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판은 미움과 응어리 녹아내리게 하는 축제”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03.0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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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 김금화 일대기 다룬 <만신>의 박찬경 감독

박찬경 감독의 정체성은 밖에서 보기에는 둘이다. 하나는 영화감독이고 하나는 미술인이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사진학으로 석사 학위를 땄다. 1997년 금호미술관에서 첫 개인전 <블랙박스: 냉전 이미지의 기억>을 열었고 2004년에는 에르메스 미술상을 받았다. 사진·비디오·설치를 아우르는 그의 작업이 미술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그는 ‘월경’을 시도했다. 갤러리에서 비디오로 보여주는 설치 작업(미디어아트)을 하다가 일반 영화관에서 보여주는 영화로 범위를 넓힌 것. 형인 박찬욱 감독과 함께 공동 연출한 <파란만장>(2010년)은 베를린 영화제 단편 부문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이어 <청출어람>(2012년), 최근에는 서울을 다룬 영화 <고진감래>(2013년)를 형과 함께 연출해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동시 개봉했다. 그의 현재 직함은 미디어시티서울2014(제8회 서울 국제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의 예술감독이다. 미술과 영화 양쪽을 다 붙들고 있는 것이다.

ⓒ 시사저널 최준필
그런 그가 극장용 장편 상업영화를 완성했다. 개봉(3월6일)을 앞둔 그는 관객이 자신의 영화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두고 많이 긴장한 듯했다. 먼저 그동안 해온 ‘미디어아트’와 ‘영화’가 어떻게 다른지 물었다. “미디어아트 형식의 작품은 개인의 비중이 크다. 갤러리나 뮤지엄에서 보여주는 작품이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곳을 찾는 관람객도 그런 작가의 개성을 존중한다. 하지만 영화는 연출부나 조명, 촬영 등 여러 스태프와 시스템이 필요하고 큰 규모의 자본이 있어야 한다. 영화는 재미있어야 한다. 작가가 잘난 척하느라고 일부러 불친절하면 안 되고 관객도 잘난 척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게 영화와 미디어아트의 차이다.”

“언제까지 서구를 선망해야 하나”

순수미술의 영역인 미디어아트에서 상업영화로 넘어오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다. <엉클 분미>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태국의 미디어아티스트로서 장르를 뛰어넘어 기존 영화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환상성을 이끌어냈다. 영국의 미디어아티스트 출신 스티브 맥퀸은 최근작 <노예 12년>을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등 9개 부문 후보로 올려놓았다. 미술인 출신의 신선한 관점이 영화계에서 환호를 이끌어내고 있는 것. 박찬경 감독이 장편 영화로 낙점한 소재는 무당이다. 그는 황해도 출신 큰무당인 김금화의 일대기를 다룬 <만신>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섞은 독특한 질감의 영화로 만들어냈다. 그는 이번 작품에 대해 “극장용 상업영화로 만들었다. 되도록 많은 극장에서 상영되도록 만든 영화”라고 밝혔다.

왜 무당이었을까. 굿이나 무당은 우리 사회에서 개발 연대가 시작된 1960년대 이래 ‘구습’과 ‘맹신’이라는 낙인이 찍혀 천대받는 하류 문화로 전락했다. “김금화의 굿은 공동체의 굿이다. 마을 공동체를 통합시키고 마을의 문제를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무당에 대한 편견과 천시가 너무 많아서 그걸 넘어서서 다루는 영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숙명’이나 ‘신비’ 같은 무당의 개인적 사연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대신 무속의 사회성이나 역사성에 무게중심을 뒀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무당이 무가를 부르는 부분에선 어김없이 노랫말을 적은 자막이 등장한다. 오늘의 관객이 무가의 가사를 온전히 알아들어야 왜 굿이 민중예술이고 공동체의 잔치판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에서 자라고 서울대를 나와 미국 유학까지 다녀오는 동안 “꽹과리 치는 친구에게 관심이 없었던” 그는 “어느 순간 무당 영화를 만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미술계에는 서구 선망이 강하다. 뉴욕이나 파리가 최고인 줄 안다. 그런 게 신물이 나기도 했고 ‘언제까지 이렇게 선망해야 하나’ 하는 회의도 들었다. 게다가 서구가 정말 잘하고 있냐면 그렇지도 않다. 서구의 모더니티도 붕괴했다. 그렇다면 일방적으로 수입된 서구 모더니티 자체를 다시 봐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굿은 ‘인간 소외가 없는, 지금 사회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의 형식’이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신의 절대적인 권위에 인간은 복종한다. 굿에서 신은 핑계일 뿐이다. 굿은 인간 중심적이다. 굿판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금기도 없고 인간관계가 중시된다. 서로 간의 관계에서 응어리를 푸는 게 중요하다. 사람의 욕망에 솔직하게 대응한다.”

인간사의 미움과 응어리를 녹아내리게 하는 축제인 굿판과 그 진행자인 무당은 잊히고 천대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박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드는 데 3년이 걸렸다. 3억원의 제작비 마련에 애를 먹은 탓이다. 이도 그의 사비와 영화제 펀드, 일반인 상대의 클라우드 펀딩, 갤러리에서 빌린 돈 등으로 간신히 맞췄다. 문소리·류현경·김새론 등 배우의 이름값과 영화에 쓰인 컴퓨터그래픽, 배 위에서 촬영한 장면을 생각하면 진짜 짠 예산이다. 배우와 스태프의 ‘노력 봉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에 이창동 감독이 ‘영화는 돈의 예술이다’란 말을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정말 실감이 됐다. 한밤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크레인이 오면 1000만원 이상이 들어가니까 그걸 못했다. 예산 규모 때문에 찍고 싶은 것을 마음껏 담지 못해 아쉽다.”

영화 속 장면. ⓒ 볼 BOL 제공
“다음에는 더 상업적인 영화 만들겠다”

그는 비슷한 연배의 미디어아티스트 출신인 아피찻퐁에 대해 얘기했다. “아피찻퐁은 경계가 없는 영화를 만든다. <열대병>은 정말 잘 만들었다. 그의 작품을 갤러리에서 상영할 경우 좀 더 설치미술에 가깝게 전시한다는 차이 정도다. 대체로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미디어아트는 20분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다. 미술계에는 ‘3분이 넘으면 관람객이 안 본다’는 말이 있다. 반복해서 틀어야 하기에 미디어아트는 짧다. 사람들이 ‘너는 미술가냐, 큐레이터냐, 영화감독이냐’고 따지지만 나는 그게 구분이 안 된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정해진 장르의 언어만 쫓기보다는 다른 언어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업영화도 장르의 관습적인 룰에 맞춰서 영화를 뽑아내는 것으로 얼마간 버틸 수 있지만 결국 새로운 것을 집어넣지 않으면 상업적인 성과를 얻을 수 없다.”

그는 이 대목에서 1990년대 전성기를 누리다 최근 10여 년 동안 침체기를 보냈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공주 드레스’라는 장르의 룰은 고수했지만 ‘자매애’라는 ‘신상품 코드’를 가미한 <겨울왕국>으로 흥행 홈런을 친 것을 예로 들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도 미술과 영화 두 쪽을 모두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영화는 여러 스태프와 일하는 재미가 있지만 작업실에서 혼자 꿈지럭대는 재미는 없다. 미술은 혼자서 하는 재미가 있다. 망상도 해보고 사진도 찍고 혼자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의 꿈은 바리데기 설화를 판타지 영화로 만드는 것이다. “바리데기는 우리나라의 신화다. 한 500억원짜리 대작 판타지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다. 투자자를 만나야 하는데…(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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