장을 확인하지도 않고 보도하는 언론에 파문의 책임을 돌린다. 하지만 여론은 움직이고 있다. 브리지게이트 발생 초기까지는 견고했던 크리스티 주지사의 지지율은 파문이 계속되자 급격하게 떨어졌다. 부퀴니피액 대학의 1월 여론조사에서 클린턴은 46%의 지지도를 기록했지만, 크리스티는 38%에 불과했다. 12월보다 9%포인트나 떨어지며 클린턴과의 지지율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크리스티만큼이나 속이 타들어간 쪽은 공화당이다. 지난번 대선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에게 패배한 이후 2016년에는 반드시 정권을 탈환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던 와중이었다. 민주당에서는 2016년 대선 후보로 힐러리 클린턴 전 장관의 독주 체제가 굳어진 상황이지만, 공화당은 오히려 넘쳐나는 잠룡들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중 가장 선두에 있던 주자가 궁지에 몰렸고 나머지 잠룡들의 계산도 복잡해졌다.

2월2일 워싱턴포스트가 소개한 공화당 잠룡들은 15명이 넘었다. 지난 대선에서도 공화당 후보로 나섰던 폴 라이언 하원 예산위원장은 다시 나설 계획이고,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와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 릭 샌토럼 전 상원의원 등도 재차 거명되고 있다. 의회에서는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랜드 폴(켄터키), 테드 크루즈(텍사스) 상원의원 등이 잠룡 대열에 가담했고 바비 진달 루이지애나 주지사, 존 캐시치 오하이오 주지사, 릭 스나이더 미시간 주지사, 스콧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 마이크 펜스 인디애나 주지사, 마이크 허커비 전 아칸소 주지사,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 등도 거론된다.

수많은 잠룡들 중 참신한 인물이 등장해 예비선거 과정에서 바람을 일으켜 유권자의 관심을 환기시킨다면 공화당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다. 문제는 본선 경쟁력이다. 누가 민주당의 후보, 특히 힐러리 클린턴을 꺾을 수 있느냐는 것이 핵심이다. 크리스티의 등장을 환영했던 이유는 이 점 때문이었는데, 그런 기대가 지금 일거에 날아가게 생겼다.

‘힐러리 대항마’ 급추락에 공화당 ‘깜짝’

크리스티는 예비 잠룡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정통 공화당에 뿌리를 둔 인물이다. 그는 뉴저지 뉴왁 출신의 본토박이로 대학 시절부터 공화당 정치 활동에 관여하며 정치를 배웠다. 변호사 자격을 획득한 뒤 로펌에 근무했지만 일찌감치 ‘아버지 부시’라고 불리는 조지 H. 부시 전 대통령의 선거 때부터 발을 들여 그 아들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까지 참여했다. 조지 W. 부시는 그를 뉴저지 주 검찰총장에 임명했는데, 크리스티는 정치적 부패 사건이나 조직범죄, 마약, 아동 범죄 등을 강하게 다루며 인기를 끌었고, 이를 기반으로 2009년 11월 뉴저지 주지사에 당선됐다. 지난번 미국 대선 때는 허리케인 샌디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칭찬한 탓에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동성 결혼을 끝까지 거부하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개인적인 뿌리는 정통 보수에 있고 그런 그는 공화당 수뇌부에게 정권 재탈환의 비장의 무기였다.

지금 공화당 내에서 일부만이 크리스티를 비난하고 있을 뿐, 이번 게이트에 대해 애써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중지란의 모습으로 비칠 비난을 앞장서서 할 수도 없고, 크리스티를 낙마시킬 경우 본선 패배의 책임을 뒤집어써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조용히 사건을 관망하는 게 공화당의 현실적인 처지다. 공교롭게도 크리스티 주지사에 대한 파문이 일어나자마자 이미 오바마와 겨뤘던 미트 롬니의 재출마설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그의 측근들이 강하게 부인하고 있는데도 그렇다. 크리스티의 위기는 공화당의 절박함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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